"임방규 이하 29명 사형!"
재판장의 사형 언도와 함께 법정 안 양옆으로 늘어선 헌병들이 '찰카닥' 장탄을 했다. 행여 있을지 모를 난동에 대비한 실탄 장착이었다. 이어 기세등등한 군인들이 '빨갱이 사형수'를 서둘러 재판장에서 끌어냈다.
재판은 하루 만에 끝났다. 취조 뒤 검사가 몇 장의 서류를 넘기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상을 읊어내자, 소령 계급장을 단 재판장은 아무런 감흥 없이 사형을 언도했다. 방청객도, 변론도 필요 없는 군사재판이 순식간에 마무리됐다.
착잡하고 무거운 마음을 대변하듯 임시 재판장으로 쓰인 전라남도 경찰국 옆 기와집 '무덕정(武德亭)'을 빠져나올 즈음 뿌연 이슬비가 앞을 가렸다. 하지만 몇몇 빨치산들은 수도 없이 생사를 넘나든 탓에 '사형'을 마치 장난처럼 여기며 시시덕댔다.
죽음은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재판이 끝난 뒤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사형수들은 말없이 집행을 기다렸다. 곧이어 이들이 감금된 구치소에 다부진 표정의 군인들이 마룻장을 '쿵쾅'거리며 들어왔다.
집행관의 지시가 공간을 가득 메웠고, 또 한 번 '찰카닥' 장탄소리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왠지 모를 자유로움도 함께 느꼈다. 꽃 같은 청춘, 몹시도 고단했다. 마른 침을 겨우 삼켜낸 그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허공을 갈랐다.
"어린 놈 머리통에 빨갱이 물이 들면…"
작은 사무실 안 길게 늘어뜨린 책상 끝에 임방규가 앉았다. 전날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전라남도 경찰국으로 넘어온 터라 긴장된 몸은 잔뜩 움츠려들었다.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 두 명과 사복차림의 민간인 한명이 수북이 쌓인 서류 너머로 그를 응시했다. 한 장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 찰카닥거린 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임방규를 매섭게 쏘아봤다. 조금이라도 허튼소리를 하면 그 자리에서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다.
"이름"
"임방규입니다"
"고향은?"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입니다"
몇 가지 신상을 물은 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정확히 답해야 한다"
"언제, 어디로 입산했나?"
"9·28후퇴 시에 임실 성수산으로 입산했습니다."
"보급 사업은 몇 번이나 나갔지?"
"20여 회 나갔습니다"
"산에서 2년 가까이 있었는데 보급사업을 20번밖에 안 나갔다고?"
"전투는 몇 회 나갔나"
"10회 정도 됩니다"
"사람은 몇이나 죽였어?"
"죽인 일이 없습니다."
"뭐? 죽인 일 없어?"
심문하던 중위가 권총을 집어 들더니 임방규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한참 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중위는 씩씩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기차 습격 두 번, 쌍치 돌고개 전투, 운암지서 습격에 참가했는데, 그 때 군경이 몇이나 죽었어?"
"기차 습격 때 죽은 사람은 없고, 상운암 작전에서 경찰 60여 명을 생포했는데 전원 석방했습니다. 돌고개 전투에서는 경찰이 포위망을 빠져 나갔기 때문에 큰 전투는 없었고, 참호 속에 시체 3구가 있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임방규를 취조한 중위가 서류에 뭐라 끄적이더니 옆 사람에게 속삭이듯 건넸다.
"장개석 총통이 말한 바와 같이 명주 베에 붉은 물이 들면 빨아도 빠지지 않는 것처럼, 어린 놈 머리통에 빨갱이 물이 들면 별수 없이 그냥 죽여야 해"
그렇게 취조가 끝났고, 다음날 오전 검찰 구형과 함께 이날 오후 재판이 이뤄졌다. 그리고 광주교도소로 옮겨진 사형수들은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그렇게 수백 명이 소, 돼지마냥 죽어나갔다.
군인들은 어쩌면 이들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을 테다. 임방규를 취조한 중위의 말처럼 개선의 여지없이 그냥 죽여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빨갱이는 그런 존재였다. 죽여도 되는, 아니 죽어 없어져야 하는….
(전라북도 순창 편은 회문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임방규 씨와 김창근 씨, 그리고 순창과 임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기사화됐습니다. 결코 꺼내놓기 쉽지 않았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지난날의 청춘과 희생을 술회해주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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