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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100명?…"겁도 아니게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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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100명?…"겁도 아니게 죽였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화순 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빨치산 전남총사령부와 국군 제11사단의 '견벽청야'

1950년 11월, 전남 화순과 담양군 접경지인 수양산(해발593m)에 200여명의 빨치산 부대가 주둔했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한국전쟁 당시 반군의 근거지였던 화순은 1950년 7월 인민군이 점령해 9월 퇴각한 이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 반 동안 빨치산과 군경 간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특히, 화순 북면에 위치한 백아산(810m)은 무등산과 지리산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김선우가 이끈 인민유격대(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주둔했으며, 백아산 기슭 용촌마을(북면 용곡리)에는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 본부가 설치돼 있었다.

또, 화순 남단 도암면에 있는 화학산(해발614m)은 영암, 장흥, 보성의 경계와 맞닿아 있는 천혜 요새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이 주둔했을 만큼 산세가 험해 전남 동남부 지역 빨치산들의 중심지가 됐던 곳이다.

▲ 빨치산으로 변복한 국군은 마을 주민들에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강요한 뒤 '용공분자'로 분류, 총살시켰다. 주민들이 학살된 언덕에 오르자 하갈마을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커버리지(정찬대)

전남도당은 당초 광주에 있었다. 하지만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뒤바뀌면서 중앙당의 지하당 개편지시와 함께 이곳 화순으로 옮겨졌다. 이후 당 조직을 비합법 체제로 전환한 도당은 조직위원회를 통해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그 산하 6개 지구대 창설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함으로써 빨치산 체제를 재정비한다.

화순을 중심으로 둘러싼 6개 지구는 △무등산(해발1187m)의 광주지구 △담양 추월산(해발731m) 가마골의 노령지구 △구례와 광양의 가교인 백운산(해발1218m)지구 △화순과 순천에 걸쳐있는 모후산(해발919m)지구 △장흥군 유치면을 비롯한 전남 동남부권의 유치지구 △영광과 함평을 근거지로 한 불갑산(해발516m)지구 등으로 분류된다.


빨치산은 이곳 산악 지대를 근거지로 호남지역 교란작전을 폈고, 군경과 끈질기게 대치하며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훗날 백아산을 비롯해 화순 곳곳에서 후퇴한 이들은 최후의 보루인 지리산으로 들어가 마지막 항전을 펴기도 했다.


호남 지역 공비토벌을 진두지휘한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은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모두 4기에 걸쳐 백아산 고립 작전을 폈다. 1950년 8월27일 경북 영천에서 공비소탕 목적으로 창설된 11사단은 전북 남원에 사단본부를 차리고, 상주에 9연대, 전주에 13연대, 광주에 20연대, 남원에 공병대대를 배치해 작전을 수행했다.


11사단은 이곳에서 수많은 양민들의 피로 얼룩진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통해 반군이 이용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없앴다. 견벽청야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의미의 일명 초토화 작전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최덕신 증언록>에 따르면 최덕신은 부하 지휘관들에게 '견벽청야' 작전을 설명하면서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1사단의 악명 높은 작전은 함평양민학살사건(524명 사망), 거창양민학살사건(719명 사망), 산청·함양양민학살사건(705명 사망) 등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러한 무분별한 학살의 비극은 화순도 비켜갈 수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피의 학살'을 당한 하갈마을에는 화해와 상생, 평화를 주제로 한 벽화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비극의 시작…"겁도 아니게 죽였어"

'치이익, 치익'…"하갈마을에 빨치산 주둔 파악, 이동 후 전원 소탕바람."


1950년 11월10일, 백아산 빨치산부대 고립작전을 펴기 위해 화순 이서면으로 향하던 국군 제11사단 20연대 3대대 12중대는 급히 상부의 무전을 받고 하갈마을이 있는 담양군 대덕면 갈전리로 향한다.

하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하루 전 반군은 이미 수양산을 벗어나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있던 백아산으로 후퇴한 뒤였다. 산정, 월곡, 하갈마을의 비극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다.

수양산을 넘어온 12중대는 산 아래 산정마을(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에 다다랐다. 산정과 하갈마을(대덕면 갈전리)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또 산정 아랫동네인 저심마을(대덕면 운산리)을 지나면 이곳의 행정구역은 화순군 북면 맹리(맹촌·월곡마을)로 바뀐다. 그리고 월곡과 하갈마을은 화순과 담양의 경계가 되는 887번 지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접해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행정구역만 다를 뿐 이곳 모두 화순 생활권에 포함돼 있다.

산정사람 모두를 집결시킨 군인은 마을 인민위원장과 그 가족부터 찾았다. 1950년 7월 인민군이 화순을 점령한 이후 퇴각기인 9월 말까지 이들은 리(里)와 면(面) 단위에 리 인민위원장(이장)과 면 인민위원장(면장)을 두고 화순 곳곳을 통제해왔다. 또 여성동맹위원장(부녀회장)을 두기도 했다.

당시 산정마을 (리)인민위원장이던 고광하 씨는 출타 중이었고, 그의 모친 박모 씨(당시 56세)와 형 고광을(당시 37세), 동생 고광철(당시 21세), 고광하의 부인 박길남(당시 23세) 씨가 군인들 앞에 섰다. 또 여성동맹위원장 김영랑(당시 25세) 씨도 함께 불러냈다. 머리에 총구를 겨눈 군인들은 "네놈들 모두 빨갱이와 똑같다"고 말한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관자놀이에선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뒤이어 나머지 주민들도 일렬로 세워 사살했고, 그 자리에서만 20여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그곳에 정연태(당시 20살·현재 작고) 씨도 있었다. 조선대학교 법학과 1학년이던 그는 어수선한 시기에 학교를 가지 않은 채 집에 있었다. 군인은 정 씨의 가슴팍에 총부리를 들이댔다. 정 씨는 "조대 법대 학생인데, 왜 우리를 죽이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공포감 때문에 목소리는 울먹였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탓에 눈빛은 결기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군인들도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이내 정 씨를 매섭게 쏘아봤다. 차가운 분위기를 뚫고 군 장교 중 한 명이 "아무개 교수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 씨는 "제 은사님"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의 신분을 확인한 뒤 총을 거뒀고, 그에게 길 안내를 지시했다.

▲ 저심마을(화순 맹리)에서 수양산 쪽으로 곧장 올라가면 산정마을(담양 운산리)이 나온다. 상부의 무전을 받고 산을 넘어온 군인들은 산정마을 주민을 일렬로 세운 뒤 그대로 총살시켰다. ⓒ커버리지(정찬대)

정 씨의 안내를 받은 12중대는 산정과 내심마을을 지나 맹리로 향했다. 맹리2구인 월곡마을에 도착한 군인은 또 다시 야수로 돌변한 채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어냈다. 그런 뒤 젊은 사람 위주로 빨갱이 부역 혐의를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순(당시 38세) 씨가 그 자리에서 사살됐고, 그의 부친 정충래(당시 74세) 씨는 "왜 내 아들을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자식 뒤를 이었다.


지난 1월27일 맹리에서 만난 임봉림(여·71세) 씨는 취재진을 향해 "겁도 아니게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당시 6살이던 그는 길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에 사람들을 눕혀놓고 총질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들이 그런 시상을 살았어, 그런 거 생각하면 짠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당신 스스로 한 많은 삶을 살았지만, 부모세대는 더했다는 것이다.


12중대는 이곳에서 몇몇 젊은이를 포박한 뒤 길 건너 하갈마을로 이동했다. 그리고 하갈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학살'이 단행된다.

('전남 화순 ②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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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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