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조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조선

[해방일기] 1946년 7월 15일

1946년 7월 15일

소련이 북한에서 공장 시설을 반출하고 있다는 증언이 몇몇 월남민의 입에서 나왔고, 이것이 1946년 3월 미소공위 출발점에서 큰 걸림돌이 되었다. (1946년 3월 18일자 일기)

미군 측은 이 의혹의 즉각 확인을 요구했고, 소련군 측은 근거 없는 의혹이라며 점령 지역의 관리 상황에 대한 개입을 거부했다. 그 후 이북 지역을 시찰한 미국의 배상특사가 7월 15일 기자 회견에서 그 의혹이 근거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지에 귀환한 미 대통령 배상특사 에드윈·포레는 신문 기자 회견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조선 시찰에서 느낀 바는 철벽같은 38도선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조선의 소련 점령군은 그들의 가족을 이 지구에 초래하고 있는데 이것만을 보더라도 소련인은 분명히 북조선에 정주하려는 것 같다. 현재 소련인은 북조선 전 공장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에게는 급료를 지불하고 있다 한다.

소련이 만주 지구에서는 시설품을 반출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반출치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주목되는 바이다. 이에 대하여 신문 기자로부터 그 이유는 "소련인이 북조선에 영주하려는 의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포레는 "그 결론은 제군이 추단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워싱턴15일 발 AP 합동]

(<동아일보> 1946년 7월 26일자)


근거도 없는 의혹이 왜 그렇게 그럴싸하게 떠돌았을까? 직접 원인은 소련군의 만주 지역 공장 시설 반출이었다. 그에 앞서 동부 독일 소련군 점령 지역의 공장 시설 반출이 있었다.

공장 시설 반출의 명분은 전쟁 배상이었다. 패전국에게 막대한 배상 책임이 부과되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한 패전국에게 현금 배상 능력은 빤한 것이었고, 공장 시설이 현물 배상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연합국들도 독일에서 공장 시설을 반출했다. 이 반출을 합리화하기 위해 독일을 농업 사회로 되돌려놓는다는 방침까지 정해졌다. (1945년 8월 4일자 일기)

일본 항복 때 연합군 사령부의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만주 지역의 공장 시설을 대거 반출했다. 소련군은 그 지역을 중국 국민당 정부에 반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은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을 10여 년간 키워놓은 곳이었다. 미국에 의존하는 장개석 정부에게 그 시설을 그대로 넘겨주는 것은 소련 자신에게 위협이 될 일이었다. 소련군의 만주 지역 공장 시설 반출에는 안보상의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인이 두고 간 재산을 몰수한 것은 전쟁 배상의 의미였다. 일본과 직접 교전이 없었던 조선의 경우에는 배상을 받는 쪽이 아니라 거꾸로 일본과 함께 배상 책임을 지는 쪽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1945년 말 한 때 떠돌기도 했다. 미국 배상대사 포레는 12월 10일 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맥아더 사령관의 고문으로 일본 배상 문제를 처리하러 유일(留日) 중인 포레 대사는 조선 내에 있는 일본 재산을 배상에 보충하겠다 하여 큰 충동을 주어 각계에서 이에 대한 반대 성명을 한 바 있었는데 10일 동 대사는 동경서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전언(前言)을 부정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고 군정청에서 발표하였다.

"12월 7일 일본 배상 문제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한 이래 그것이 조선에 여하한 영향을 미치겠느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다. 배상 사절단의 사명은 해방된 국가로부터 물자를 걷어 가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는 이전에 일본이 조선의 물적 인적 자원을 착취하기 위하여 설치한 일본인의 공장과 시설을 독립된 조선 경제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유리하게 수출시킬 방침을 세워야겠다는 것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언할 작정이다. 그리고 남북조선을 미소가 점령한 것은 잠정적이다. 연합국의 정책에 의하여 전 조선은 결국 단일체의 국가로 취급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권 단체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오 전 조선 국민의 전체적 이익을 위하는 의미에서 조선에 대한 배상으로써 일본 본토에 있는 시설을 조선에 전출하게 할 터인데 그 수송 할당 문제는 조선을 단일체 국가로 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 양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11일자)

중국의 배상 요구권은 조선과 달리 분명했다. 1945년 10월 29일자 <자유신문>에 전쟁 배상에 대한 중국 정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중국 최고국방회의서 결정한 대일 배상 계획 내용"

[重慶 26일 중앙사 발 동맹] 중국국방최고회의 비서처에서는 일본에서 15년간 매년 56톤의 금괴를 연합국에 지불할 조항을 포함한 6개조의 배상 계획안을 제출하였는데 배상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연합국에 지불하기 위하여 금후 15년간 연간 56톤의 금을 산출하라. 일본은 일본의 국립·사립 은행의 준비금, 외국위체(外國爲替) 급 외국에서 약탈한 금을 인도하라.
2. 금광업 건설을 연합국에 인도하라. 일본은 금후 15년간 동, 연, 아연, 알미늄 급 유황을 포함한 금광업의 생산을 정지하라.
3. 일본은 양호한 상태에 있는 전 공업을 즉시 연합국에게 인도하라.
4. 금후 15년간 일본은 석탄 산액의 8할을 인도하라.
5. 일본은 100톤 이상의 모든 선박을 연합국에 인도할 것. 또 모든 대형 기범선, 내연기관 부 어선, 기타의 선박을 인도하라. 일본의 전 통신 시설 인도를 요구한다.
6. 일본은 목재 생산액을 배가시켜 그 5할을 연합국에 인도하라. 일본 정부는 20만 인으로 된 봉사대를 조직하여 연합국에 제공하라.

그리고 비서처에서는 일본의 연합국에 대하여 지불할 배상의 처분에 관하여서는 중국이 우선권의 부여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시하였는데, 그 이유로 중국은 다른 연합국보다 오랫동안 싸웠으며 또 더 많은 손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연합국의 주요 국가 중 중국이 공업 방면으로 제일 뒤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부언하였다.

아무리 일본 놈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생산 시설을 다 내놓고 나서 해마다 금 56톤은 무슨 재주로 생산하란 말인가? 현실적인 기준 없이 피해의식과 적개심만으로 빚어낸 요구다. 명색이 4대 연합국의(프랑스까지 넣으면 5대 연합국) 일원이라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는 전후 세계 질서를 이끌어간다는 책임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유사 이래, 아니, 문명 발생 이전부터 약탈은 모든 투쟁과 전쟁의 중요한 동기였다. 국가의 제도화와 그에 따른 전쟁의 제도화로 인해 약탈도 제도화의 길을 걸은 결과가 '배상'이었다. 승리자가 패배자의 소유물을 빼앗아 오는 데 그치지 않고 패배자의 잠재적 생산력까지 예속시키는 정교한 방법이 '배상'의 이름으로 발전해 왔다.

약탈의 의미를 가진 전쟁 배상 제도는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이어져 왔다. 그런데 산업화 시대 전쟁의 파괴력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패배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도 저질러진 파괴를 보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에게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약속했다. 이 비현실적 수준의 배상금이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과 나치의 득세를 가져온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케인스는 대공황의 주요 원인의 하나로 이 배상금을 꼽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연합국 일각에서는 과도한 배상금이 독일과 세계 경제의 불안을 가져왔던 경험을 의식하며 배상 요구를 절제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결정은 분노와 복수욕이 넘치는 분위기에 지배당했다. 이 분위기를 되돌린 것이 냉전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이 현실을 지배하게 되면서 '자기 편' 패전국에 대한 태도가 완화되었다.

1953년 런던에서 체결된 독일 대외 부채 협약도 그런 완화 조치의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까지 포함한 독일의 배상금을 대폭 줄여주고 장기간 분할 상환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이 협약에 따른 독일의 배상금 지불은 2010년 10월 3일에 끝났다고 한다.

대형 전쟁 배상의 최근 사례로 1990~1991년의 걸프 전쟁을 들 수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배상 요구는 3500억 달러에 달했고, 이 문제 처리를 위해 유엔에 보상위원회(UNCC, United Nations Compensation Commission)가 설치되었다. 이라크 석유 수입의 30퍼센트를 배상에 충당하는 등 지불 방안을 마련했지만, 2010년 7월까지 지불된 배상금은 184억 달러로 전 요구액의 5.3퍼센트에 불과하다. ("war reparations", <Wikipedia>)

근대 세계에서 전쟁이 많아진 이유가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이 된 데 있었다고 설명한 일이 있다.

18세기까지 전쟁은 그리 수지맞는 사업이 아니었다. 근세 잉글랜드 경우를 보면 웬만한 전쟁에 경상 수지보다 더 큰 비용이 들었고, 전리품을 충분히 얻을 만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정권이 위기에 처하곤 했다. 전쟁 비용을 귀족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왕의 직할지를 떼어서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17세기부터 귀족 영주들 대신 상업 자본가가 전쟁 비용 담당의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다.

1756~63년의 7년 전쟁에 투자한 잉글랜드 자본가들은 엄청난 배당으로 거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겼을 경우의 이득이 졌을 경우의 손해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당사자 모두를 놓고 보면 제로섬이나 마이너스섬게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19세기 들어와서는 차츰 플러스섬게임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길 때의 이득이 질 때의 손해보다 훨씬 큰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타당하게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일이다. 대량 생산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은 자원 활용도가 낮은 상태에서 소비 촉진으로 경제 활성화의 길을 여는 케인스주의 정책 노선이 효과를 가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전쟁 수행을 위한 소비와 파괴 복구를 위한 수요가 생산력 증대를 촉구했고, 그에 따른 기술 발전으로 생산비 자체를 대폭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 287쪽)

19~20세기에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이 된 까닭은 산업 혁명으로 인해 자원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큰 전쟁을 잦게 유발하는 '원교근공책'이 선호되는 경향을 이렇게 설명한 일이 있다.

기원전 3세기의 중국, 그리고 19∼20세기의 세계에서 원교근공책이 위세를 떨친 데는 어떤 조건이 작용한 것이었을까? 플러스섬게임의 상황이었다는 공통점을 우선 들 수 있다. 새로운 기술 체계가 광대한 영역으로 퍼져나가는 단계였기 때문에 자원 공급이 무제한으로 보일 만큼 순조롭게 늘어나고 있었다. 늘어나는 자원의 적정한 소비를 위해서도 장기간의 대규모 전쟁이나 군비 확장이 바람직한 상황이었다.

원교근공의 세상은 매우 역동적이면서 위험한 세상이었다. 전체 시스템을 기준으로 보면 원교근공은 불합리하고 낭비가 많은 정책이다. 가까운 상대와의 싸움은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되기 쉽다. 팽창 중인 세계가 아니라면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정책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 328~329쪽)

산업 혁명 이래 자원 공급이 급격히 늘어나던 대 호황기는 20세기 들어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은 결코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걸프
전쟁에 이르기까지 거듭거듭 확인되어 왔다. 불과 몇 달에 걸친 걸프전쟁의 배상액이 이라크 같은 석유부국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이 배상액은 더구나 이라크 자신이 입은 피해를 넣지 않은 것인데도.

전쟁 배상의 규모가 비현실적으로 커지면서 배상의 우선권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걸프 전쟁의 경우 UNCC가 개인의 배상 요구 국가와 법인보다 우선권을 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만주에 있던 일본인 재산에 대해서는 소련과 중국의 우선권 주장이 서로 부딪쳤다. 일본 항복 전의 만주국 영역에 대해서는 중국의 절대적 우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소련은 만주의 시설을 서둘러 반출했던 것이다.

해방된 조선이 패전국(의 일부)으로서 전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시점에서 승리자의 패배자에 대한 태도는 가혹했다. 비록 전쟁에 참가해서 당당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로 인해 외세에 억눌리는 연약한 입장에 빠지기는 했지만, 전쟁 책임까지 뒤집어쓰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내선일체'를 외치며 전쟁 노력에 모든 것을 바치자고 악쓰던 친일파가 소수에 그쳤던 덕분이다. 친일파 중에서도 이런 '전범(戰犯)형' 친일파에게 비판을 집중할 필요를 느낀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