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합작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중도파 정치인들에게는 당연히 민족 통일 전선이었다.
해방을 독립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민족의 화합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민족은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집합이므로 그 안에 불화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독립 건국의 과제 앞에서 불화의 요소를 가능한 한 억누르고 공유하는 이념부터 실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각자의 서로 다른 이념과 이해관계를 놓고 다투는 일은 건국 뒤로 미루자는 것이 중도파의 일반적 주장이었다.
해방 당일부터 중도파는 건준을 통한 통일 전선 결성 노력을 시작했다. 중도파의 의도는 건준으로 국내 기반을 만들어 귀국할 임정과 협조·보완 관계를 이룩하는 데 있었다. 극우와 극좌의 협공이 이 의도를 무산시켰다. "임정 절대 지지"를 명분으로 건준을 묵살한 것이 극우의 전략이었고, 건준을 장악해 임정과 경쟁할 인공을 세우는 것이 극좌의 전술이었다.
극우가 건준을 외면하고 극좌가 건준에 참여한 것이 겉으로 보면 반대되는 입장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중도파의 의도를 무산시키는 데는 양측의 입장이 겹쳐졌다. 극우가 건준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극좌가 건준을 장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극좌의 건준 장악은 극우의 건준 외면을 위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극우·극좌 간 공생 관계의 첫 단계였다.
극우파가 통일 전선을 회피한 동기는 명백하다. 친일파 처단을 피하고 식민지 시대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 국가' 건설을 꺼린 것이다. 민족 국가보다 외세에 의지하는 분단 국가를 그들은 원한 것이다. 그들의 동기는 이념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극좌파의 동기는 확연히 이해하기 힘들다. '극좌'의 사전적 개념대로 이념 편향성이 강한 것뿐이라면 통일 전선을 굳이 회피할 필요가 없다. 전술·전략 차원의 회피라면 일시적 회피는 가능하지만, 박헌영 일파와 같은 시종일관 회피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박헌영 중심의 극좌파가 이념적 의미에서의 극좌파가 아니라 현실 정치 속의 헤게모니 획득을 위한 정략 차원의 투쟁 노선으로 보는 관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입증하기가 참 어려운 관점이다. 실제로 그런 노선이었다면 정체를 감추기 위한 은폐와 분식의 노력이 많았을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입증이 완전치 않으면서 그런 '의혹'을 앞세운다는 것은 참혹한 박해를 받은 '패자'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관점을 배제할 수 없다. 박헌영 일당의 행동이 민족의 진로에 불리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철저히 검토할 필요를 패자에 대한 값싼 동정심 때문에 접어놓을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단정할 수는 없더라도 유력한 가능성으로 세워놓고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계속 비춰보려 한다.
박헌영에 대해서는 극단적 찬양에서 극단적 매도까지 많은 논평이 있어 왔다. 지금 시점에서 나는 <박헌영 노선 비판>(세계 펴냄)의 편저자 김남식과 심지연이 그 책 후기에 적은 비판 내용이 비교적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검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첫째, 1945년 9월에 출현한 조선공산당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일제하의 공산주의자들은 1928년 4차 조공의 와해를 끝으로 당 재건이라는 과제를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945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1945년 9월에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일제하의 당 조직 활동을 통해 축적된 운동 역량을 토대로 한 실천적 결과물은 아니었으며, 1945년 당이 일제하 조선공산당의 정통성 및 활동을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자의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 원래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제시하는 원칙에 따라 민주주의 중앙 집권제를 근본 원리로 하여 창건되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박헌영을 비롯한 당시의 당 지도부는 이러한 기본적인 조직 원칙을 끝내 무시한 채, 콤그룹이라는 자신의 파벌 중심으로 당을 이끌어 갔다. 이 점은 대다수의 당원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으며, 당원들로부터 당이 유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 둘째, 대중 정당으로의 전환에서 나타난 편파성의 문제이다. …) 당시의 사회 성격과 계급 관계로 볼 때 좌익계 정당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대중 정당으로 발전시키는 문제가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전략적 과제로서 주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이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여기에서는 공산당 지도부가 대중 정당에 대해 가졌던 인식의 오류, 콤그룹의 편파성 및 자신들에 의한 당 헤게모니의 장악이라는 몇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 셋째, 박헌영의 지도 노선이 낳은 극좌 모험주의적 전술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공산당은 원칙에 있어 무엇보다도 조직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조직의 확대·강화 문제를 가장 중요시한다. (…) 만약 당 조직의 파괴를 예상하면서도 당 지도부가 계속 모험주의적 폭력투쟁을 강요했다면 이는 가장 치명적인 과오를 범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혁명에서 모택동이 이립삼 노선을 비판하고 그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도 바로 그 같은 문제 때문이었다.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당의 조직을 보존하고 조직을 핵심으로 혁명 역량을 축적해 나아가지 않고, 무모한 모험주의적 투쟁만을 계속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직 투쟁을 위한 투쟁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 이러한 박헌영 노선의 좌경 모험주의적 오류는 그들의 혁명 이론과도 부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박헌영 노선 비판>, 537~540쪽)
민족 통일 전선의 기초가 될 이념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였다. 민족주의에 중점을 두는 것이 우익이었고, 민주주의에(형식적 민주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시정에 목표를 둔다는 의미) 중점을 두는 것이 좌익이었다. 중점을 둔다 뿐이지, 우익이 민주주의를, 좌익이 민족주의를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한민당 주류를 이룬 극우파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반민주-반민족 세력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 그렇다면 좌익 쪽에서는 한민당을 배제한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지향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었고, 실제 그 이름대로 민전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민전이 그 이름대로 폭넓은 통일 전선을 이루지 못한 사실에 있다. 공산당이 민전 장악력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폭넓은 연대를 가로막은 사실은 당시 공산당 유력 지도자 중 한 사람이던 조봉암의 편지에도 나타나 있었다(5월 10일자 일기). 공산당이 "3상 회의 절대 지지" 명분으로 중도 우파의 참여를 차단, 민전 장악을 손쉽게 했기 때문에 민전에 참여한 중도파 인사들은 공산당의 선전 전략에 이용당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서중석은 민전 조직 방법에 대해 이렇게 아쉬움을 표했다.
민전은 처음 준비위원회 구성에서나 준비위원회에서의 사무국 부서 결정에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 전평, 전농, 청총 등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 측 인사들이 배치되었었다. (…) 즉 북한의 지도적 조직과 함께 위와 같은 조직 또는 회의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였어야 할 일이었고, 이것은 좌익만이 가능했던 일로서, 민족 국가를 세우는 데에 실질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측 인사의 소수 참여 또는 명단 발표는 북한의 지도적 조직과의 관련 없이 남한 측이 임의로 '끼워 넣기'에 머문 감을 주었다. 이것은 조선공산당 간부 측의 종파적 헤게모니 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간주되어 오히려 북한의 지도적 조직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47~348쪽)
김남식과 심지연의 비판 중 당의 조직 방법에 대한 첫 번째 지적이 역시 제일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재건'된 지 근 1년이 지나도록 상향식 조직 방법의 아무런 시도도 없이 박헌영 '독재' 체제가 유지된 것은 그 동안 북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의 발전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지도력의 조그만 우위를 통해 공산당을 장악하고 공산당의 힘을 통해 민전을 장악한 것은 정치 공학적 책략일 뿐이지, 인민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길은 아니었다.
민전에 대한 박헌영과 공산당의 장악력이 좌우 합작 움직임 앞에 흔들리게 되었다. 민전 의장단은 박헌영, 여운형, 허헌, 김원봉, 백남운의 5인이었고, 박헌영과 허헌 외의 3인은 통일 전선을 지지하는 중도파였다. 중도파가 수적으로 우세한데도 공산당의 장악력이 지켜진 것은 중도파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군정의 지원 아래 우익 중도파가 손을 내밀자 상황이 달라졌다.
7월 10일 민전 의장단의 기자 회견에서는 이런 문답이 오갔다.
(문) 좌우 합작 공작과 입법기관과의 관계 여하?
(답) 양자는 완전히 별개 문제이다. 이에 대한 찬부는 조선 현실의 판단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며 입법기관 설치를 위하여 좌우 합작이 문제되는 것도 아니다.
(문) 입법기관에 관한 하지 중장의 성명에 대하여 견해 여하?
(답) 조선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이러한 기관의 설치를 고려하게 된 그 성의에 우리는 오직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의로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는 현재의 행정 사법기구의 구성 같은 것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처리 조건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니 우리가 이미 그 부적당함을 지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에 반대하는 것은 마치 통일을 방해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표현은 합작 공작과 입법기관 문제와를 혼동하여 현혹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 합작 공작은 개인 자격에서 표면화할 단계에 아직도 도달치 않았는가?
(답) 양방의 성의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여운형 씨와 김규식 박사와의 접근에서 더욱 광범하게 진전될 것이다. 옳은 원칙 밑에서 실천되어 나간다면 우리 민전은 이 공작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12일자)
민전 지도부는 좌우 합작에 호응하는 분위기로 돌아서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공산당 중앙위원 이주하가 기자들에게 밝힌 공산당의 입장은 훨씬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1) 좌우 합작에 있어서는 3대 원칙이 있다. 즉 첫째 친일파 파시스트를 제거할 것. 둘째 테러 중지와 민주주의자를 석방할 것. 셋째 삼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할 것 등이다. 만약 행동의 원칙을 승인하고 그 실천이 보장되면 우리 당은 기뻐 합작할 것이다.
1) 좌우 합작 문제와 입법기관과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좌우 합작 문제는 순 민족 내부 문제이며 입법기관은 대 군정 문제라고 생각되므로 이 두 가지는 별개 문제라고 본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11일자)
공산당은 아직도 "3상 회의 결정의 총체적 지지"라는 기준으로 우익의 좌우 합작 참여에 제약을 가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 합작 움직임은 대세가 되고 있었다. 7월 10일에 양측 대표가 발표되었다.
우익 :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 안재홍, 최동오.
좌익 : 여운형, 허헌, 정노식, 이강국, 성주식.
우익에서는 임정 요인이 3인으로(김규식, 김붕준, 최동오) 다수인데, 좌익에서는 박헌영 계열이 3인이라는(허헌, 정노식, 이강국) 점이 눈에 띈다. 합작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순조로운 진행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제부터 두고 보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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