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 18일
7월 17일 밤 여운형이 테러 습격을 받았다. 9시 반경 신당동 버치 중위 집에서 합작위원 몇 사람의 모임이 끝난 뒤 입원 중인 김규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맡기기 위해 김규식의 아들 김진동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김진동의 집은 버치의 집에서 40미터 거리였다고 한다.
권총을 든 몇 명의 괴한이 여운형을 붙잡아 부근의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 백지에 서명을 요구한 다음 서명을 받자 다시 더 깊은 산속으로 끌고 올라가 죽이려 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순간적으로 괴한들을 뿌리치고 높은 산비탈을 굴러 내렸다가 찾아 나온 측근들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서울신문> 기자가 며칠 후 여운형과 나눈 문답에 백남운의 논평을 붙인 기사를 내보냈다.
17일 불의의 봉변을 당한 여운형은 시내 모처에서 가료 중인데 기자는 20일 오후 2시 그를 병상으로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경과는 좀 어떠한지요?
(답) 잠을 자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 못하여 곤란할 뿐 대단치 않다.
(문) 사건 발생 당시의 경위를 간단히 말씀하여 주셨으면?
(답) 金鎭東 씨 집에 가는 도로상에서 키가 큰 청년이 다정스러운 어조로 나를 부르더니 악수를 청하였다. 그래서 악수를 하니 손을 잡으며 피스톨을 겨누고 옆에서 다시 두 사람이 나타나 피스톨로 위협하며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 "수차 경고를 하였는데 왜 이러는 것이요? 여기다 서명을 하시요"하고 존칭을 쓰며 매우 침착한 어조로 한 청년이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자기의 죄악을 인정하고 국가 민족에 죄를 많이 범했으니 앞으로 다시 정계에 나오지 않겠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맹서하는 것이요"라고 하매 나는 불가불 우선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자 다시 눈을 가린 채 상당히 먼 거리를 끌고 어느 지점에 이르더니 세 청년이 돌연 나의 허리를 껴안고 나의 가죽 혁대를 풀어서 양쪽 다리를 둘러매기 시작하며 다시 노끈으로 목을 졸라 매기 시작하였다.
이때 나는 위급함을 느끼고 전력을 써서 반항하던 중 바로 머지않은 곳에 전등불이 희미하게 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욱 힘과 용기를 얻어서 최후의 힘을 다하여 반항한 끝에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이다.
(문) 이번 조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좌우 합작 운동에 미치는 영향은?
(답) 이번 사건은 좌우 합작을 방해코자 한 계획적 행동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이는 어디까지라도 나 개인이 당한 일이니 이로써 민족 통일 운동이 방해될 리도 없으며 방해되지도 않을 것이며 앞으로 좌우 합작 공작은 그대로 추진해야 될 줄로 생각한다.
(문)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답) 어느 방면 혹은 어느 측에서 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싶지 않다. 건국 공작이 시급한 이때 이와 같은 일은 도움보다 해밖에 없을 것이니 앞으로는 없기 바란다. 경찰 혹은 미군에서도 나 개인의 보호나 이번 사건의 범인 체포에 노력하는 것보다 이와 같은 테러를 전반적으로 박멸시켜서 사회가 명랑하도록 하여 주기 바란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여섯 시경 우리 집(계동)에 어떤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다시 협박장을 던지고 갔는데 그 내용은 "만약 또 출두하면 다시 용서치 못하겠다. 더욱 앞으로는 너의 가족까지도 해치겠다"는 것이었으나 이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초지대로 나갈 것이다.
신민당 남조선중앙위원회 백남운은 20일 출입 기자단과 회견하고 좌우 합작 문제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하였다.
"좌우 합작은 여 씨 피침 문제로 인하여 진전이 일시 중단되지 않나 하는 의혹이 있는 것 같은데 이 합작 문제는 중단되어서는 안 될 문제이며 일층 더 노력하여 좋은 성과가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지난 19일 한민당 선전부에서는 막부 삼상 회의 결정 지지 연합국 원조를 아직까지 반대하며 민전 측 제 정당의 성의 있는 노력으로 좌우 합작이 진전을 보게 된 것을 실제로 목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 측이 합작을 방해하여 성의가 없다는 등 사실을 왜곡하여 선전함은 그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로서는 좌우 합작에 대해서 이때까지 우익에 대한 인식을 금반 여 씨 조난 사건을 계기로 하여 수정할 필요를 스스로 느끼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21일자)
이 습격은 극우 아니면 극좌의 소행일 것이다. 그때까지 여운형에 대한 흑색선전도 그 두 방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여운형 측의 자작극일 가능성도 있지만, 해방 후 2년 동안 여운형이 여러 차례 테러 습격을 당했고, 결국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실에 비춰보면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백남운이 논평 끝에 "우익에 대한 인식을 수정할 필요"를 느낀다 한 것은 극우의 소행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한민당이 좌우 합작에 부정적인 태도라는 점을 그 앞에 말하기는 했지만, 한민당 쪽을 의심할 근거는 그밖에도 이런저런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근거가 충분한 것이었는지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좌익 입장에서 우익에게 뒤집어씌우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 것이 아님은 믿을 수 있다. 그는 정파적 입장에 가장 얽매이지 않은 정치가의 하나였으니까.
7월 19일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의 논평은 백남운만이 아니라 많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경찰과 통하는 세력의 소행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여운형에 대한 테러 사건에 대하여 張 경기도경찰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운형 씨 불의의 봉변 사건은 식자로 하여금 통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아직 아무런 정식 보고가 없으니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하다면 경찰은 전력을 드려 그런 무뢰한을 여지없이 포착하여 일반의 불안한 공기를 일소하겠다. 아무리 교묘한 무뢰배라 하여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어려울 줄 믿는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19일자)
체포하겠다고 큰소리는 치는데, 수요일의 사건 '정식 보고'가 금요일까지 없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주요 정치인의 테러 사건 '정식 보고'가 이틀 후까지 없었을 수가 없다. 장택상이 보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 '비공식 보고'를 받기 바빠서.
7월 25일에 독촉국민회 회장 이시영이 민전 간부들을 경찰에 고발했다. 아마 무고죄 고발이었던 것 같다.
이시영은 25일 민전의장 장건상 이강국 등 6명을 상대로 종로서에 고발한 일이 있어 다난한 정계에 화제를 던지고 있다. 그 이유는 19일 민전 의장단에서는 인민당수 여운형 피습 사건에 대하여 하지중장을 방문하고 진정한 일이 있었는데 그중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테러의 근거로 지적하고 해산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독립촉성국민회장 이시영은 25일 민전 의장 장건상과 민전 사무국장 이강국 외 5명과 시내 모 신문사 편집국장을 상대로 하여 시내 종로서에 고소장을 제기하여 그들의 모략과 부당성을 법에 비추어 해결을 구한 것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27일자)
7월 19일 군정청에 대한 민전 의장단의 요구는 <자유신문> 7월 20일자에 보도되었다.
"치안 당국의 책임 추구"
민전에서는 그 의장 여운형 씨의 조난에 대하여 그 대책을 강구하고자 18일 오후 O시 긴급 의장단회의를 소집하고 장시간에 걸쳐 토의하였는데 여운형 씨의 조난이 우연한 폭행이 아니요, 민족 통일과 좌우 합작을 방해하려는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소행인 점은 각지에서 발뒤꿈치를 따라 일어나는 '테러'와 관련하여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라 하여 이 문제의 중대성에 비추어 의장단에서는 허헌, 김원봉, 백남운, 유영준, 장건상, 이여성, 제씨가 19일 하지 장군과 러치 소장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러한 불상 사건이 속출하는 것은 치안에 당하는 경찰이 편당적이어서 무력한 까닭이다. 우리는 경찰의 공정과 민주주의화를 부르짖는 동시에 그 최고 책임자인 조병옥 경무부장, 최능진 수사과장, 장택상 경찰부장, 3씨의 인책 파면을 요망한다.
2. 광범, 차 조직적으로 행하여지는 테러는 고식적 수단으로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니 그 근원을 발본색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각종의 테러 단체를 해산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총 책원지인 (중략)회를 해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우리 민주주의 민족 전선 급 기 산하 제 단체는 이러한 현실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그 폭행 파괴에 감내할 수 없으므로 자위 대책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구의 제2항에 "(중략)회"란 표시가 눈에 띈다. 독촉국민회에 고발당한 신문은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름을 당당하게 올려줬던 모양이다. <해방일보>는 벌써 문 닫았으니, <조선인민보>였을까?
1년 전 <해방일기>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해방 공간 안에 좌익의 폭력과 우익의 폭력이 대등하게 얽혀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동안 그 생각이 바뀌었다. 해방 후 1년 동안 좌익의 폭력은 수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우익 폭력의 근거는 자금력이었고, 좌익 폭력의 근거는 조직력이었다. 그런데 조직력은 자금력처럼 맹목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박헌영 일당은 분명히 좌익 활동을 폭력적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나는 극좌로 본다. 그런데 그들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1946년 1월 국군준비대(국준)와 학병동맹이 경찰과 군정청의 탄압을 받았다. 그들을 좌익 단체로 흔히 설명하는데,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두 조직에 좌익 요소가 약간 강했다 하더라도 극우 폭력에 대항하는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을 뿐이다. 두 단체는 중도적 이념에 입각해 자발적 참여를 끌어 모은 것이므로 돈으로 동원한 우익 폭력단체처럼 정략적 폭력 활동을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힘이 없었다.
여운형 습격이 극좌의 소행일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생각하는 것은 여운형과 박헌영 사이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다. 7월 4일자 일기에서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지음, 중앙일보사 펴냄)에 수록된 전 북한 고위관리 서용규(가명)의 증언을 인용해 그 관계를 밝힌 바 있다. 같은 책 248~249쪽에 그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언이 실려 있다.
역시 미군정의 공작을 둘러싼 일입니다. 박헌영은 "미군정이 자신과 여운형의 사이를 떼어놓으려는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말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미군정이 적당한 방법으로 몽양이 아베 총독과 밀약을 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몽양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고 이를 박헌영이 한 짓으로 꾸민다는 것"이었지요.
박헌영은 이를 여운형과의 사이를 나쁘게 하려는 미군정의 정치적 음모라고 봤습니다. 자신과 여운형을 갈등관계에 빠뜨려 공산당과 인민당을 분리시키고 종국적으로 좌익 세력 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와해시켜 여운형을 미군정 쪽으로 끌어당기려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박헌영은 미군정이 여운형에게 귀띔을 하기 전에 이 같은 정보를 사람을 놓아 여운형에게 전했습니다. 메시지 내용은 "미군정이 적당한 방법으로 일제 때 아베 총독과 당신이 조선을 팔아먹기 위한 밀약을 했다고 공산당이 폭로한 것으로 만들어 당신을 모해하고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 아마도 미군정이 우리와 당신을 갈라놓기 위해 수작을 하는 것 같으니 부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메시지가 여운형에 전달된 뒤에 미군정이 여운형에게 "공산당이 당신의 비행을 폭로하고 다닌다"는 귀띔을 한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그런 정보를 알고 있던 여운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대단히 복잡한 책략인데, 서용규의 증언은 박헌영 자신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전반적인 상황을 놓고 볼 때, 미군정은 이런 얕은꾀를 쓸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강한 힘을 가진 쪽에서 왜 힘 싸움 대신 꾀 싸움을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여운형에게 흑색선전을 해온 박헌영이 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미군정 쪽에 책임을 미루려고 둘러댄 이야기 같다.
이런 이야기를 박헌영이 꺼낸 것은 김일성을 위시한 이북 지도자들이 여운형의 좌우 합작 지지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여운형을 이간시키려 애썼지만 김일성은 사람을 보내 여운형과 접촉하고 있었다. 명목상 조선공산당 총비서지만 실력에서 북조선공산당 책임자 김일성에게 밀리고 있던 박헌영이 여운형에 대한 자신의 적대 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미군정을 끌어댄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이 이남 좌익의 헤게모니 경쟁자로 여긴 여운형을 이 시점에서 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인다. 여운형에 대한 적대 행위가 이북 실력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는 판에 그런 모험은 그의 모험주의 노선에도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그런 의도가 있었더라도 이북 실력자들의 눈까지 속이면서 테러에 동원할 인력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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