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힌 연보리
날은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갑오년(2014)의 끝자락, 전남 영암으로 가는 길은 칼바람 부는 매서운 날씨만큼이나 취재진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미리 알고 찾은 것은 아니었으나, 공교롭게도 본지가 냉천마을(금정면 연보리)을 방문한 지난해 12월31일(음력 11월10일)은 64년 전 '피의 학살'이 있던 날이었다. 주민들은 전날 밤 한(恨) 많은 넋을 위로하며 집집마다 제사를 모셨다. 1950년 겨울,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곳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남 영암군 금정면 연보리. 연산, 다보, 냉천부락이 모여 있는 첩첩산중의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파르티잔·partisan)의 근거지였다. 금정면 청룡리(내산)와 장흥군 유치면을 끼고 있는 국사봉(해발614m) 정상부에는 인민유격대 전남 제3지구인 유치지구사령부(사령관 황점택)가 주둔해 밤이면 인근 마을로 내려와 활동하곤 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지면서 북으로 가는 인민군(조선인민해방군)의 퇴로는 차단됐고,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한 빨치산들은 남한 곳곳에서 군경과 대치하며 유격전을 벌였다.
금정면이 큰 피해를 본 것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나주, 화순, 장흥, 강진, 보성, 영암 등 6개 시·군과 인접해 있고, 곳곳이 접산(겹쳐있는 산)으로 연결돼 있어 도망이 용이했다. 여기에 해남·강진·영암 등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이 영암 여운재를 넘어 벽지인 금정에 모이면서 앞으로 닥칠 '피의 학살'을 예고했다. 이들은 국사봉에 은거한 뒤 화순과 능주를 거쳐 지리산으로 갔다.
당시 경찰들도 함부로 금정면(연보리)에 들어올 수 없었다. 혹여 들어오더라도 저녁 무렵이면 모두 영암으로 빠져나갔을 만큼 빨치산의 활동이 잦았다. 전쟁 초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한 군경이 영암을 다시 찾은 것은 한국전쟁 발발 4개월여 만인 1950년 10월이다. 그리고 금정을 수복한 것은 이듬해 4월이었다. 6개월간 치안 공백상태가 유지된 것이다.
냉천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빨치산이 당시 이곳에서 정치를 하며 마을을 통제했다"고 말했다. 이어 "협조자는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였다"며 "총칼로 위협하며 식량을 달라는데, 어떻게 안 줄 수 있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빨치산의 동조자가 아님을 항변한 것이다.
주민들은 선택권이 없었다. 이념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이를 알지도 못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경찰이든 인민군이든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낮에는 경찰이 들어와 빨치산에 동조했다며 머리에 총구를 겨눴고,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와 공포감을 심어줬다. 이런 가운데 목포 주둔 해병부대가 경찰 지원으로 금정면 빨치산 토벌작전에 나서면서 냉천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냉천 사람 모두가 '빨갱이 부역자'로 몰려 대규모 학살을 당한 것이다.
피의 학살, 통곡의 눈물 쏟아내다…"'인민공화국 만세' 강요 뒤 총살"
피울음의 역사는 박격포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1950년 12월18일(음력 11월10일) 오전. 금정면의 경계인 영암 여운재를 넘어온 해병대가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냉천마을에 박격포 두 방을 떨어뜨렸다. 동네는 순간 아수라장이 됐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격포 소리를 시작으로 들이닥친 토벌대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구를 겨눴고,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에 앞서 토벌대 척후병 3명이 여운재를 넘어오다 빨치산 보초병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해병 전우 두 명과 이들을 안내한 조경석(당시 38세·금정면사무소 근무) 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자 뒤따르던 해병대는 광분했고, 마을주민 모두를 빨갱이 부역자로 몰아세워 보이는 즉시 사살했다.
토벌대는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가옥에 불을 지르고, 집안에 남아 있던 주민을 동네 어귀로 끌어 모았다. 신발을 신으려하자 "곧 뒈질 놈이 뭔 신발이냐"며 목덜미를 끌어내리기도 했다. 이어 군인들은 겁에 질린 주민을 향해 거침없이 기관총을 조준했고, '드르륵' 소리와 함께 이내 수백발의 탄피가 쏟아졌다.
공포감에 휩싸인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자리에서 스러졌다.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은 마을 어귀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이 빨갱이를 키워 우리 동료가 죽었다"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게 한 뒤 모두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죽이지 않은 어린애가 구덩이에 버려진 엄마 젖을 물고 밤새 울다 죽어간 사연은 그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마을 위쪽에 거주하던 일부 주민들은 도망가거나 군인들에 의해 발각되면서 산으로 함께 올랐지만, 이들 역시 마을 아랫사람들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에 오른 주민들을 향해 "너희 년들은 누가 데려왔냐"는 한 상급자의 말이 떨어졌고, 이내 총격이 가해졌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던 이들도 군인의 총탄을 피할 순 없었다. 어떤 이는 등에, 또 다른 이는 뒤통수에 총상을 입고 그대로 마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날 군인의 학살과 방화로 마을주민 200여 명 가운데 2~30여명 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고, 전체 38호였던 가옥은 단 몇 채를 제외하고 모두 불태워 없어졌다. 그야말로 마을 하나가 삽시간에 멸족된 것이다.
냉천에서 이처럼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여운재 아래 영암 영보마을(덕진면)과 도포, 시종면 등지에서 피난 온 외지인들이 함께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검의 정확한 신원 확인은 물론 피해자 집계도 이뤄지지 못했다. 상당수 주민들은 지금도 "200명 이상은 족히 죽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남은 유일한 생존자…누나 품속에 묻힌 채 기적적으로 살다
취재진은 지난해 12월31일 냉천마을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백행기(남·84세) 씨와 김한기(남·73세) 씨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19살이었던 백 씨는 현재 중풍으로 쓰러져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8살 꼬마였던 김 씨는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돼 있었다.
온전치 못한 정신이지만 백 씨는 비교적 또렷이 그날을 회고했다. 그는 군인이 진격하기 전 가까스로 동네를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한 인물이다. 백 씨의 어머니는 기분이 이상했던지 이른 새벽부터 백 씨와 동생들을 깨웠다.
그리고는 금정면 남송리에 위치한 외갓집에 가 있으라며 백 씨를 다그쳤다. 그는 네 명의 동생 가운데 둘만 데리고 나왔다. 어머니와 두 동생은 그날 군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백 씨는 "뒷산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총소리와 함께 동네에서 연기가 피어났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어 "겁이 나서 동생들 손을 꼭 부여잡고 산을 넘었다"고 말했다.
상황이 정리된 뒤 마을을 다시 찾은 백 씨는 "숨이 막혀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곳곳에 시체가 널 부러져 있었다. 화마 속에 일가족 모두가 타 죽은 경우도 있었고, 아궁이에 들어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어린 아이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생존자 김 씨의 사연 역시 기막히다. 어머니와 큰누나(당시 15세), 작은누나(당시 13세)와 함께 동네 어귀로 끌려와 집단 학살을 당했지만, 그는 천우신조로 목숨을 부지했다. 기관총 소리와 함께 일제히 사람들이 고꾸라졌고, 큰누나는 8살 난 동생을 재빨리 품에 안은 채 땅바닥에 엎드렸다. 누나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 피투성이가 됐지만, 김 씨는 온전했다. 그는 "누나 품속에서 살아남았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냉천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어제가 제사였다"며 "이맘때가 되면 온 집이 명절마냥 떡을 했다"고 동네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는 시제(時祭)를 통해 합동제를 지내거나, 일부 집안에서만 따로 제를 모시고 있었다.
'전남 영암' 2편이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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