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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땜시 우리를 죽인다요!"…애엄마가 살렸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화순 ④

전남 동남부권 도피처, '화학산 빨치산' 소탕

호남 지역 공비 토벌에 나선 국군 제11사단은 백아산 고립 작전과 함께 화학산 빨치산 부대 소탕 작전도 함께 진행했다. 화순 도암면에 위치한 화학산은 전남 동남부 지역과 연결돼 있어 이 지역 빨치산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게릴라전에 대한 작전을 모의했던 주요 근거지다.


화학산에 은거한 반군들은 백아산 기슭의 전남도당 본부와 빨치산 전남총사령부의 지령을 받아 군경과의 항전을 거듭했다. 마지막까지 거세게 저항한 장흥군 유치지구대도 이곳 화학산에서 군경토벌대에 맞서 혈전을 치렀다. 이 같은 항거로 도암면은 1951년 3월까지 수복되지 못한 채 반군의 체제 하에 있었다.

ⓒ커버리지(정찬대)

화학산 토벌 작전은 11사단 예하부대인 국군 제20연대와 9연대가 맡았다. 20연대 1대대와 3대대는 도암면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9연대 2대대는 이양면과 청풍면에서 합동 작전을 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대거 죽임을 당했다. 여기에 국군을 따라온 우익 청년들에 의한 구타와 학살 역시 빈번하게 이뤄지면서 주민들의 피해를 키웠다.

1951년 3월, 화학산 기슭에 위치한 복구래 마을(도암면 운월리)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인근 마을로 모두 피신해 있었다. 형학남(당시 31세) 씨도 친척이 살고 있는 도암면 원천리 동두산 마을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작전 중이던 20연대(연대장 박원근) 3대대(대대장 최형록) 군인들에 의해 형 씨는 이곳 젊은이들과 함께 '빨갱이 부역자'로 분류됐다. 젊기 때문에 반군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들의 죄목이었다.


그리고 논바닥에 쭈그린 이들을 향해 심한 매질이 이어졌다. 군인 뒤를 따르던 또 다른 민간인(우익 청년)들은 도리깨(곡식을 두들겨 알갱이를 털어내는데 쓰는 연장)를 든 채 마구잡이로 이들을 폭행했다. 그 와중에 형 씨는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시뻘건 피가 턱을 타고 바닥에 줄줄 흘러내렸지만, 흥분한 우익 청년들의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형 씨를 비롯한 대여섯 명의 청년들은 포승줄로 묶인 채 이동했고, 그 안에는 전쟁 전 경찰기동대에서 근무한 하동완(도암면 원천리) 씨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도암면 벽동 마을(벽지리)과 정천 마을(정천리) 사이 강산재를 지날 무렵 하 씨는 국군 중위가 된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은 가까스로 풀려났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가는 숨만 내쉬던 형 씨를 본 군인들은 "너무 맞아 풀어줘도 혼자 갈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며칠 못가 죽을 것, 그냥 총살시키는 게 낫겠다"고 말한 뒤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겨우 붙어있던 숨은 그제야 멈췄다.

▲ 해망산을 넘어온 군인들은 사진 좌측 논에 양민들을 줄 세운 뒤 기관총으로(사진 우측 전봇대가 있는 곳에 거치) 집단 사살했다. 도장 마을에서 만난 김범순 씨가 주민들이 학살되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암울한 현대사의 비극, 좌-우에 선 형제

1951년 3월17일(음력 2월10일), 도암면 수색 작전에 나선 국군 제20연대 3대대는 해망산(해발 359미터)을 넘어 도암면 도장 마을(도장리)에 도착했다. 산을 넘기 전 도곡면을 지나오면서 이미 수십 명의 민간인들 심장에 총구를 겨눈 만큼 이들의 토벌작전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른 새벽, 마을 한가운데 포탄을 떨어뜨린 3대대는 아비규환 속에 사람들을 마을 어귀로 끌어냈다. 김민동(당시 44세) 씨와 김연순(당시 34세) 씨는 군인들 지시에 늑장을 부렸다며 그 즉시 사살됐다.


도곡에서 작전 중이던 3대대는 전날 빨치산 간부들이 이곳 도장 마을에 모여 회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둘러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군 동향을 사전에 파악한 빨치산들은 마을을 떠나 이미 화학산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군인들은 마을 위쪽 해망산 기슭 도포배미 언덕으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말없이 군인 지시에 따른 주민들은 아직 어둑한 상황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울먹인 어린아이, 아기를 업은 새댁, 핫바지 차림의 문 씨, 다리가 불편한 김 노인까지, 표정 곳곳에는 공포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군 간부 중 한 명이 도포배미에 오른 주민을 향해 소리쳤다.

"군이나 경찰 가족이 있는 사람은 이쪽으로 서라."

이내 주민들은 갈리기 시작했다. 당시 13살이던 김범순 씨도 서둘러 자리를 이동했다. 경찰이던 그의 큰형님(김학순·25세)은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진압 도중 14연대 반란군에 의해 순직했다.

▲ 도포배미 현장에서 국군의 만행을 목격한 김범순 씨는 취재진을 향해 "전쟁은 정말 없어야 한다"며 치를 떨었다. ⓒ커버리지(정찬대)

지난 1월26일 도포배미 언덕 한 부분에 선 김 씨는 취재진을 향해 "이 자리야, 이 자리"라며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그는 "중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경찰이나 군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 모이라고 따로 불러냈어, 그래서 우린 살았지"라며 다소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취재진은 김 씨로부터 얄궂은 사연 하나를 듣게 됐다. 바로 자신의 둘째형 김보순 씨 얘기였다. 그는 큰형과 달리 전쟁 도중 좌의 편에 섰다. 1950년 인민군 점령 시기 의용군으로 징집된 둘째형(당시 22세)은 빨치산으로 활동 중 평양까지 올라가 국군과 치열하게 맞섰다. 이후 포로로 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석방조치에 따라 마산으로 후송된 뒤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왔다. 피를 나눈 두 형제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각각 상대 진영에 총구를 겨눠야만 했다. 좌와 우로 나뉜 암울한 현대사가 가져온 또 다른 비극이었다.

"뭣 땜시 죽인다요"…도장 마을 나순례 씨의 용기

군인들은 100여 명 이상 모인 도포배미 앞 논에서 군경 가족을 제외한 아이들과 노인, 여성 그리고 청장년 남성을 따로 분류해 줄을 세웠다. 그 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민들도 금세 직감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논 바로 위 언덕에 기관총을 거치한 군인들은 남성 쪽을 바라보며 총구를 낮춘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노란 불꽃을 뿜은 화기는 주민들을 거침없이 집어삼켰고, 사지를 뚫고 나온 총탄과 핏빛으로 논바닥은 붉게 뜯겼다.

▲ 도로(당시에는 좁은 논길이었음) 아래 논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군인들은 왼쪽 하우스 앞 언덕에 기관총을 거치한 뒤 그대로 난사했다. ⓒ커버리지(정찬대)

20여 명의 남성은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쓰러졌고, 그 옆에 비켜있던 여성들의 통곡 소리에 도포배미는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 편에 있던 군경 가족들도 일제히 얼굴을 돌리며 끔찍한 현장에서 눈을 피했다. 모든 게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범순 씨는 "거총시켜서 그대로 난사했다. 정말 비참하게 죽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좌익에 활동한 사람들은 다 나오라고 했는데, 없으니깐 아무도 안 나갔고, 그래서 다 죽인 것"이라며 분노했다. 그러면서 "전쟁은 정말 없어야 한다"며 치를 떨었다.


도장 마을에서 만난 김잠귀(70세) 씨 부친도 이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총격이 가해지기 직전 재빨리 여자들 쪽으로 몸을 숨겨 총탄을 피할 수 있었다. 김 씨는 "체격이 크지 않았던 아버지께선 얼른 줄을 바꿔 살아남았다. 여자 쪽은 아마도 살 것 같다는 판단을 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청장년층을 사살한 기관총의 총구는 어느새 여성 쪽을 향했다. 그때였다. 3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은 나순례(당시 29세) 씨가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총부리를 틀어잡았다. 방금 전 난사로 총열은 뜨거웠지만, 나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군인들을 보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뭣 땜시 우리를 죽인다요.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제발 살려주시오."

공포감에 떤 채 아무 말 없던 몇몇 주민과 아이들이 하나둘 흐느끼기 시작했다. 냉혈한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그 모습에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의 학살은 멈췄고, 군인들은 널브러진 싸늘한 시체를 방치한 채 급히 철수했다. 하지만 10살 어린아이를 포함해 마을 주민 20여 명이 목숨을 잃은 후였다.


주민들은 군인 지시에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거적으로 대충 덮어두고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이후 마을을 다시 찾은 주민들은 시신을 대발쌈(대나무로 이엄을 엮은 관)에 넣어 땅에 묻고 통곡의 장례를 치렀다.

▲ 세 살 아기를 업고 있던 한 새댁의 용기로 도장 마을은 100여 명 이상의 양민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당시 등에 업혀 있던 형시문씨가 어머니 생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취재진은 당시 나 씨 등에 업혀있던 아이를 만났다. 3살 어린아이는 어느새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도장마을에 여전히 터를 이루고 있는 형시문(67세) 씨는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아마도 어린 나를 업고 있어 그런 용기가 나왔던 게 아닌가 싶다"며 "자식을 둔 어머니니까 가능했다"고 말했다.


나 씨는 이미 10여 년 전 고인이 됐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날의 얘기를 꺼내는 것을 꺼려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대단한 용기를 보인 나순례 씨에게도 당시의 기억은 치 떨리는 공포였고, 가슴 메이는 상처였다. 형 씨는 "어머니로부터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 그때 일을 물어보면 화를 내시곤 했다"고 털어놨다. 나 씨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이날의 학살은 멈췄고, 100여 명 이상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현재 도장 마을 주민들은 학살이 있던 음력 2월10일 합동위령제를 모시고 있다. 또 나순례 씨 공적비 건립도 논의 중에 있다. 한 주민은 "동네사람 모두 그 분에게 감사드리고 있다"며 "절대 잊을 수 없는 은혜"라고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음은 '전남 함평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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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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