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 8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5월 하순부터 여운형-김규식 선생을 중심으로 시작된 좌우 합작 논의가 이제 좌우익 대표를 정해 본격적인 '회담' 단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우익 대표로 참여를 결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여 선생과 함께 해방 당일 건준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통일 전선 결성을 일관되게 제창해 온 정치인의 한 분입니다. 그런데 지난 1월 4당 코뮈니케가 불발로 끝난 후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에 참여하면서 좌익과의 합작을 포기하는 길을 걸어 왔습니다. '중앙당'을 지향하던 국민당도 우익 정당인 한독당에 통합시켰습니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좌우 합작도 통일 전선을 향한 노력입니다. 반년 가까이 통일 전선 결성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시작하시는 것은 새로운 희망이 떠올랐기 때문인가요?
안재홍 : 지난 1월 방송 강연에서 "해방은 남의 손으로 되었지만, 민족 전선의 통일조차 만일 또 남의 손을 빌어야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우리에게 자주 독립의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변명할 입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미소공위를 앞두고 통일 전선을 이루려는 4당 회의, 5당 회의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금 좌우 합작이 버치 씨의 주선과 하지 사령관의 지지 덕분에 출범하고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착잡합니다. 민족 전선의 통일조차 남의 손을 빌리고 있는 셈 아닙니까.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부끄럽다 해서 마다할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민족 전선의 실패는 우리 민족주의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외부적 조건 때문입니다. 미소 점령군의 존재가 극우와 극좌의 발호를 뒷받침해주고 있는데, 양심적인 민족주의 세력이 무슨 힘으로 그들의 폭력에 대항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똑같이 폭력적인 힘을 키워야 되겠습니까?
미군정의 좌우 합작 지원은 현명한 결정입니다. 미군정의 성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극우와 극좌의 폭력을 차단해 주는 것은 남반부 조선의 '합법 정부'를 자임하는 미군정의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이제야 수행하겠다고 나서 주는 것이 만시지탄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우리 손으로' 민족 전선을 이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입니다.
김기협 : 1월 말 방송 강연에서("중앙당으로서의 건국이념", <민세 안재홍 선집 2>, 83~87쪽) 선생님이 '극좌'와 '극우'의 존재를 강조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전에도 그런 '성향'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낸 일은 있지만, 그 강연에서는 극좌와 극우를 분명한 '실체'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좌익과 우익은 '사회 혁명'에 대한 태도에 따라 갈라집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우익을 표방하지만 사회 혁명의 궁극적 필요성은 수긍하시지 않습니까? 다만 이제 막 식민 지배를 벗어나 나라를 세우는 단계에서는 사회 혁명을 서두를 일이 아니고, 민족국가를 세운 뒤에 주체적으로, 그리고 차분하게 진행하자는 것이지요. 여운형 선생 같으면 거의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좌익을 표방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중도적인 생각이 대다수 조선인의 지지를 받으리라는 것은 굳이 여론조사를 안 해봐도 이치로 빤한 일입니다. 그런데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사회 혁명을 주장하는 극좌와 일체의 사회 혁명을 거부하는 극우가 위세를 떨쳐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강연에서 극좌와 극우의 득세를 "외국에 대한 의뢰심이나 의존사상"으로 풀이한 것을 저는 주목합니다. 그 점을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안재홍 :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시작된다고 나는 봅니다. 그들은 코민테른의 '세계 혁명' 지원 노선을 철석같이 믿고, 마침 소련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조선의 공산화를 전심전력으로 지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모양입니다. 그 동안 미군정이 오른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었던 것은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소련의 국가 성격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소련도 원론적 공산주의만을 지키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1920년대에 레닌도 자본주의 요소를 다분히 가미한 '신경제 정책'을 시행한 일이 있습니다. 스탈린도 소련의 국익을 위해 독일,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공산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외교 정책을 구사했고,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공산주의 원리보다 러시아 민족주의에 의지했습니다. 지금도 '일국사회주의' 원칙에 따라 세계혁명의 추진보다 소련의 국익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소련군의 무력에 직접 의지할 필요가 적은 통일 전선 전략을 추진해 왔겠지요. 그래서 공산당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상당 범위의 민족주의 세력을 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남의 공산당이 시종일관 통일 전선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소련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지나친 의존심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기협 : '극좌'의 범위를 대략 이남의 공산당으로 보시는군요. 신탁 통치에 대한 태도에서 이남 공산당의 유별난 점이 눈에 띄기는 합니다. "절대 지지"라고 하잖아요?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인데, 대충 지지가 아니고 절대 지지라면 한 글자 한 글자를 모두 지지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신탁 통치도 지지한다는 뜻이죠. 당원들에게 민족주의와 등질 것을 강요하는 노선 아닙니까? 공산주의가 빠지기 쉬운 교조주의적 성향을 보여주는 일 같습니다.
그런데 우익의 "절대 반대"에도 똑같은 틀의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승만 박사와 한민당의 '절대 반대'에는 연합국의 협조를 배척하고 미국에만 의지하는 '단독 정부' 획책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널리 의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탁 통치는 3상 회의 결정 중 하나의 세부 사항, 그것도 가변성이 있는 사항일 뿐인데 그것을 빌미로 3상 회의 결정 전체를 거부하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진정한 민족국가 수립을 회피하려는 한민당 주류 세력의 속셈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셈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이승만 박사의 성향도 그 동안 드러날 만큼 드러나 왔습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절대 반대' 대열에 앞장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민족주의자에게 존경받는 그분이 어째서 그런 편협한 노선에 집착하시는 것일까요?
안재홍 : "절대"라는 말이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쓰이는 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임정 지지도 그렇죠. 나는 임정을 내내 지지해 왔지만 한민당에서 내세운 '절대 지지'와 '임정 직진론'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본심이 두 달 전 한민당이 한독당과의 통합을 반대한 데서 드러났죠.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는 임정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김구 선생께서 신탁 통치 '절대 반대'에 나선 것이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에 현혹된 결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군정청 관리들과 경찰서장들까지 쫓아와 충성을 맹세하니까 연합국 협조 없이도 임정 중심의 자주 독립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품으신 것이 아닐지. 인공과의 교섭을 거부한 것도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고,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결성 과정에서 좌익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도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번에 한독당이 좌우 합작 지지를 표명한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근래 불거지고 있는 '단독 정부' 설에 그분도 경각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겠죠. 앞으로 좌우 합작 과정에서 그분은 앞에 나서지 않으시겠지만, 어른답게 무게를 지키고 계시면 그분 역할이 필요한 단계가 있을 겁니다.
김기협 : 좌익에서 강경 노선을 주장하는 이들은 우익의 '파쇼'를 배격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극우파의 폭력적 행태를 지목하는 것이죠. 그런데 선생님은 1월의 방송 강연에서 "민족주의 진영에서 파쇼를 꿈꾸는 자 있다면 꿈으로서도 그는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민족 파쇼'의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익 청년 단체의 폭력 행위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3·1절 때도 그렇고, 5월 12일 독립전취국민대회 뒤의 신문사 연쇄 습격도 그렇고요. 심지어 경찰마저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 탄압에서 파쇼의 전형을 보였습니다. 좌익 인사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폭력 단체와 폭력 경찰이 진정한 민족주의 세력이 아니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폭력배들이 모두 '민족주의'를 입에 걸고 날뛰는 것 아닙니까? 민주주의적 대의(代議)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집회와 언론이 민의 표출의 통로입니다. 좌익 신문사와 좌익 집회가 계속해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을 '우익 파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재홍 : 폭력이 정상적인 정치를 가로막는 현상은 지난 반년 동안 매우 심해졌습니다. 지금 미군정의 좌우 합작 지원을 내가 반갑게 받아들이는 제일 큰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우리 조선인이 민족을 사랑하고 평화를 아끼는 품성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품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서울 주민의 3분의 2가 굶주림을 걱정하고 있고, 3분의 1이 잠자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의 불안과 걱정에 몰린 사람들은 세상이 확 뒤집어지기를 바라며 극좌로 쫓아가기도 하고 몇 푼 돈에 팔려 극우 파쇼에 동원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각을 하고 정상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최소한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질서 유지는 미군정의 책임인데, 그 동안 미군정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해 왔습니다. 그 제일 큰 이유가 조선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이제 좌우 합작을 지원하고 나서는 것이 이제야 사정을 올바로 파악한 결과라고 봅니다. 좌우 합작은 조선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지만, 그를 위한 여건을 마련하는 데는 미군정의 역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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