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남산뫼 학살이 이뤄진 그 시각 정 씨 가족은 면소재지로 향했다. 그런데 불을 지르고 뒤늦게 마을을 빠져나온 진상 씨 친구 이귀범이 "진상아, 느그 형 총 맞고 아버지만 찾드라"며 형의 소식을 일러줬다. 군인들이 마을을 빠져나간 뒤 남산뫼 현장을 몰래 찾은 그가 진덕 씨를 봤던 것이다.
연당 방죽에 있는 줄만 알았던 형이 남산뫼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은 깜짝 놀랐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미처 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가재도구를 짊어진 채 힘겹게 이동하던 아버지는 정 씨 형제를 붙잡고 뛰다시피 남산뫼로 되돌아왔다.
남산뫼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참상이 정 씨 눈에 들어왔다. 동네를 빠져나올 때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지축을 흔들더니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던 게다.
기관총을 거치한 듯한 언덕은 노란 탄피로 뒤덮여 있었다. 어찌나 많은 탄피가 깔렸던지 그 위를 걸을 때마다 자갈밭을 걷는 듯 부스럭댔다. 피 묻은 탄피는 차갑고 미끄러웠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자꾸만 넘어져 네 발로 기어갔다. 순간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언덕 밑으로 수많은 이들이 흉물스런 얼굴을 한 채 널브러져 있었고, 이슬비와 함께 씻긴 시뻘건 피는 남산뫼를 적신 채 그 아래로 졸졸 흘러내렸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 분리된 채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무리 속에 신음하는 형이 보였다. 큰 형의 무릎은 두부처럼 으깨져 있었고, 박살난 무릎 아래로 피범벅 된 다리가 힘없이 덜렁거렸다. 아버지는 짊어온 이불의 호창을 뜯고 두꺼운 솜을 댄 뒤 서둘러 진덕 씨 무릎을 감쌌다. 조금 뒤 눈을 뜬 형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깨어나지 않았다. 정 씨 부자는 주검이 된 진덕 씨를 틀어잡고 악을 쓰며 통곡했다.
"현장에 처음에만 갔어도 형은 살았을 것이다."
정 씨가 내뱉은 첫 마디다. 그만큼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말투였다. 그는 "물팍을 정통으로 맞았지만, 초기에 지혈만 했어도…"라며 거듭 애석해했다. 망연자실한 정 씨 가족은 싸늘하게 식은 형을 그 인근에 묻고 한스런 남산뫼를 빠져나왔다.
동갑내기 정일웅과 김일호의 사연
군인들이 온다기에 새벽까지 또래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든 정일웅(당시 19세) 씨도 당시 남산뫼 현장에 있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던 상황에서 주민들은 어떡해서든 가는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태극기를 만드는 것도, 빨치산에 음식을 내준 것도 선택의 여지가 없던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였다. 하지만 상당수 주민들은 좌의 편에 섰다고, 또는 우의 편에 섰다며 보복 학살을 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군경에 의한 토벌은 무차별적인 학살로 변질됐고,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관계없이 맹목적이며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15세~45세 무리에 섞여 있던 정 씨는 불현듯 드는 불안감 때문에 어떻게든 대열에서 이탈하려 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그 순간 한 군인이 정 씨를 향해 "너는 뭐야"라고 쏘아봤다. 일병 계급장을 단 사병이었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다부졌다. 정 씨는 중학교 학생증을 내보이며 겁에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서울공업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1950년 중학교의 수업연한은 6년이었다. 이후 1951년 9월1일 교육법이 개정되면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제가 변경됐다.) 5학년이던 그는 전쟁 후 작은 집인 광주로 피난 왔다가, 외가인 장성으로, 다시 큰 집인 이곳 함평 월야로 옮겨왔다.
병사는 "너 이리 와"라고 정 씨를 옆에 세운 뒤 "임마 너는 여기 있어"라고 자리에 앉혔다. 그때였다. 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다짜고짜 "너는 왜 여기 있어, 저리로 들어가"라며 대열로 밀어 넣었다. 병사는 "소대장님 제가 잘 아는 학생입니다. 제가 이 학생을 보증하겠습니다"라며 막아섰다. 두 사람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나만 따로 해치우나' 했던 마음은 '나는 괜찮구나'라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중대장의 발포 소리와 함께 중화기에서 불꽃이 일었다. 흉측한 몰골로 사람들이 쓰러졌고, 남산뫼는 절규로 가득 찼다. 한 차례 사격을 끝낸 그때 어미 등에 업혀 총탄 세례를 피한 한 아이가 울부짖었다. 주민들의 통곡 소리를 뚫고 나온 아기의 울음은 귓전을 찢듯 앙칼졌다. 중대장은 피비린내 속에서 아기를 꺼낸 뒤 정 씨에게 건넸다.
"너 임마, 이 아기 잘 키워."
뽀얀 얼굴에 방금 전 난사로 튀긴 핏자국이 선명했다. 정 씨는 아이를 받아 안고 지옥 같은 남산뫼를 뛰쳐나왔다.
아이를 둘러업고 면소재지로 향하던 중 순천마을(월야리) 살던 한 할머니가 대뜸 아기를 보더니 "아이고 내 새끼"라며 낚아챘다.
"자기 손주라는데, 따지고 말고 할 새가 없었지."
정 씨는 그렇게 아기를 넘기고 줄행랑쳤다.
마을 소개(疎開)작전을 앞두고 분위기는 무거웠다. 개인화기를 짊어진 이들의 표정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중대장 당번병인 김일호 일병은 직속상관의 지시를 받으며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남산뫼로 이동한 5중대는 직속상관의 지시를 받으며 주민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았다. 발포 허가까지 떨어져 여차하면 그 즉시 사살도 가능했다.
김 일병은 줄곧 중대장 뒤를 따랐다. 악을 쓰며 사람들을 끌어 모은 중대장은 권총으로 주민들을 마구 쏘아댔고, 감정이 격해질 때면 대검을 사용했다. 그런 중대장이 무섭기도,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제주에 살던 김일호 씨는 면사무소에서 무조건 입대하라는 통보를 받고 1950년 9월 입대했다.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서는 강제 입영되거나, '빨갱이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 씨는 제주 한림초등학교에서 신병교육을 받은 뒤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로 자대배치를 받고 권준옥 대위를 만났다. 이후 당번병이 된 그는 권 대위와 함께 호남토벌작전을 위해 광주로 이동했고, 다시 함평으로 옮겨졌다. 김 일병은 이제 갓 입대한 그야말로 '신뺑이'었다.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학생티를 벗지 못한 앳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권 대위는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산뫼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들 가운데 총살대상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15세부터 45세 미만. 왜 죽는지, 죽여야 하는지도 모른 채 지휘관의 지시에 따랐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과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양심'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다. 단지 명령에 따를 뿐이라며 위안 삼는 사이 이들의 죄책감도 무뎌졌다.
김 일병 눈에 까까머리 학생이 들어왔다. 또래처럼 보인 그는 어른들 틈에서 불안했던지 연신 눈동자를 좌우로 굴러댔다. 그 모습이 전날 동촌마을에서 학살된 이들의 표정과 교차됐다. 그 순간 '저 학생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뇌리에 꽂혔다. 어떻게든 저 무리에서 빼내야만 했다.
"양심이니 뭐니 거창한 설명은 모르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저 사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김 씨는 훗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리고 소대장에게 거짓말로 둘러댔다
.
"잘 아는 사이입니다…."
소대장은 알겠다는 듯 본체만체 지나갔다.
두 번의 인연, 그리고 20년 후 재회
월야(남산뫼)를 나와 해보면소재지에 다다른 정일웅 씨는 경찰 손에 이끌려 우익 학생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학련) 해보 지역 사무실로 갔다. 하지만 우익 이외는 모두 잠재적 빨갱이로 의심받던 시대에 이들로부터 엄청난 구타를 받는다. 심한 매질로 몸은 성한 데가 없었고,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 끔찍한 남산뫼에서도 살아난 정 씨였지만, 더 이상 버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을 살려준 은인을 다시 보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더 이상의 괴롭힘도 당하지 않게 된다.
학련에 단단히 엄포를 놓은 그는 정 씨에게 "내 이름은 김일호다. 무슨 일 있으면 중대본부로 찾아오라"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제주도 한림면 출신이란 얘기도 해줬다. 정 씨는 "그 사람이 나를 두 번 살렸다"고 했다.
정 씨는 김 씨를 찾기 위해 몇 차례 제주를 찾았다. 은혜를 갚는다기보다 '이렇게 살아서 자식 낳고 잘 살고 있다, 다 당신 덕이다, 고맙다'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그게 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 씨를 찾는 것이 쉽진 않았다. 한림면사무소까지 가서 '김일호'란 이름을 찾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훗날 한림이 한경과 한림면으로 분리되면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됐다.
정 씨는 행여 전쟁 중에 전사한 것은 아닌가 싶어 서울과 제주지역 국립묘지를 찾아 전사자 명단을 뒤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김 씨는 없었다. 그러기를 몇 년, 김 씨의 소식을 전해온 건 엉뚱하게도 고향 후배였다.
"어느 날 제주에서 살던 후배가 찾아오더니 '김일호란 사람 아느냐'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정 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연은 이랬다. 후배가 일하던 곳에서 가깝게 살던 김 씨가 우연히 후배 고향이 함평 월야인 것을 알고 "정일웅을 아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연락이 닿았고, 정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광주에 김 씨 부부를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남산뫼 학살이 있은 지 꼬박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전남 함평 ③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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