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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자유에 관심이 없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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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자유에 관심이 없던 <동아일보>

[해방일기] 1946년 7월 12일

1946년 7월 12일

신문 기사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는 여러 신문 지면이 제공되는데, 내가 조사하는 기간을 포함하는 것은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뿐이다. 한편 "자료대한민국사"에는 여러 신문 기사 중 일부가 입력되어 있다. 그래서 "자료대한민국사"로 먼저 윤곽을 파악한 다음 필요할 경우 "한국근현대신문자료"로 확인, 보완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용의 한계와 문제점을 분명히 느낀 일이 있었다. "자료대한민국사"의 7월 12일자 기사 목록(게재 일자가 아니라 발생 일자로 묶여 있다) 중 "러취, 신문의 허위 기사나 보도 책임은 발행인·주간에 있다고 언명"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군정청 출입 기자단에서 제출한 언론계 탄압에 대한 진정서에 관하여 러취 군정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는 7일 기자단이 제출한 진정서를 수리하고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 나는 과거에도 귀단의 전 질문을 취급하였고 금후도 동일한 태도를 계속할 것이다.

기자 급 신문에 관한 사건이 있을 때는 경찰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공보부와 상의할 것을 공보부와 경찰 당국 간에 동의하였다. (…) 나는 기자들은 이 기자 회의에서는 최대한도의 자유가 부여되도록 희망하는 바이다. 주간 급 발행인을 그 신문에 보도된 허위 기사로 공보부에 호출하는 데 관하여는 비록 1기자가 그 기사를 취급하였으므로 최초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발행에 대한 최후의 책임은 주간 급 발행인에 귀결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러니 그 책임은 대리를 파견할 수 없는 것이다. 장래에는 신문사원이 공보부에 호출할 때는 그 호출에 대한 이유를 통지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16일자)


그런데 러치의 답변 대상인 기자단 진정서는 "자료대한민국사"의 7월 13일자 기사 목록에 들어 있었다. 원인이 결과보다 뒤에 일어난 것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니 위 기사와 같은 <동아일보> 7월 16일자에 신문협회가 군정장관에게 보낸 건의서 기사가 실려 있었고, 거기에 기자단 진정서 기사가 붙어 있었다. 신문협회 건의서는 7월 13일에 보낸 것으로 명기되어 있고, 기자단 진정서는 날짜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확인을 위해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서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니 인용문 중 밑줄 친 "7일"은 "7월 10일"의 오타였다. "자료대한민국사"에는 오타가 많고, 그중에는 내용을 크게 바꿔놓는 심각한 것도 꽤 있다. <해방일기> 작업 초기에 "자료대한민국사"만을 보고 인용했던 내용도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다. 뜻하지 않은 실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료 확인이 철저하지 못했던 점을 독자들께 사과드린다.

<자유신문>을 뒤져 7월 13일자의 "언론계 위축시키는 지나친 간섭을 배격"(기자단 건의서)와 "최대한 자유의 확보"(러치 답변) 기사를 보고 상황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7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상황 파악이 힘들었다.

"자료대한민국사"에 <동아일보> 기사의 비중이 너무 큰 것도 중대한 결함으로 생각된다. 당시 <동아일보>의 정치적 편향성은 1945년 12월 29일자의 신탁 통치 관계 허위 기사(1945년 12월 28일자 일기)는 말할 것도 없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10일의 기자단 건의서를 보도도 하지 않고 있다가 13일의 신문협회 건의서 보도에 곁들여서 '6하 원칙'조차 지키지 않고 부실하게 전한 것 역시 그 편향성의 한 모퉁이일지 모르겠다.

기자단의 건의서에 관한 <자유신문> 기사는 이런 내용이었다.

반세기의 질식 상태에서 소생하여 사상 처음 당하는 건국의 대업을 지고 민족의 뜻을 받들어 발족한 조선의 언론계가 초창 당초에 처한 중첩한 난관과 다단한 실정은 귀하도 잘 양해할 것으로 믿는 바이다. 창간 또는 속간된 지 주년도 맞이하지 못한 조선의 각 신문의 발전의 도정에서 범하여지는 다소의 과오는 또한 작은 것을 돌볼 사이 없이 신속을 요하는 건설도상의 언론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 근일 조선 언론계가 당한 군정당국으로부터의 몇몇 간섭은 그 당연히 있을 바 양해와 원조의 결핍은 고사하고 오히려 언론계의 활발한 발전을 저해하고 자유로운 민중의 여론을 위축시키는 탄압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의도의 여하를 불구하고 본 기자단으로서 최대의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 1. 기자단이 기자회 석상에서 문의를 하고 답변을 받는 것은 군정에 협조하고 서로 이해하여 나가자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인데 누차 동회 석상의 질문 내용에 대해서 제3자 또는 경찰의 용훼가 있음은 사실을 정당히 귀하에게 제시할 수 없게 된다.

1. 9일에 자유신문 인민보의 사장 주필 등 간부를 마포 호열자 기사 관계로 구금하였는데 해 기사의 게재 경위에 대해서 충분한 조사도 없이 더욱이 신문사의 간부를 구인 유치한 조치는 그 기사의 진위 여부를 불문하고 언론 기관에 대한 일대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1. 해방통신 송 기자의 사건은 그 질문 내용의 시비를 떠나서 우리는 이 사건이 우리 출입 기자와 관련이 있는 공보부에서 충고 한 단계조차 없이 곧 경찰이 유치 취조까지 하게 된 일을 심히 유감으로 아는 바이다.

1. 신한공사 농지 소작 계약 내용에 관한 질문자를 동사 책임자가 호출하여 "그런 사실을 질문하면 우리 입장이 곤란하다"고 힐문한 사실은 우리 기자단의 질문에 대하여 지나친 외부 간섭이라고 생각한다.

1. 기사에 대한 사소한 문의 건으로 건명도 말하지 않고 매일 오는 출입 기자를 통해서나 문서로도 당국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각 신문의 주간을 공보부에 호출하는 것은 정도가 지나치는 것이라고 본다.


<자유신문>, <인민보>, <해방통신> 등 좌익 내지 중도 언론사들이 구체적 탄압 사례로 거명된 것을 보면 군정청의 언론 탄압이 편향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동아일보>가 기자단 건의서 보도를 소홀히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일이다.

그런데 러치의 답변으로 돌아가서, 러치는 주간과 발행인의 "최후의 책임"을 들먹이면서 저도 모르게 언론 탄압의 의지를 드러냈다. 군정청에서 납득 못할 기사가 나왔다면 어떻게 그런 기사가 나오게 되었는지 '경위'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 할 일이다. 그런 계제에 '책임'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기사가 보이면 경위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아닌가. 미군정이 주장하는 '언론의 자유'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낸 답변이다.

기자단 건의서 첫 항목에서 "경찰의 용훼(容喙)"를 언급했다. 학병동맹 습격 사건을 둘러싼 기자들과 장택상 사이의 공방(1월 27일자 일기)에서 본 것처럼 경찰이 언론, 특히 좌익-중도 언론을 적대시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경찰의 문제점을 밝히는 데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이 문제를 멋지게 풍자한 글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1948년 3월에 발표된 글이지만 군정기 내내 계속된 문제이므로 이 대목에서도 참고가 될 것이다.

UN 임시 조선위원단 메논 의장이 소총회에서 행한 연설 가운데 경찰 국가라는 문구가 있어서, 그렇다 안 그렇다 하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말이 옳거나, 그러거나 간에 실제에 있어서 지금 남조선은 어느 행정 부문보다도 경찰의 존재가 뚜렷한 것만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현하 정세로서는 치안 유지가 가장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경무부장 발 앞에 수류탄을 던지고 수도청장 피습이 거듭되며 경찰서 습격, 방화, 경관 살상 사건이 빈발하는 상태 하에서는 경찰의 존재가 또한 뚜렷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경찰 당국으로서 가끔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도 예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되 이것이 또한 비상 상태 하의 경찰 책임자로서는 그 심정을 민중의 심정에 연결시키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경찰 당국의 성명서 발표 혹은 포고문의 첩부가 빈번하다 해서 비난할 이유는 추호도 없는 일이다.

가령 병이 나지 않으면 의사의 존재쯤 무관심할 수 있듯이, 질서와 평화를 누리는 사회에서는 실상 그 질서와 평화를 위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있는 경찰의 존재쯤 범법자나 피해자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는 신뢰적인 의미에서 무관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혼란한 중에서는 경찰 자신이 항상 긴장한 그만큼 일반 민중으로서는 경찰의 동향에 긴장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경찰 당국의 성명서 혹은 포고문은 문맹만을 빼고서는 누구나 주의 깊게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런지라, 이 성명서나 포고문을 작성함에 있어서는 당국으로서도 일언일구에 주의를 가하여 민중의 긴장한 관심을 선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뽑겠다"는 문구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일본에는 '사무라이' 전통이 있었고 그래서 정말 문무의 별(別)이 없이 웬만한 사람이면 대대로 나려오는 '전가의 보도'가 있었으니까 이런 문자가 있지마는 조선에는 없는 말이다.

더구나 일본에서도 경찰 자신이 이 말을 쓰는 법은 없었고 신문이 경찰의 비상수단을 표현하는 말로 써온 줄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겨우 삼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조선의 국립 경찰은 지금이 바로 시초라, 앞으로 전해 줄 보도는 있어야 하겠지만 선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서 전해 받은 보도가 있는가.

그는 또 그렇다 하고 "보호의 은전(恩典)"이란 무엇인가. 은전이란 말은 천황이 적자(赤子)에게 내리는 것이었다. 일본의 천황 그 존재부터가 비민주적인데 하물며 은전이라는 용어의 정의상 비민주적 본질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 조선의 국립 경찰은 국가의 공복이다. 봉사와 질서의 표어가 가슴 위에 빛나고 있는 이 민주적 공복이 무슨 말을 못 써서 저 비민주적 일본제국의 군국제도에서 사용되던 군주적 용어를 쓰는가. 모르거니와 일본에서도 지금은 이러한 용어가 말살되었을 것이다.

이보다도 더 놀라운 용어로서 '보복(報復)'이라는 문구를 읽은 일이 있다. 국가의 공복으로서 국민 앞에 보복을 선언한다 하면 이는 괴변이거니와 물론 이것은 살인, 방화를 자행하고 평화한 질서를 파괴하는 '적비(赤匪)'에게 대한 보복인 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적비'라는 용어의 유래가 무엇인가? 일제가 일찍 우리 독립단을 비적(匪賊)이라 하였던 것이다. 일제가 다시 만주를 침략한 뒤에 반만군(反滿軍)이 봉기하자, 그들은 '비적'을 분류하여 조선독립단을 '선비(鮮匪)'라, 반만군을 '만비(滿匪)'라 불렀던 것이다.

선비도 만비도 혁명 투사로 된 오늘날 적비라는 새 용어가 생겼으니 가령 우익 폭도는 백비(白匪)라 불러야 하나? 다행히 아직 백비라는 용어는 사용된 일이 없었다.

(…) 물론 나는 당국이 용어 선택에 소홀하였다는 점은 지적하는 바이나 그 이상의 어떤 정신적인 점을 곡해하거나 비난은 하지 않으려 한다. 같은 글자라도 개념이 다르다 하지마는 당국은 이 점에 주의를 소홀하였을 것일지언정 고의로 이런 용어를 선택하였다가 민중의 긴장한 관심을 자극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가혹한 오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용어로 인하여 민중 간에는 어떤 심리 현상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까지는 대담히 지적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경찰을 무서워하는, 위압을 느끼는 심리 현상이다. 어쩐지 친근한 신뢰감보다는 소원한 위압감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그러한 현상이 발전하면 무엇이 되느냐 하면 경찰과 민중은 유리하게 되기 쉬울 것이다.

민주주의 제1장 제1과는 무서운 경찰이 없는 사회-위압과 혐오가 없이 경민(警民) 간의 따뜻한 신뢰감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면 용어의 선택에서부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함을 여기에 역설하는 바이다. 나는 이러한 충정으로써 충고를 달게 받는 당국자의 아량에 기대하여 수사학(搜査學)과 동시에 수사학(修辭學)도 틈틈이 연구하여 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경찰과 수사학(修辭學)", <진짜 무궁화>(오기영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133~138쪽)


1909년 황해도 배천 출생인 오기영은 1928~1937년간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고, 해방 후 <조선일보> "팔면봉" 등을 집필하다가 1949년 북쪽으로 건너갔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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