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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상 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의 의미는?
[해방일기] 1946년 7월 19일
1946년 2월 말 미국 국무부로부터 육군부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보낸 정책 지침이 몇 달 후 미군정의 좌우 합작 지원의 출발점이 된 것으로 서중석은 중시한다. 이 워싱턴으로부터의 특별 충고는 미군정이 "김구 일파와도 연결되지 않았으면서 소련의 조종을 받는 세력과도
김기협 역사학자
2011.07.19 10:15:00
여운형 습격, 역시 극우의 소행!
[해방일기] 1946년 7월 18일
7월 17일 밤 여운형이 테러 습격을 받았다. 9시 반경 신당동 버치 중위 집에서 합작위원 몇 사람의 모임이 끝난 뒤 입원 중인 김규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맡기기 위해 김규식의 아들 김진동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김진동의 집은 버치의 집에서 40미터 거리였다고 한다. 권
2011.07.18 07:45:00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조선
[해방일기] 1946년 7월 15일
소련이 북한에서 공장 시설을 반출하고 있다는 증언이 몇몇 월남민의 입에서 나왔고, 이것이 1946년 3월 미소공위 출발점에서 큰 걸림돌이 되었다. (1946년 3월 18일자 일기) 미군 측은 이 의혹의 즉각 확인을 요구했고, 소련군 측은 근거 없는 의혹이라며 점령 지역의 관리
2011.07.15 08:19:00
'국대안 파동'의 출발점
[해방일기] 1946년 7월 14일
7월 13일 군정청 문교부에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취지문을 발표했다. 1) 해방 이후 문교부의 첫 일은 우선 닫혔던 학교를 재개하는 일이었다. 국민학교를 열고 순차로 중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열었다. 이것은 일정 시대로부터 있어 온 학교가 완전하여서 보다도 백
2011.07.14 09:11:00
언론 자유에 관심이 없던 <동아일보>
[해방일기] 1946년 7월 12일
신문 기사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는 여러 신문 지면이 제공되는데, 내가 조사하는 기간을 포함하는 것은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뿐이다. 한편 "자료대한민국사"에는 여러 신문 기사 중 일
2011.07.12 08:22:00
박헌영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
[해방일기] 1946년 7월 11일
좌우 합작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중도파 정치인들에게는 당연히 민족 통일 전선이었다. 해방을 독립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민족의 화합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민족은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집합이므로 그 안에 불화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독립 건국의 과제 앞에
2011.07.11 08:17:00
미군정, 좌우 합작에 방해나 안했으면…
[해방일기] 1946년 7월 8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5월 하순부터 여운형-김규식 선생을 중심으로 시작된 좌우 합작 논의가 이제 좌우익 대표를 정해 본격적인 '회담' 단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우익 대표로 참여를 결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2011.07.08 10:22:00
좌우 합작 분위기를 보여준 3義士 국민장
[해방일기] 1946년 7월 7일
7월 7일 오후 2시에 효창공원에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3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한민당, 공산당, 한독당, 민전, 독촉국민회, 전평 등 주요 정당, 단체들이 좌우 구별 없이 참가한 이 국민장에 5만여 군중이 참례했다고 한다. 이 날 조성된
2011.07.07 07:57:00
박헌영은 정말로 미국의 '간첩'이었나?
[해방일기] 1946년 7월 5일
1953년 3월 21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이 체포되었다. 이승엽 등 관련 인물들은 그 해 7월에 기소되었는데, 수괴로 지목된 박헌영은 1955년 12월에야 기소되었다. 죄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 행위"였다. 기소장에 기록된 그
2011.07.05 11:27:00
김일성과 박헌영, 어디서부터 틀어졌나?
[해방일기] 1946년 7월 4일
7월 1일자 일기에 소개한 박헌영의 7월 3일자 기자 회견 문답은 서면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다른 간부(이주하)가 대신 발표한 것이었다. 7월 3일에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있었다. 1992년에 나온 중앙일보사 특별취재반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사 펴냄
2011.07.04 07:5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