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40여 명 집단 사살…아이 울음소리에 '확인 사살'
"사격…."
조금 뒤 다시 이어진 "확인 사살"
차갑고 날카로운 중대장 목소리와 함께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쏟아져 나온 총알을 맞고 사람들은 곧바로 땅바닥에 고꾸라졌고, 수양산에 부딪혀 되돌아온 한스런 굉음은 하갈 마을 주민의 오열과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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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경 마을을 덮친 군인들은 어둑해지는 6~7시경 총살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끝났다'고 생각한 이들은 무기를 챙겨들고 산을 내려오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앙! 아아앙" 피범벅이 된 시체더미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아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이 아직도 살아있네"라는 중대장의 말과 함께 "확인 사살"이란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2차 총격이 가해졌다. 어머니 등 뒤에서 겨우 총탄을 피한 한 아이의 울음은 그제야 멈췄다.
당시 죽은 아이의 신원은 정확치 않으나 최정휴(당시 61세), 최영휴(당시 58세), 최병철(당시 38세), 박귀순(당시 39세), 최영주(당시 17세), 최정애(당시 6세), 최경례(당시 1세·호적미등재) 등 일가족 7명이 몰살된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최정애, 최경례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최 씨 가족이 이렇듯 변을 당한 것은 국군을 인민군으로 착각한 최정휴(할아버지) 씨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숙부(최병희)와 당숙(최병호)이 몇 개월 전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군인은 이들 모두를 '좌익분자'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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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주(81·대덕면 갈전리) 씨도 당시 현장에서 형을 잃었다. 하갈 마을에서 취재진과 만난 그는 "60세 중반이던 아버지는 군인들에 의해 논바닥에서 심한 매질을 당했고, 형님(최길주·당시 20살)은 군인에게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최 씨는 "그때 내 나이가 16살이었는데, 내 밑으로 13살, 10살 동생과 함께 산으로 도망가 우리 세 형제는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40여 명의 무고한 양민들은 고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서 한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총살 집행을 끝낸 군인들은 '한 마을을 끝냈다'는 듯한 표정을 내보이며 "출발"이란 소리와 함께 유유히 그 장소를 떠났다. 12중대는 이후 하갈을 지나 다음 장소인 서유초등학교(화순 북면 서유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전을 이어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선(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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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끈적한 피비린내 속에서 신음소리가 새 나왔다. 팔과 허리에 총상을 입은 류동호 씨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들 사이에서 가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서너 시간 전 보리밭을 갈던 17살 학생은 참혹한 고통과 공포, 그리고 추위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류 씨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여섯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경을 헤맨 끝에 정신을 차린 그는 나뒹구는 시체더미 속에 살아난 이가 자신 말고 누군가 또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날 총살로 40여 명 가운데 7~8명이 목숨을 부지했고, 현재까지 생존한 이는 류 씨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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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운이었다"고 했다. 또 "하늘이 돕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살아난 류 씨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죽을 힘을 다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갈전리에서 만난 류 씨의 팔에는 참혹했던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총상 자국은 깊게 패어 있었고, 힘줄이 끊겼는지 손은 불구가 돼 펴지지 않았다. 취재진의 요구에 자신을 팔을 걷어 보인 그는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애써 팔에서 눈을 뗐다.
류 씨는 "총상을 입고 혼이 나갔다. 정신을 잃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2차 사격만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시체 속에서 어린 아기가 울더라고, 그러더니 군인들이 '이놈들 봐라' 하면서 다시 확인 사살을 하는 거야, 그 통에 더 죽었지." 당시 상황을 회고하는 류 씨의 표정은 무척이나 힘들어보였다.
마을로 내려온 그는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집에서 총상을 치료했다. 그는 "아주까리(피마자) 껍질을 벗기면 하얀 알맹이가 나오는데, 그것을 숯검정, 송진과 함께 버무려 고약을 만들어 상처에 발랐다"고 했다. 그리고 "팔에서 구더기를 직접 뺐다"는 말도 했다. 몇 개월간 그렇게 민간요법으로 치료한 끝에 상처가 아물었고, 지금의 팔을 얻었다.
('전남 화순 ④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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