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 4일
7월 1일자 일기에 소개한 박헌영의 7월 3일자 기자 회견 문답은 서면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다른 간부(이주하)가 대신 발표한 것이었다. 7월 3일에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있었다.
1992년에 나온 중앙일보사 특별취재반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사 펴냄)은 공산권 붕괴에 따라 접근이 가능하게 된 자료와 증언을 활용한 다큐멘터리로서 해방 공간의 여러 사실들에 대해 풍부한 새 시각을 제공해주는 자료다.
이 책의 출판은 '자료 확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다. 예컨대 전 노동당 간부 서용규(가명)의 많은 증언을 담아 놓았는데, 확인 가능한 다른 자료와 상치되는 점이 별로 없기 때문에 비록 가명의 개인 증언이지만 높은 신뢰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증언이 높은 신뢰도를 얻게 된 것은 빠른 시점에서 출판·공개된 덕분이다.
1945년 10월에서 1946년 10월까지 1년 사이에 있었던 김일성과 박헌영의 여섯 차례 만남을 둘러싼 내용이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46년 6월 27일에서 7월 12일까지 박헌영의 평양 방문(그 기간 중 일부는 모스크바 방문)이 김-박의 네 번째 만남으로 226~240쪽에 소개되어 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허가이와 함께 모스크바로 떠난 날자는 7월 1일로 밝혀져 있는데, 돌아온 날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방문 기간이 10여 일이라 하므로 박헌영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서울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조선공산당 지도자들과의 토론은 6월 27일에서 7월 사이에 대개 이뤄졌을 것이다. "김일성 측은 박헌영의 얘기를 주로 듣기만 했습니다. 협의회에서는 박헌영이 주로 이남의 정세를 설명하고 나머지는 듣기만 하는 식이었습니다" 하는 것이 서용규의 증언이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29쪽)
5월에 터진 정판사 사건과 6월 중에 부각된 좌우 합작 움직임이 중요한 주제였다. 정판사 사건 토론에 관해 서용규는 이렇게 증언했다.
정판사 사건을 놓고 조직위 간부들이 박헌영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김책-허가이-주영하 등은 "미군정이 정판사 사건을 만들 만한 빌미를 조선공산당 측에서 제공한 꼴이 아닌가"라고 지적했습니다.
"일제 때 근택빌딩에 있던 인쇄소에서 총독부가 지폐를 찍어냈던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기계 같은 것들은 미리 다 치워버렸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질책에 가까웠습니다.
허가이는 "박헌영 측이 미군정의 경제를 혼란시키기 위해 정말로 위조지폐를 발행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갖고 있었고, 북조선공산당 내에서도 그런 의심을 가진 사람이 일부 있어서 사건의 본질을 놓고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30쪽)
이 증언을 내놓을 때 서용규가 한국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박헌영을 깎아내리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용규가 내놓은 많은 분량의 증언이 전체적으로 가진 신빙성으로 보아 전혀 없는 얘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고 믿어진다. 지금까지 더듬어 온 상황으로 보아 박헌영이 북조선공산당 지도자들에게 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좌우 합작에 관해서는 서용규의 이런 증언들이 인용되어 있다.
좌우 합작 문제에 대해 박헌영과 김일성의 입장 차이는 컸습니다. 박헌영은 좌우 합작 운동을 "야심가 여운형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새 국면을 주도해 나가려는 음모"라고 봤어요. 미군정은 정판사 사건을 구실로 공산당을 탄압하면서 동시에 좌우의 통일 전선을 분열시키기 위해 여운형을 끌어들인다는 분석이었죠.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여운형은 이남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노리는 미군정에 이용당할 뿐이라는 입장이었어요.
그러나 김일성은 조금 달랐어요. 여운형의 좌우 합작을 도와줘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31~232쪽)
이남 정세가 복잡해지고 여운형과 박헌영의 관계가 좌우 합작을 둘러싸고 미묘해지기 시작한 1946년 6월 중순 김일성은 밀사를 이남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의 통일전선부 부부장인 성시백이 대남연락실 실무자 두 명과 함께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그 전달인 5월에도 정황 파악을 위해 북조선 임시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의 비서실장이 서울로 밀파됐지만 그때만 해도 좌우 합작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상황이 바뀜에 따라 다시 밀사를 보낼 필요가 생긴 거죠. 성시백은 5~6일 정도 서울에 머물면서 좌우 합작 운동을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박헌영, 김규식, 엄항섭, 조소앙, 백남운, 허헌 등 좌우를 막론하고 여러 인사들을 두루 접촉했죠.
그런데 좌우 합작에 대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인민당의 얘기가 정반대였습니다. 성시백이 여운형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여운형 주변 인사들의 얘기는 "여운형의 입장은 좌우 합작이 시급하고 미소공위 재개도 중요한 만큼 미군정을 등에 업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 상황에서 미군정을 업자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것밖에 안 된다"는 정반대의 주장을 폈습니다.
성은 평양으로 귀환하면서 여운형의 기자 회견 내용이 담긴 신문을 가져왔지요. 그때부터 이북 지도부의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자 회견을 본 김일성은 "신문 자체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여운형의 견해가 옳다"고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당 중앙에서 얘기가 돌았습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33~234쪽)
7월 하순 박헌영이 다시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다섯 번째 만났을 때도 좌우 합작과 여운형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차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서용규는 증언했다.
먼저 김일성은 "신문을 보니까 여운형의 생각이 미군정을 따라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지지성 발언을 했지요.
그러자 박헌영은 여운형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 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 합작 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 지주 출신이다."
북조선공산당 내의 일부 간부들도 박의 견해에 동조했었습니다. 박헌영의 태도에 대해 난감해진 김일성은 할 수 없이 속생각을 비췄죠.
"내가 석 달 전 여운형을 만나봤는데 박헌영 동지의 평가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라 해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여운형은 일제 때 건국동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도 인민공화국을 만들려 했고 지금은 민전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지 않느냐.
그가 우리와 함께 통일 전선을 만들어 임시 정부를 만들려 하는데 그만하면 된 것이 아니냐. 이 양반의 기자 회견 내용을 보더라도 공산당과 인민당이 같은 민족 통일 전선에 들어가야 된다고 밝히고 있지 않느냐. 당이 서로 다르더라도 당면 강령과 투쟁 목표가 같은 게 증거 아니냐."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44~245쪽)
1945년 10월 초순 두 사람이 개성에서 처음 만날 때 박헌영은 김일성보다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김일성은 입국한 지 한 달도 안 되었고 대중 앞에 얼굴도 내놓기 전이었다. 반면 박헌영은 공산당 최고 지도자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고 소련 영사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북의 공산당원 중에도 박헌영 지지파가 우세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조선분국 설치 승인만 해도 박헌영 입장에서는 크게 선심 쓴 것이었다.
그런데 반년 남짓 동안 사정이 바뀌었다. 김일성은 1945년 연말까지 북조선분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통일 전선 수립에 성공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위)를 만들었다. 임시인위는 남조선의 군정청에 상응하는 행정 기구였다. 임시인위를 이끄는 김일성은 이남에서 군정청의 탄압에 시달리고 있던 박헌영과 비교할 수 없는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박헌영의 공산당이 큰집이고 김일성의 북조선분국은 그 산하기구였지만, 북조선분국의 실력이 차츰 이남의 '당 중앙'을 압도하게 되었다. 1946년 들어 북조선분국의 자금 등 당 중앙에 대한 지원이 늘어남에 따라 노선 설정에서도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북조선분국은 1946년 3~4월경부터 '북조선공산당'으로 불리면서 당 중앙의 감독과 지휘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박헌영 공산당의 정책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좌우 합작과 여운형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두 사람의 성격과 취향 차이에 기인한 면도 있지만 입장 차이로 설명할 여지가 크다. 김일성은 북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이기에 앞서 북조선 통일 전선의 지도자 위치에 있었다. 그 위치는 남조선 통일 전선이 어서 이뤄져 북조선 통일 전선과 합작 작업에 들어가기를 바랄 입장이었다. 남조선의 공산당이 좌우 합작 노력에 호응하도록 압력을 가할 입장이었다.
한편 박헌영은 남조선의 통일 전선이 이뤄질 경우 주변부로 몰려날 입장에 처해 있었다. 군정청이 지원하는 합작이라면 중도 우파가 중심이 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좌익 안에서도 공산당보다 여운형과 인민당의 위치가 더 부각될 것이었다. 박헌영은 공산당이 주도권을 확보해 놓은 민전을 통해 좌익 내의 헤게모니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민전을 대신할 통일 전선이 좌우 합작을 통해 만들어지는 데 반대할 입장이었다.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면서 여운형을 비방한 것은 당장의 좌익 헤게모니 경쟁에서 자신의 맞상대였기 때문이다. 이남 사정을 잘 모르는 이북 사람들이 이남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력을 앞세운 북조선공산당의 남쪽 공산당의 노선에 대한 영향을 차단하려는 안간힘으로 보인다.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해 강경 투쟁에 주력하는 '신전술'을 1946년 7월에 들고 나왔다. 6월 말 김일성과 박헌영의 네 번째 모임 때는 아직 신전술이 공식화되기 전이었지만 박헌영은 그 방향의 노선을 이미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서용규는 증언했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밀담에서는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있었습니다. 정판사 사건, 좌우 합작, 미군정 탄압 공세에 대한 대응 방안 등이 주제였지요. 미군정 탄압에 강력히 맞서겠다는 구상을 박헌영이 이때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후에 발표되는 '신전술'이 그것이었습니다. 박헌영은 "이제 미군정에 대해 비합법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해야 할 시점이 됐다"고 역설했습니다. '신전술'에 대해서는 박헌영과 김일성의 견해차가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아직은 합법적인 투쟁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이 김일성의 의견이었습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34~235쪽)
서용규의 이어진 증언에 따르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53~254쪽) 김일성 등 북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은 박헌영의 신전술에 시종일관 반대했다고 한다. 박헌영은 그 의견을 존중할 것에 합의하고도 그 합의를 실천하지 않고 9월 총파업과 10월 대규모 군중 투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좌우 합작에서 공산당을 배제하는 미군정의 태도에 어찌 보면 영합하는 노선을 박헌영의 공산당은 걸었던 것이다. 그 노선을 통해 박헌영의 헤게모니는 지켜졌지만, 좌우 합작에서 좌익의 입장은 치명적인 제약을 받는 결과가 빚어졌다. 적대적 공생관계의 전형적 양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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