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애환이 묻어있는 '한정당'
김창근이 좌익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종형님의 영향이 컸다. 그의 사촌형인 김택근(전쟁 전 사망)은 왜정 때부터 공산당 조직원이었고, 김영근(당시 22세)은 전쟁 전부터 좌익 활동을 했다. 김영근은 전쟁 중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뒤 본인의 뜻에 따라 북송된 이후 소식이 끊겼다.
방호산 부대(인민군 6사단)가 순창에 내려오던 시기인 1950년 7월, 의용군에 참여한 김창근이 곧바로 지도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촌형 친구들이 지방좌익 간부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입산 후 그는 정치부소대장(또는 문화부소대장)을 맡기도 했다.
'의용군 지도원'의 일과는 단순하다. '한정당(閒静堂)'이란 고택에 머물던 4~50여명의 지도원들은 순창 곳곳에 흩어져있던 훈련소를 감찰했다. 일개 훈련소에는 보통 100여 명의 의용군이 훈련을 받았다. 4개 면을 담당한 김창근이 4~500여 명의 병력을 관리·감독한 셈이다. 그는 매일 2곳의 훈련소를 점검해 평가서를 작성한 뒤 감찰보고서를 도당에 제출했다.
한국전쟁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있는 한정당은 당시의 아픔을 말해주듯 7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대청 한 구석의 온기가 어제 일처럼 가까이 느껴진다. 그런 부침 때문일까. 역설적이게도 '한가하고 조용한 집'이란 뜻의 한정당이란 이름까지 붙었다.
현재 문옥례 씨(87세)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그의 시큰아버지가 지은 집으로 시댁은 삼천석의 농사를 지을 만큼 지역 내 유지였다. 특히, 천명 분량의 쌀을 저장할 만큼 쌀독 또한 컸다고 하니 그 크기와 위세가 짐작된다. 포로수용소에서 이뤄진 극심한 구타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김창근도 한정당의 큰 쌀독만은 여전히 기억했다.
한정당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부침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게 빼앗긴 뒤 일제 말 다시 찾았지만 이도 잠시, 한국전쟁 발발 뒤 이곳은 지방좌익의 본거지가 됐다. 그것이 바로 김창근이 생활한 훈련소 지도원의 사무실 겸 숙소다.
문 씨의 시매부(시누이의 남편)가 경찰인 탓에 가장 먼저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던 시댁 식구들은 문 씨의 친정집이 있는 인계면 장덕리(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는 순창읍에 속함)에 숨어 지냈다. 이후 좌익들이 입산한 뒤 한정당은 본 주인을 다시 맞게 된다. 그것이 1950년 겨울의 일이다.
65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문 씨는 "밥 해주면 그것 먹으면서 동무, 동무 그랬는데…. 다들 죽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빨치산에 대한 연민도, 동정도 아니었다.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함께 관통해온 이에 대한 동질감 같은 것이었다.
남부군이 된 김창근, 그리고 빨치산의 겨울
1950년 말 순창지역 상공을 떠돌던 전투기는 지나는 사람에게 폭격을 가하곤 했다. 물론 좌우 식별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뤄진 무차별적인 학살이었다. 문옥례 씨 조부 역시 순창 읍내를 걸어오다 폭격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해 11월, 미군 부대까지 동원되는 등 군경 합동작전이 거세지면서 전북 야영훈련소도 일개 대대를 꾸려 입산한다. 회문산에 본거지를 둔 김창근 일당은 다음 해인 1951년 초 병력이 나뉘면서 일부가 덕유산으로 파송된다. 그 안에 김창근도 포함됐다.
전북도당 역시 그해 3월 회문산을 포기하고 지리산(뱀사골)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군경의 막강한 화력에 후퇴도 쉽지 않았다. 아침부터 수백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능선마다 가해진 융단폭격에 쌍치는 완전히 불태워졌다. 뒤이어 군경의 전방위적 공세가 이어졌다. 기포병단과 왜가리병단이 마지막까지 회문산에 남아 본진(本陣)을 사수했다.
산중생활은 처참했다. 식량이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마는 식이다. 보급투쟁이 제대로 안될 때는 몇 날 며칠을 굶기도 했다. 그러던 1951년 8월('송치골 회의' 후) 김창근 소속 부대에 변화가 생긴다. 바로 부대 재편으로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남부군단)에 편입된 것이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뒤 후퇴하던 이현상은 그해 11월 북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 통칭 조선인민유격대를 지휘할 수 있는 통일적 권한을 부여받고 남하한다. 이후 속리산과 덕유산을 거쳐 이듬해 8월 지리산에 당도했다.
남부군으로도 잘 알려진 '이현상 부대'는 앞서 5월 남하 도중 충북 청주시를 공격해 좌익 죄수들을 탈옥시키는 등 일시적으로나마 도청 소재지를 점거하며 세를 떨쳤다. 또 소백산맥을 따라 이동하던 중 지방좌익들의 합류로 유격대의 규모가 커졌고, 이후 승리사단, 인민여단, 혁명지대 등의 사단을 구성하기도 했다.
덕유산에서 마주한 남부군의 모습은 여느 빨치산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작전에 투입된 이들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국군 제14연대(여순사건 반란군) 출신과 인민군 낙오병으로 구성된 남부군은 전투경험이 풍부했다. 여기에 작전이 이뤄질 때면 중일전쟁에 참여한 팔로군 출신들이 선두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김창근은 남부군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왜정 때 항일운동 했던 팔로군 출신 병사들이 각 전투부대에 하나씩 끼어있었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앞에 섰다. 정말 강성이었고, 마치 호랑이 같이 싸웠다. 면(面)을 지나가면 지서는 박살났고, 완전히 초토화될 정도로 전투력도 뛰어났다. 그 사람들 싸우는 것 보면 우리도 무섭고 겁났다."
남부군은 도당에 속하지 않은 독립부대다. 이 때문에 이동이 자유로웠다. 김창근도 1951년 8월 남부군에 편입돼 지리산에 입산한 뒤 경남 하동군 화개면까지 내려가 지서 습격작전을 폈다. 하지만 그해 말 지리산을 에워싼 군경 합동작전으로 남부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김창근은 덕유산으로 후퇴한다.
두터운 여름옷을 벗은 지리산 일대는 이내 앙상한 몸을 드러낸 채 겨울을 맞는다. 빨치산의 겨울은 참기 어려울 만큼 혹독하다. 먹을 것은 부족했고, 얇은 옷을 입은 채 북풍한설을 맞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 얼어 죽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김창근은 모포 한 장으로 그해 겨울을 버텼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는 이가 태반이다. 맨발로 눈길을 헤매는가하면, 차가운 바위 비트(비밀아지트의 빨치산 용어)에서 서로의 온기만으로 며칠 밤을 지내는 것도 예삿일이다. 눈 덮인 응달이나 삭풍이 몰아치는 능선을 타고 이동하는 것 역시 일상이었고, 행여 군경토벌대와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개울을 건너 크게 돌아가야만 했다. 그럴 때면 꽁꽁 언 다리의 살점이 찢기듯 고통스러웠다.
지리산을 어렵게 빠져나온 김창근은 루트를 따라 덕유산으로 갔다. 토벌대를 피해 미끄러운 비탈길을 뒤뚱거리다보니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평소보다 체력 소모는 몇 배나 컸다. 하지만 숨 돌릴 틈 없이 곧장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주위가 조용했다. 그제야 혼자임이 느껴졌다. 빨치산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추위나 배고픔보다 '낙오'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 보면 사상적 무장도 해제된다. 문득 드는 무서운 생각과 허무함, 그리고 군경의 포위망이 좁혀오는데 대한 극한의 공포와 압박감에 자결을 택하는 이도 적지 않다.
숨기 좋은 장소를 골라 쭈그린 채 모포를 뒤집어썼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먹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거센 눈발이 몰아치다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흩날리는 눈발이 되어 회색 짐을 내려놓고 싶다가도, 이곳 어딘가에 묻혔을 지도원 동지들을 떠올리며 실낱같은 혼을 붙잡았다.
동상에 걸려 까맣게 괴사한 발가락(훗날 포로수용소에서 새끼발가락 절단)을 살피다 몸을 뒤척이던 그 때, 멀리서 토벌대 소리가 들려왔다. 빨라진 심박에 피가 역류하면서 순식간에 몸이 달아올랐다. 3일 만에 느껴본 훈기였다.
수색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긴장된 순간, 갑자기 총구를 들이댄 군인들이 "이런 빨갱이 새끼"라며 모포를 확 걷어챘다. 김창근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떨고 있었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는 기억이 없다. 회문산 입산 일 년만인 1951년 11월, 김창근은 그렇게 포로가 됐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