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산수유 마을의 비극…'산동 학살' 사건
2015년 1월25일 취재진은 간전면에 이어 구례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산동면으로 향했다. 봄볕보다 따스한 샛노란 봄의 전령 '산동'은 핏빛보다 고은 붉은 영(靈)이 되어 차가운 겨울을 비추고 있었다.
이곳은 산수유 마을로 유명하다. 곳곳이 산수유 군락지로 겨우내 영글었던 꽃망울이 터지면서 남도의 이른 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 또 지리산 온천랜드가 자리 잡고 있어 해마다 많은 이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70여년 전 이곳에서 발생한 '통한의 비극'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구례경찰서 정보계장을 지낸 이모 씨는 2007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1968~69년경 경찰서 근무 당시 '사살자 명부'를 본 기억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산동면이 가장 많은 500명 정도 죽었고, 이어 간전면이 300~400여명 가량 됐다"고 고백했다. 구례 전체적으로는 2000여 명 정도가 사살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경찰서에 연행되지 않고 구례 곳곳에서 즉결처분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이 사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진실화해위 조사를 통해 확인된 희생자는 165명에 불과하다.
이 씨가 봤다던 '사살자 명부'는 현재 소각된 상태다. 그는 "1982~83년 무렵 연좌제 폐지 명령이 내려와 조사내용을 소각했다"고 털어놨다. 국가폭력의 주요 단서가 정부의 지시 하에 소멸된 것이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동면은 반군의 근거지였다. 이 때문에 소탕작전을 펴는 군경과 빨치산 간 게릴라전도 수시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의 피를 흘린 것은 물론이다. 한국전쟁 전후 대부분의 민간인 학살이 그러했듯 주로 군경에 의한 피해가 컸다.
산동면 대양부락(대평리)에서 만난 한준희(남·75세)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한 씨는 1949년 1월11일(음력 12월13일) 군경에 의해 아버지(당시 31세)를 잃었다. 빨치산이 동네에 내려와 한 씨 집 송아지를 끌고 간 것이 이유였다. 먹을 것을 제공했다며 총살시킨 것이다.
빨갱이 부역자의 아들이란 멍에는 평생 한 씨를 따라다녔다. 그는 1974년 서울 서대문구청 청소과에 근무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구청 간부들로부터 '빨갱이'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사직 압박'을 받았다. 결국 사표를 낸 그는 서울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 고향인 구례에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한 씨는 아버지 얘기에 앞서 1948년 11월 대평리(대양·대음·방곡·평촌·신평부락) 주민 모두가 한꺼번에 몰살당할 뻔한 얘기도 들려줬다. 공교롭게도 국군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은 이 무렵(11월 4일) 매복한 반란군에 의해 집중사격을 받고 산동면 시상리 대나무 숲에서 자결했다. 위기감에 휩싸인 국군의 토벌작전은 더욱 흉포해졌고, 주민들은 더 많은 피를 흘러야만 했다.
군경은 한 씨(당시 9세)를 비롯해 대평리 주민 백여 명을 대양과 대음부락 사이 뒷산으로 끌고 갔다. 그 자리에는 한 씨 또래의 어린아이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군인들은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덩이를 파라고 지시했다.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본인이 직접 파도록 한 것이다.
한 씨는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며 "마을 사람과 함께 구덩이 파는 것을 지켜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죽는구나, 저기에 묻히는 구나' 생각하며 동네 사람 모두가 공포에 떨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구덩이를 파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 이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누군가 오더니 총살형을 멈추도록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던 군인들은 정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따로 불러냈다. 이유는 어떤 군인이 정 씨 성을 가진 빨치산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려 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게 분류된 정 씨들은 그 인근에서 무참히 살해됐다.
산동 원촌초등학교에 주둔하던 국군 제5여단 소속 3연대 2대대(대대장 조재미)는 소대 단위(30여 명)로 부락 수색작전을 폈고, 한번 나가면 50~100여 명의 민간인을 끌고 와 감금시켰다. 연행자가 너무 많아 눕지 못한 채 앞사람 등에 머리를 대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취조 도중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20~30명씩 새끼줄로 묶어 사살장소로 이동해 총살시켰다.
당시 군경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처럼 선과 악의 판단보다는 단순한 명령수행자 내지는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광기 속에서도 인간의 상식과 양심에 따라 행동한 이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들에게는 좌니, 우니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부의 지시 이행 이전에 무고한 양민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구례경찰서 안종삼 서장도 마찬가지다.
상부지시 어기고 보도연맹원 전원 석방
"그분이 구례 사람 여럿 살렸어."
한 씨는 안 서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49년 7월 구례경찰서장에 부임한 안 서장은 1950년 7월 24일 상부의 사살 명령을 어기고 구례경찰서 유치장과 상무관에 감금된 국민보도연맹원 480명(800여 명의 보도연맹원 가운데 좌익색이 짙은 인물만 재분류) 전원을 풀어줘 좌·우익 간 피의 보복을 멈춘 인물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진실화해위 조사가 한창이던 2009년에서야 세간에 알려졌다.
보도연맹원 석방 이틀 전 상부는 퇴각 명령과 함께 이들에 대한 사살 명령도 함께 내렸다. 안 서장은 중대결단을 해야만 했다. 1950년 7월24일 오전 11시. 보도연맹원을 연병장에 집결시킨 뒤 단상에 오른 그는 "여러분 모두 방면하겠다. 내가 반역으로 몰려 죽을지 모르지만, 혹시 죽으면 내 혼이 여러분 각자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 사람이 돼 달라"는 말과 함께 이들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안 서장의 용기 있는 조처로 한국전쟁 당시 피비린내는 타 지역과 달리 구례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인민군에 의한 보복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취재진은 안 서장의 아들 안극순(79·구례읍) 씨를 어렵사리 만났다. 그는 아버지 결단에 대해 "마냥 좌우로 나뉘어져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느냐"며 "여순 사건 때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시면서 많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고 했다. 보도연맹원 석방에는 지역 유지들의 힘도 컸다. 여순 사건으로 학살의 피를 경험한 이들은 보도연맹원 구금 소식에 구례경찰서를 찾아갔고, 안 서장을 설득했다.
물론, 반대 의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안극순 씨는 이에 대해 "경찰서 내 몇몇 간부들이 반대하긴 했지만, 경황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석방 당시 인민군이 전주에서 남원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며 "보도연맹원 사살 문제를 놓고 논쟁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남원에서 구례까지는 25km 남짓에 불과하다. 인민군이 목전에 와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어 "전시였고, 급박한 상황이라 정부에서도 '항명'에 대한 특별한 조치 없이 넘어갔다"며 이후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현재 구례경찰서에는 안 서장을 추모하기 위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보상금 주기 싫다는 국가…유족들 '분노'
취재진은 구례유족회장 박찬근 씨로부터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국가가 보상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진실화해위에서 관련 사실을 확인한 뒤 이에 대한 결정 통지문을 통보하면 3년 이내(이마저도 특별한 경우에 해당)에 소송을 통해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 즉, 이 기간 내에 소송을 걸지 않으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에서 보내온 진실규명 결정 통지문만 믿고 있었다. 진실화해위 측으로부터 재판을 통해 보상받아야 한다는 등의 내용도 전해 듣지 못했다. 이후 관련 사실을 알게 된 유족들은 뒤늦게 재판을 준비했지만, 이미 시간이 경과한 후였다. 유족들은 줄줄이 패소했고,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더욱이 국가는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의 사과를 권고했지만, 정부는 외면했다. 유족들은 다시 한 번 울분을 토했다.
구례유족회는 지난 1월27일 재판여부와 관련한 유족회의를 가졌다. 박찬근 회장은 이후 본지와 통화에서 "시간은 지났지만, 어쨌든 소송을 걸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앞서 취재진과 만나 "시골에서 농사짓거나 70세 이상 고령자가 많아 재판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관련 유족들은 현재 소멸시효와 관계없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박찬근 씨는 이에 대해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정치권과 법이 도와야 하는데, 참…."이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남 화순 편'이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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