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5중대, 그리고 권준옥 대위
해보면 소재지에 중대본부를 꾸린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는 불갑산 토벌 작전을 위해 함평 지역 소개 작전을 진행했다. 명령 계통은 최덕신 준장(11사단장), 박기병 대령(20연대장), 유갑열 소령(2대대장), 권준옥 대위(5중대장)였다. 특히, 권 대위는 함평 지역 민간인 집단 총살 사건을 직접 명령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월야지서 토벌 중대장이었던 오정인 씨는 2006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에서 "권준옥 대위가 중대 작전 회의에서 대대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며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사람은 무조건 50명씩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5중대는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뒤 농기구 등을 노획 무기의 전과로 보고하기도 했다.
월야면 정산리 장교 마을 강영주(당시 27세·현재 작고) 씨가 팔에 관통상을 입은 채 불구가 됐고, 강 씨 등에 업힌 두 살배기 아들 안종필 군은 엉덩이에 네 발의 총탄을 맞고 극적으로 살아났다. 강 씨의 맏이 종탁(당시 7세) 군을 포함해 22명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장교뿐 아니라 동촌, 죽림 마을(계림리)까지 포함하면 이날 첫 학살지에서만 150여 명가량이 숨졌다. 그리고 이튿날 남산뫼 학살로 200명 이상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이밖에도 월야면 외치리에선 세대별로 줄을 세운 뒤 장남만 골라 총살시켰으며, 해보면 상곡리(모평 마을)와 쌍곡리(쌍구룡) 등지에서도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뤄졌다. 여기에 1951년 2월 20일(음력 1월15일) 불갑산 토벌을 위한 '대보름 작전'이 전개되면서 수백 명의 민간인이 빨치산으로 분류돼 한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앞선 12월 2일, 5중대는 월야면 계림리 시목 마을 앞 한새들녘에서 장성방면 길을 확보하던 중 마을 뒷산에 매복한 빨치산과 전투(한새들전투)를 벌이다 하사 김영광과 일병 김추길을 잃는다. 실제 이들의 호적 사망 기록을 보면 '서기 1950년 12월2일 오전 함평 전투 지구에서 전사'라고 표기돼 있다.
국군과 빨치산 간의 유격전은 3일과 4일에도 이뤄진다. 3일은 전사자 수습 과정에서, 4일은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를 반군이 난도질한데 대한 보복 차원에서다. 그리고 5일 해보초등학교(해보면 금덕리)에서 전사자를 화장한 권 대위는 중대원들 앞에서 "너희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한다.
붉게 달아오른 장작더미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장사(葬事)를 지내는 동안 멀리 월악산에서 게릴라전 승리를 자축이나 하는 듯 허공에 쏴대는 총성과 풍악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화장 다음 날인 6일부터 이듬해 1월 23일까지 40여 일간 5중대에 의한 본격적인 '인간 사냥'이 시작되는 것이다. 권 대위가 연대 병기장교로 방출되고, 이영오 중위가 신임 중대장으로 부임한 이후까지다. 특히, 불갑산 인근 동삼면(월야·해보·나산면)이 큰 피해를 봤다.
권 대위의 만행은 학살에만 그치지 않았다. 부녀자를 강간하고 겁탈하는 등 반윤리적 행태도 빈번하게 이뤄졌다. 군인들은 순찰 중 젊은 여자가 지나가면 가만 두지 않았고, 가정집을 급습해 부녀자를 강간하고 반항할 경우 그 즉시 사살하기도 했다. 어떤 집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그의 딸이 한꺼번에 몹쓸 짓을 당하기도 했다.
작전 중 외모가 출중한 여자를 만나면 중대본부로 끌고 와 겁탈한 것은 물론 뚜쟁이(중개인)까지 둬가면서 매일 밤 여자를 공급받았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실제 남산뫼 학살 당시 젊은 여자나 처녀들은 군인들이 욕보인다는 소문에 급히 머리를 올리거나 이웃집 아기를 안고 나간 경우도 있었다. 또한 남산뫼 현장에서 한 여성을 중대본부로 끌고 가려하자 이를 막아선 그녀의 아버지를 군인들이 총살시켰다는 증언도 있다.
학살의 주동자인 권준옥 대위는 6·25전공으로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1961년 중령으로 예편했다.
특이한 점은 예편 뒤 그가 권준옥이란 이름을 버리고 권영구로 개명한 사실이다. 양민 학살 피해자들로부터 협박과 위협을 받고 개명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하진 않다.
퇴임 후 낚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1990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산으로 산으로, 처참한 산중 생활
주민들은 군경의 무자비한 총검을 피하고자 불갑산에 모여들었다. 함평, 영광뿐 아니라 인근 장성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왔다.
불갑산은 이들에게 유일한 도피처였던 셈이다. 몇몇 생존자들은 불갑산 대보름작전이 있기 전까지 대략 6만 명 내외가 산에 모였다고 했다.
산중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고, 무엇보다 공포감에 하루하루를 떨어야만 했다. 여기에 일부 증언에 따르면 빨치산의 감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 씨는 또 "대보름작전 때 용천사를 사수하기 위한 함호대(소대 규모의 작은 부대)가 불갑산에 남아있었다"며 "다만, 이들은 민간인들 때문에 총도 제대로 못 쏘고 했지만, 군인들은 인정사정없이 포를 쏘고 난리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월야면 외치리 정길진(91세) 씨는 짐꾼으로 산에 올랐다가 빨치산에 발목이 잡혀 산중 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빨치산이 보급 투쟁한 뒤 식량을 이고 따라오라고 해 불갑산에 들어갔다가 이들에게 붙잡혀 산을 내려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함평에서 만난 정태진(74세) 씨도 "빨치산에 한번 붙들리면 나올 수 없었다. 감시가 워낙 심했다"고 비슷한 증언을 내놓았다.
정태진 씨는 "부락별로 급식을 했는데, 주먹밥 수준으로 식사를 때웠다"며 산중 생활의 어려움을 토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짚이나 가마니를 땅에 깔고, 위에는 소가죽이나 거적때기를 씌워 한 겨울을 보냈다"며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렵게 산을 빠져나온 이들도 무사하진 못했다. 군경의 보복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각 마을에는 경찰의 밀대(세작)가 주민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이들은 마을 동향을 파악한 뒤 입산자나 좌익 분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파출소에 신고했다.
불갑산을 빠져나온 정태진 씨 부친도 1951년 3월 20일(음력 2월 13일) 자수를 위해 마을을 찾았다가 밀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 씨 부자는 대보름작전이 있기 직전 산을 내려와 영광에서 숨어 지냈다. 이후 자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다행히 정 씨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전남 함평 ⑤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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