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 내 변절자, 그리고 탈출 사건
하루는 미군이 먹던 통조림을 포로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그런 날은 필시 상부의 검열이 있거나, 기념일 또는 광주 지역 유지들이 수용소를 찾은 날이다. 하지만 방문객이 가고나면 통조림은 모두 회수됐다.
천막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잠자리가 들어서 있고, 막사 한가운데에는 흙을 고른 뒤 난로가 설치됐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검열이나 견학을 위한 것으로 불 한번 피우지 않는 보여주기 식이었다.
포로수용소는 군대식 편제였다. 연대 규모였던 남광주 수용소는 1수용소와 2수용소로 나뉘었고, 그 사이 언덕배기에 환자를 위한 병사가 놓여있었다. 병사에 오르면 깃대봉(무등산 자락) 품에 안긴 조선대 본관(일부 구간 공사 중)이 눈에 들어왔다. 또 수용소 인근에는 전남대 의대 부속 간호고등기술학교(현 간호학과) 기숙사가 있어 몇몇 간호사들이 수용소 내를 오갔다.
천막 하나(40여 명 수감)가 중대가 되고, 천막 세 개가 모여 대대를 이뤘다. 그렇게 4000~5000여 명의 포로들이 이곳 수용소에서 생활했다. 내부 통솔은 빨치산 포로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이뤄졌고,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을 각각 세워놓고 감찰을 시켰다. 물론, 헌병이 심어놓은 변절자가 그 중심이 됐다. 이외에도 각 막사에는 헌병이 박아놓은 프락치가 한두 명 이상 숨어있어 무슨 얘기를 해도 헌병 귀에 모두 다 들어갔다.
1952년 7~8월경의 일이었다. 반공 영화를 시청하던 중 몇몇(2~3명으로 추정) 포로가 수용소를 탈출한 사건이 발생한다. 수용소에서는 빨치산 포로들의 전향을 위해 반공영화를 보거나 반공교육이 수시로 이뤄지곤 했다. 그런데 영화 시청 중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철사 줄로 엮어놓은 하수구의 개구멍을 끊고 수용소를 탈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수용소는 적잖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포로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이날 일은 철저히 함구령이 내려졌고, 보안은 철통같이 지켜졌다. '남광주 수용소 탈출 사건'은 그렇게 비밀리에 부쳐졌고, 누가, 몇 명이 탈출 했는지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뒤 임방규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탈출 사건 이후 수용소에 붙잡힌 포로들로부터 전남도당 노령지구 당위원장 소식을 들은 것이다. 바로 전주 사단본부 임시 수용소에서 함께 있었던 그 사람이다. 인물이 훤칠하고 키가 컸으며, 어린 빨치산 동무를 위해 스스로 매질을 감수했던 동무다. 노령 지구 소속 빨치산 포로들은 광주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다시 입산한 그에 대해 얘기했다.
수용소는 감찰, 서무, 의무과 등으로 나뉘었고, 모두가 포로로 구성돼 있었다. 학교 교육을 받은 이는 서무를 맡고, 야전병원이나 트에서 환자를 치료했던 이들이 의무과에 배치됐다. 다만, 감찰과는 철저하게 빨치산 변절자들로 채워졌다.
감찰 본부에는 특무대 조사를 근거로 빨치산 포로들의 직책만 따로 적힌 명단이 비치됐다. 조사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빈 천막 하나는 취조를 위해 사용됐고, 막사 구석에는 몇 개의 몽둥이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 오랏줄이 걸려 있어 들어서면 덜컥 겁부터 났다.
특무대에서 조사를 마친 빨치산 포로들은 감찰과에 의해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조사를 받은 뒤 헌병에 보고서가 넘겨진다. 또한 헌병 조사에서 혹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감찰 소속 변절자들을 대면시켜 이를 확인했다.
팔에 부상을 입고 환자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이후 줄곧 의무과 대원으로 있었다고 진술한 임방규도 407연대(기포병단) 대열참모였던 박창수가 '직책 명단'을 확인한 뒤 "왜 원무과 대원으로 있었느냐, 우리 병단 소속 정치부중대장이지 않았느냐"고 폭로해 결국 사형 판결까지 받았다.
광주교도소 수감 생활과 배고픔의 고통
임실 성수산에서 붙잡힌 뒤 광주 포로수용소로 옮겨온 임방규는 그해(1952년) 9월13일 전라남도 경찰국 옆 무덕정(임시 재판장)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이날 늦게 광주교도소(광주 동구 동명동 위치. 이후 북구 문흥동을 거쳐 현재는 북구 삼각동으로 이전함)로 이감됐다.
수번은 2175번. 간수부장 지휘아래 첫날 '입소식'이 시작됐고,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몽둥이로 내려치는 소리와 수용자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였고, 어떤 이는 너무 맞아 생똥을 싸기도 했다. 앞서 입소한 이명기 동무(경상남도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는 입소식 첫날 이뤄진 구타로 들것에 실려나간 뒤 병사에서 숨을 거뒀다.
자물쇠를 따고 기다란 복도에 들어서자 수많은 눈과 부딪혔다. 아는 얼굴과는 눈인사로 반가움을 대신했다. 사형수가 모여 있는 감방은 1방과 2방으로 나뉘었고, 비교적 큰 1방에는 170여 명의 사형수가 수감됐다. 반면 감방 내 뼁끼통(변소)이 마련된 2방은 1방보다 작아 80여 명이 생활했다. 1방과 2방에는 사형수 외에도 각 방에 30여 명의 군피(군법에서 실형을 받고 수감된 군경 피고인)가 함께 있었다. 군피는 감방 내 폭동이나 사고에 대비한 것으로 이들 가운데 감방장을 세웠다.
감방장은 마음대로 구타가 가능했고, 개인의 차입품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세했다. 사형수에게는 식수도 제대로 주지 않았지만, 군피에게는 세수는 물론 마실 물도 풍족하게 제공됐다.
배식은 간수와 그의 수발을 드는 소지(또는 소제), 그리고 감방장이 차례로 밥을 퍼간 뒤 포로들에게 마지막 순수가 돌아왔다. 목기에 담긴 밥을 수명의 포로들이 나눠먹었고, 한 덩이를 겨울 채울 정도의 적은 양이 배식됐다. 어떤 이는 헝겊에, 또 다른 이는 손바닥에 음식을 담아갔고, 밥을 다 먹은 뒤에는 진득거리는 풀기를 말아내 손을 말끔히 씻어냈다. 그러면 비누로 씻는 것보다 깨끗했다. 물이 부족한 이들이 얻은 일종의 지혜였다.
사형수들은 만성적 굶주림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쥐까지 잡아먹는 비정상적 식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배식할 때면 옹이가 빠진 마룻바닥의 구멍으로 쥐들이 머리를 내밀곤 한다. 굳이 배식 시간이 아니어도 구멍 입구에 음식물을 놓아두면 그 냄새를 맡고 몇 마리의 쥐가 수염을 실룩거리며 모여들었다. 그러면 뭉툭한 못을 세면 바닥에 정성스레 갈아 만든 작살로 쥐를 잡았다.
쥐는 잡는 즉시 가죽을 벗겨 쇠약한 동무들에게 먼저 나눠졌다. 가죽과 창자는 버렸고, 쓸개나 간, 눈 등은 그냥 목으로 넘겼다. 살과 뼈는 오도독 씹어 삼켰다.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이들도 쥐를 먹은 뒤에는 식욕을 되찾곤 했다. 이 때문에 간혹 손사래를 치며 못 먹겠다고 버티던 이들도 약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받아먹었다.
오랫동안 굶주리다보면 나중에는 힘이 없어 밥알조차 제대로 씹어 삼키질 못한다. 그럴 때면 천이나 양말 등으로 밥을 감싸 으깬 뒤 물이나 국과 함께 섞어 먹였다. 의식만 겨우 붙은 채 본능적으로 입을 오물거려보지만, 목 넘김이 시원찮아 흘리는 것이 더 많고, 그러면 다시 한 번 한 술 한 술 밀어 넣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없듯 이들은 곧 있을 총살 집행을 기다리면서도 이처럼 모진 생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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