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의용군 임방규, '성수산 빨치산'이 되다
1950년 9월 20일경, 낙동강 전투에 참여한 북한 의용군 임방규(당시 19살). 그는 거제와 마주하고 있는 통영 광도면 횡리(고성과 통영사이)에 주둔했다. 한·미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사천 방어 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낙동강 전투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의 화력은 막강했고, 전선은 하루가 다르게 흐트러졌다. 낙동강 지류인 진주 남강을 타고 전선에 합류했지만 연합군에 밀려 의령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또 다시 진주로, 삼천포로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고성으로 이동했다. 결국, 낙동강 서남부 지역을 담당한 인민군은 그렇게 분산됐고, 각자 전선을 타고 이북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임방규는 회문산(해발 778m)에 조선노동당 전북도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북 순창으로 갔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탓에 순창은 심리적으로 그다지 낯설지 않은 곳이다. 지리산을 우회한 그는 노랗게 익어가는 벼 밭을 가로질렀다. 황금빛 들녘이 푸근한 어머니의 인상처럼 따스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실까? 동생들은 잘 있겠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한없이 흘러내렸다. 피 튀기는 전장과 동지들 그리고 평온하게만 보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교차하며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뒤로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응어리졌던 눈물을 쏟고 나니 잠시 여독이 풀린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경남 함양을 지나 어느덧 전북 임실에 다다른 그는 곧장 성수산(해발 876m)을 넘어 순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무주 덕유산에서 순창 회문산으로 뻗어 내린 노령산맥 한 줄기에 해당하는 성수산은 계곡이 깊고 숲이 울창하다. 또한 신령스런 자태가 말해주듯 고려와 조선의 건국 설화가 얽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실 지역에서 독자적 무장부대를 조직한 '성수산 빨치산' 이기태가 산을 넘어가는 임방규를 한 눈에 알아보고 반겼다. 그 꼴로 산을 넘는 이는 십중팔구 빨치산이 분명했다. 임방규는 패퇴한데다 수백리를 걸어온 탓에 몰골이 형편없었다.
"동무는 어디서 오는 길이요?"
이기태가 말을 건넸다.
"낙동강에서 회문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낙동강 전투까지 참여한 임방규가 이기태 눈에 듬직해 보였다.
이곳의 병력은 100여 명 남짓, 하지만 전투경험이 별로 없는데다 독자적 무장부대란 점에서 게릴라전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기태의 권유로 임방규는 성수산 빨치산 부대의 소대장을 맡게 된다.
성수산에서 몇 차례 게릴라전을 편 임방규 일행은 12월 말경 회문산으로 향했다. 군경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상황에서 소규모 독립부대만으로 장기전을 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군(당) 유격대에서 파견된 군사지도원이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주문한 터라 어떻게든 도당과 선이 닿아야만 했다.
당시 빨치산은 철저하게 도당에 소속돼 있어 공식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타 지역 이동이 불가했다. 이 때문에 대규모 작전을 위해서는 도당의 지휘를 받는 것이 효과적이다. 회문산에 도착한 이들은 이후 기포병단에 편입돼 본격적인 '회문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전북도당 사령부, 그리고 회문산 생활
회문산은 별천지였다. 마치 합법시기에 들어선 것 마냥 반가웠다. 전북도당 트(아지트의 빨치산 용어) 한가운데 인공기가 나부꼈고, 인민들은 한없이 여유로워보였다. 산 중턱에는 빨치산 간부 학교인 노령학원이 있어 사상 및 군사교육이 이뤄졌다. 합법시기 도당학교 교사와 도(道) 선전부 이론 간부들이 학습을 지도했다.
1951년 여름 열병을 앓고 환자트에 있을 당시 임방규도 이곳 노령학원에서 간부교육을 받은 바 있다. 20일 남짓 이어진 교육은 <해방 후 조선> <조선노동당 당사도> <유격전술>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가운데 유격전술은 46사단 참모장 조철호가 담당했다. 조철호 참모장은 백암과 함께 대표적인 구빨(전쟁 전 입산한 구빨치산의 준말) 출신 인사다.
전북도당 사령부(도당위원장 겸 유격사령부 사령관 방준표)가 위치한 회문산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주봉을 기준으로 동쪽에 지리산이 있고, 서쪽으로 구림과 쌍치가 내려다보이는 장군봉(837m)이 부드러운 산릉을 끼고 우뚝 서있다. 또 남으로는 무등산과 북으로는 모악산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 회문산 뒤편(장군봉 북쪽)은 옥정호(임실군 운암면)에 가로막혀 군경토벌대의 진입을 어렵게 했다. 옥정호에 한번 갇힌 계곡수는 섬진강의 상류가 되어 광양만으로 흘러 보내졌다.
도당 사령부는 방준표(사령관)와 조병화(부사령관)를 중심으로 7개 직속부대(병단)와 14개 지역 유격대(유대)로 구성돼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회문산 남단 성미산(589m)은 벼락병단, 동쪽 여분산(엽운산·774m)은 번개와 카추사 병단, 북쪽 히여터에는 탱크병단과 야전병원이, 서북쪽은 독수리병단과 독립 중대격인 임실군당 유격대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차이를 보인다. 도당 사령부와 각 병단에서 활동의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성미산 일대는 전쟁 전부터 활동한 백암부대(이후 기포병단 일부가 주둔), 여분산에는 도당 주력부대이자 지원부대인 기포병단이 있었다. 더욱이 여분산은 회문산 동쪽이 아닌 서쪽에 위치해 있다. 다만, 번개병단이 순창 쌍치면 국사봉(정읍과 경계)에 주둔한 점으로 미뤄볼 때 여분산 일부를 관할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리고 장군봉(837m)과 투구봉(771m) 사이 대수말 계곡에 자리 잡은 도당 사령부는 그 직속부대인 보위병단을 거느리며 겹겹이 방어선을 만들었다.
도당은 △조직 △문화 △군사 △후방(보급 및 식량조달) △정찰정보(길안내) △통신 △여맹부(여성부·연락병 파견 등 담당) △병참(무기제조) △피복부(의복) 등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문화부는 군사와 행정, 사상사업까지 총괄했다.
전쟁 초 도당 및 각 군당에서는 무장부대(병단)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곤 했다. 살생이나 약탈 등의 피해가 없었는지 조사해 이를 문책한 것이다. 음식과 여러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 인민 속으로 들어가 지하당을 조직해야 하는 빨치산으로선 인민과 떨어져 있는 투쟁은 있을 수 없었다.
이들은 또 병단의 개별적 사업도 지원했으며, 지역 선정은 물론 길 안내까지 도왔다. 여기에 매번 전선을 옮겨 다니는 무장부대와 달리 지역 사정을 꿰뚫고 있었기에 우익인사에 대한 정보도 지녔다. 이 때문에 '인민재판'은 도당이나 군당이 규정한 '반동인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회문산에서의 초기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며 풍족했다. 전북도당은 자체적으로 발전기를 돌렸고, 전화기도 구비해놓고 있었다. 각 고지마다 전선을 연결해 전황을 보고받는 등 작전지시도 원활히 이뤄졌다. 또한 부족한 실탄과 지뢰 등은 직접 제작해 사용했다. 여기에 해방지구 각 인민위원장으로부터 걷은 현물세도 상당했다.
빨치산에게 탄알은 생명과도 같다. 허나 조달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탄피를 주워 납탄을 자체 제작해 사용했다. 납을 녹여 총알을 만들었고, 뇌관은 성냥 대가리로 재생했다. 포탄을 분해한 화약으로 총탄 수십 발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위해 도당은 정미소까지 갖추는 등 그야말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요새였다.
전북도당 편제와 7개 병단
전북도당은 노령산맥 줄기 따라 지리산까지 이어진 3개 지구로 구성돼 있었다. 회문산 일대를 사수한 남부지구, 지리산의 중부지구, 완주군 동상면 명지목 협곡의 북부지구가 그것이다.
또한 도당 산하 7개 병단(보위부대 포함)이 주요 거점에 포진됐다. △기포(임실·순창 등) △독수리(임실 청웅·덕치면, 순창 일부) △카추샤(정읍 내장산을 비롯해 부안·고창 인근) △벼락(정읍·순창 일부) △탱크(정읍·고창) △번개병단(정읍 및 순창 쌍치면 일부)을 비롯해 독립 중대격인 임실군당 유격대와 특공대 역할을 한 보위부대가 도당을 수호했다.
여기에 변산을 중심으로 한 부안 유격대, 고창 선운산 쪽에 위치한 고창 유격대를 포함해 김제, 완주, 정읍, 장수 유격대 등 전북 14개 유격대가 각 지역을 담당하며 마지막까지 항전했다.
일개 병단에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400여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각 병단마다 그 수가 달라 정확하진 않다. 다만, 임방규가 속해있던 기포병단은 이 가운데 가장 많은 5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화력과 작전 성과도 뛰어났다.
각 병단의 이름은 병단장이나 참모장의 특징을 따기도 한다. 카추샤병단, 일명 왜(와)가리병단은 '스탈린의 오르간'이라 불린 소련제 카츄사(Katyusha) 포의 이름을 딴 병단으로, 병단장 박춘생이 왜가리처럼 말이 많고 시끄럽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호령을 칠라치면 '와, 와'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와가리 동지'라는 별칭도 붙었다.
기포병단, 즉 외팔이부대는 외팔이 참모장 이상윤의 모습에서 따왔다. 다만, 이 명칭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불린 이름으로 이상윤이 죽기 전까지 군경은 그의 행적을 한참동안 추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인근에서 활동한 외팔이는 이상윤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회문산과 덕유산, 성수산 일대에서 활동한 오복득(가명 문남호)과 전북 북부지구(진안 운장산 인근)를 중심으로 활동한 최태환이 그들이다.
오복득은 1953년 5지구당 유격지도부(이현상이 이끈 조선인민유격대 최후 사령부 역할)의 부부장까지 지낸 인물이며, 인민군 중좌 출신 최태환은 낙동강 전투에서 팔에 부상을 입고 후퇴하던 중 퇴로가 막히자 임실에서 입산했다. '외팔이'를 한 명으로 알고 있던 군경이 곳곳에서 나타난 '외팔이 부대'를 신출귀몰한 존재로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팔로군 출신의 인민군 대위였던 이상윤은 '9·28 서울수복' 후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입산했다. 대담한 성격에 유격전 또한 능했던 그는 남원군당 군사부장, 407연대 참모장, 항미(抗美)연대 참모장 등을 지냈다. 남원 유격대장 시절 제조 수류탄을 시험하다가 폭발사고로 그만 오른손을 잃은 이상윤은 토벌대에 적잖은 피해를 안겨준 인물이다. 이 때문에 군경이 벼르던 요주 인물이었다.
한번은 참모장 이상윤이 장난을 친다며 임방규의 복부를 툭 쳤던 일이 있다. 산속을 헤매며 토벌대와 마주하기도 수십 번, 이골이 난 임방규 몸도 어느새 '산(山) 사람'이 되어갔지만, 그의 뭉툭한 팔꿈치로 맞는 순간 '헉' 하고 숨이 멎는 듯 했다. 손목이 절단된 팔목은 딱딱한 쇠뭉치마냥 단단하고 다부졌다.
각 병단의 규모는 작았으나, 편제는 인민군 형태를 따랐다. 15~20여 명이 한 소대를 이루고, 이것이 다시 4개 소대가 모여 일개 중대가 된다. 그러니 중대병력은 대략 60~70명이 되는 것이다.
△병단장 △(무력)연대장-연대 정치위원 △참모장 △문화부장 △적공(공작)지도원 △민흥지도원(대민사업) △정찰참모 △대열참모 순으로 연대 간부가 구성됐고, 대대는 △(무력)대대장-대대 정치지도원(정치원) △(무력)중대장-정치부중대장 △(무력)소대장 △부소대장(정치사업 담당) 등의 계급으로 이어졌다.
임방규는 기포병단에서 정치부중대장(문화부중대장 또는 초급정치지도원으로도 불림)을 지냈다. 학습(정훈), 서무, 보급, 인사 등 모든 후방 업무를 담당하는 정치부중대장은 무엇보다 사상적 무장이 투철해야만 한다.
중대원들의 사상교육 역시 정치부중대장의 몫이다. 이 때문에 굳이 직급으로 치면 무력중대장 아래지만, 정치부중대장의 영향력은 무력중대장의 그것보다 컸다. 더욱이 무력중대장은 당원이 아니어도 가능했지만, 정치부중대장은 반드시 당원이어야만 했다.
(전라북도 순창 편은 회문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임방규 씨와 김창근 씨, 그리고 순창과 임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기사화됐습니다. 결코 꺼내놓기 쉽지 않았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지난날의 청춘과 희생을 술회해주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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