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핏빛으로 물든 수양산 자락의 늦가을 들녘
널브러진 팔은 감각이 없었다. 솟구치는 선홍의 핏줄기 속에 드러난 하얀 뼈마디가 아슬아슬 손목을 지탱하고 있었다. 늦가을 추위는 만신창이 된 그의 살점을 차갑게 파고들었고, 뜨거운 눈물은 목을 타고 한없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죽는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물밀듯 몰려왔지만, 공포감에 휩싸인 그는 소리 내 흐느끼지도 못한 채 고통을 삼켰다.
통증은 점차 사라지고 정신은 시나브로 희미해져갔다. 주민 수십 명과 함께 총살당한 핏빛 가득한 월곡 마을 뒷산 구릉은 이내 가을볕 따스한 들녘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선 그는 늦가을 햇살을 등에 댄 채 한가로이 보리밭을 갈고 있었다.
1950년 11월 10일 이른 새벽부터 일어난 류동호(당시 17세) 씨.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의 시작이었다. 황금빛 보리를 수확하는 상상을 하며 간간히 흥얼거리기도 했다. '가을 안개는 풍년을 부른다'고 했던가. 때마침 이무기 같은 하얀 안개가 마을 건너편 수양산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전날 빨치산들이 식량을 약탈해간 탓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는 점심을 대충 때우고, 냉수로 곯은 배를 채운 뒤 다시 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오후 4시경, 늦가을 찬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인민군가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닥칠 공포를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이것이 학살의 전주곡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류 씨를 비롯한 하갈마을 주민들은 빨치산 이동로인 이곳에 살면서 인민군을 자주 봤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인공기를 들고 인민군 복장을 한 괴한들은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들을 끌어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보리밭을 갈던 류 씨도 어느새 그 무리에 섞여있었다. 이들은 마을 주민을 구타하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강요했다. 전날 마을에 머물렀던 빨치산 부대로 착각한 주민들은 이에 동조했고,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둘씩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그렇게 이들은 '용공분자'로 분류됐다.
軍, 인민군으로 위장…'빨갱이 부역자' 강요
모든 것이 '함정'인 것을 아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민군 복장을 한 10여 명의 무리 뒤로 일개 중대(100~120여 명) 규모의 군인들이 후방을 지원하며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들은 수양산을 넘어온 국군 제11사단 20연대 3대대 12중대 군인들이었다. 동향 파악을 위해 인민군으로 위장한 선발대가 먼저 마을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빨갱이 부역자'를 가려낸다는 명분 하에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했고, 강요에 의한 '동조'를 얻어냈다.
하지만 일부 군인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보여주며 자신이 국군임을 알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맹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사람들만 보면 무조건 총살시켰지만, 일부 양심 있는 군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괴뢰군 복장을 한 사람 중 일부는 뒷주머니에 태극기를 꼽아놓고 일부러 이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박종섭 씨는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증언을 통해 "군인들이 갈전리와 월곡에서 인민군복을 갈아입고 주민들을 속였는데, 몇몇 군인들은 몰래 태극기를 보여줬다"고 증언한 바 있다.
태극기를 본 주민들은 구타를 당하는 속에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이들은 결국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을 연령별로 분류했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류 씨는 조심스레 학생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런데 한 군인이 그의 큰 키를 보며 "이 새끼는 왜 여기 있어, 저쪽으로 안가"라며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어른들 틈으로 내보냈다. 친구들과 분리된 그 순간, 류 씨는 직감적으로 '죽음'을 예감했다.
그는 40여 명의 어른들 틈에 섞여 하갈 마을과 맞닿아 있는 월곡 마을 뒷산으로 끌려갔다. 새끼줄로 포박된 이들은 머리를 숙인 채 앞 사람 뒤꿈치를 바라보며 한발 한발 걸음을 내딛었다. 행여 머리를 들었다간 거침없이 개머리판이 들어왔다.
총살장으로 끌려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몇몇 노인들은 마을 앞에서 발만 동동거린 채 오열했다. 산 중턱에 오른 군인들은 이 모습을 보며 하갈 마을 쪽으로 총격을 가했다. 그 와중에 박영자(당시 15세) 씨의 어머니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박 씨의 오빠 박남종(당시 31세) 씨는 이날 총살장에서 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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