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 말 미국 국무부로부터 육군부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보낸 정책 지침이 몇 달 후 미군정의 좌우 합작 지원의 출발점이 된 것으로 서중석은 중시한다.
이 워싱턴으로부터의 특별 충고는 미군정이 "김구 일파와도 연결되지 않았으면서 소련의 조종을 받는 세력과도 연결되지 않은 그러한 지도자들을 남한에서 물색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라고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도자들이 루스벨트의 4대 자유를 강조하고, 근본적인 토지 및 재정의 개혁을 강조하는 내용의 진보적인 강령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공산주의 강령만이 가장 희망을 주고 있다고 믿는 군중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메시지는 김구 그룹의 망명자로서의 배경과 그들이 명백히 중국 국민당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국무성이 수년 동안 이승만과 접촉했을 때 가졌던 불만스러운 경험 때문에, 김구 및 이승만 일파에 대해 결코 어떠한 호의도 표시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이 특별 충고는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미소공동위원회 개막 직전 이승만은 민주의원 의장직을 물러나야 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394~395쪽)
1946년 6월 6일 국무부 차관보(점령 지구 담당) 힐드링이 육군성으로 보낸 정책 각서 역시 위 정책 지침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서중석은 보고 그 일부를 인용하면서 "한마디로 미군정은 극우 세력을 지지한 정책을 거두고 중간 노선의 정치인을 중심으로 정치적 자문회의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는 논평을 붙였다.
한국에 자치 독립 정부의 수립, 유엔 가입, 경제 건설, 교육의 강화는 미국의 기본적 대한정책이다. 한편 당면한 정책으로는 소련과의 협상에서 미국이 유리한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미국 정책에 대한 한국인의 적극적인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 미군정은 부득이 해방 후 귀국한 정치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정계 은퇴를 유도하고, 가급적 일본 통치 기간 중 한국에 남아 있던 사람 가운데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한국 정계에 태풍의 눈이며, 말썽의 근원인 몇몇 정객들을 임시로 정계에서 은퇴케 한다면, 미소 간에 원만한 합의를 모색하는 것은 물론, 남한 안의 각 정치세력을 매우 고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정계에 남아있다는 것은 소련과의 합의를 점점 어렵게 할 것이며, 소련이 반소적인 그들을 모스크바 결의에 따른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95~396쪽에서 재인용)
2월 말의 정책 지침도, 6월 초 힐드링의 정책 각서도 국무부 쪽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 정계 분위기가 국제주의에서 국가주의 쪽으로 옮겨가는 과정 중에도 국무부에는 국제주의 노선이 관성을 갖고 있었음을 이 문서들이 보여준다. 소련의 비토 대상인 극우파를 퇴진시키는 좌우 합작 지원 정책은 국제주의 노선이 뒷받침해 준 것이다.
정책 지침이나 정책 각서 형태로 나타나고 있던 국제주의 노선이 1946년 중반 시점에서 조선의 미군정 정책을 결정하는 강한 구속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를 비롯한 담당자들이 지난 연말의 격렬한 반탁 운동 이래 극우파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그 지도력과 군정에 협력할 전망에 한계를 느끼고 대안으로서 좌우 합작 카드를 꺼내 본 것이라고 이해된다.
1946년 여름 이후의 좌우 합작 노력에 대한 미군정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국제주의 노선에 입각한 것이었으나 국가주의 요소도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에 대한 극단적 탄압과 입법 기관 설치 의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정판사 사건은 앞으로 재판 진행을 따라가며 더 살펴보겠지만, 설령 전면적인 조작이 아니더라도 심한 침소봉대(針小棒大)였다는 인상이 우선 든다. 경찰보다도 군정청이 더 앞장섰다는 사실에서 공산당 탄압의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일이다.
좌우 합작을 지원한다면서 공산당에 대해 이런 탄압을 했다는 것이 좌익의 분화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고 흔히 해석하는데, 원론적 의미의 좌우 합작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안정성 있는 좌우 합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좌익의 분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기회를 줘야 했다. 미군정은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좌우 합작을 지원하면서도 반공을 위한 정치 공작의 자세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7월 1일자 일기에서 미군정의 입법 기관 설치 의도를 언급했다. 그때 인용했던 하지의 7월 9일자 성명서 내용 일부를 다시 옮겨놓는다.
나는 러취 장군이 제의한 조선 미군 점령 지대에 입법 기관을 설치하자는 안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받았다. 나는 군정장관과 차안에 관하여 토의하였는데 우리는 이 제안이 조선인을 위한 자주 독립 조선의 장래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조선 주민과 각 정당의 진정한 통일을 기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남조선 주민의 복리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는 바이다.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조선에 임시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조선에 대한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합법적 의무인 한 나는 이 제안이 조선인의 복리를 위한 것이며 또 입법 기관을 설치할 1계단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기관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의 1계단이라고 보지도 않을 것이며 또 볼 수도 없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10일자)
입법 기관 설치를 좌우 합작의 목적으로 명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보아 그 관계는 명백한 것이었다. 좌익뿐 아니라 중도파에서도 입법 기관 설치와 좌우 합작 사이에 직접 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견해가 쏟아져 나왔다.
입법 기관이건 뭐건 정치 기구를 현실적 필요를 넘어 만든다는 데는 분단 고착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통일을 바라는 세력에서는 모두 경계심을 품은 것이었다. 미군정은 모스크바 3상 회담 이전부터 소련과의 교섭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 전체, 또는 남반부를 포괄하는 정치 기구를 자기네 영향 아래 만들려고 거듭거듭 시도했다. 그 시도가 극우 세력 육성의 방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더욱 불신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하지의 위 성명서에서 입법 기관 설치가 러치 군정장관의 제안이라는 사실을 명시한 점이 눈길을 끈다. 서중석은 러치가 미군정에서도 극우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버치 중위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 같다고 했다(<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97~398쪽). 버치는 입법 기관 설치를 앞세우는 데 반대하고 있었고, 하지는 러치와 버치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원세훈이 합작 논의 시작을 처음 공개한 5월 28일 러치가 성명서를 낸 데도 좌우 합작을 견제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떠한 정치적 회합이 불일간 개최되리라고 하는데, 나는 이 회합에 모이는 각 단체가 이와 같은 회합에서 비법적 성명을 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성명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혼란에 대하여 절대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을 거듭 경고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5월 29일자)
입법 기관 문제보다도 더 예민한 것이 역시 신탁 통치 문제였다. 공산당에서는 미소공위 협의 대상 신청 때와 같이 좌우 합작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3상 회의 결정 지지를 전제조건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19일 한민당은 담화문에서 이를 비판했다.
"좌우 합작 문제에 관하여 조공에서 삼상 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를 원칙의 하나로 세우고 개인적 의사라고는 하나 인민당 신민당에서도 조공 제언을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합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민족 진영에서 탁치 반대를 주장해 온 것은 지금 새삼스러이 번복하자는 것도 아니요 오직 좌우 합작에 대한 타협점을 발견하기에 노력할 뿐인데 좌익에서 이것을 내세우고 대중으로 하여금 우익에서 이것을 찬성하고 합작하려는 것처럼 인상을 주는 선전을 하는 것은 합작을 방해하며 합작에 성의가 없는 것이다. 신중한 태도를 바란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20일자)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라는 말은 7월 10일 공산당 중앙위원 이주하의 기자 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테러 중지', '친일파, 파시스트 배제'와 함께 좌우 합작의 '3대 원칙'이라고 했다(<서울신문> 1946년 7월 11일자). 이 3대 원칙은 그에 앞서 7월 3일 박헌영의 서면 인터뷰를 이주하가 대신 발표하는 중에도 있던 것이었다. (<이정 박헌영 연대기>(임경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349~350쪽. 당시 박헌영은 모스크바 방문 중이었다.)
서중석은 이 '총체적 지지'란 말이 종래의 '전면 지지' 요구에서 완화된 표현이므로 우익과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406쪽). '절대 지지'보다 온건한 표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민당은 '총체적'이란 표현에도 반발하고 나서고 있다. 사실 '총체적'이란 말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부분적으로는 이의가 있어도 '전체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인지, 어느 부분도 빠짐없이 '전면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인지.
신탁 통치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의 핵심 내용이 아니다. 부수적 요소일 뿐이며 확정적인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극우에서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으니 3상 회의 결정을 전면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극좌에서는 그것까지 포함해서 3상 회의 결정을 전면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전체적으로는 지지하되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입장을 보류하겠다는 중도파를 양쪽에서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라고 몰아쳐 왔다.
중도파가 전면에 나서는 좌우 합작 단계에서 이런 좌우 협공이 계속될 것인가? 계속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극우파에 있었다는 사실은 '총체적'이란 애매한 단어를 서둘러 걸고넘어지는 한민당의 성명에서도, 그리고 이틀 전의 여운형 습격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공산당에서 '총체적'이란 말을 쓴 것은 어떤 의미일까? 좀 더 두고 봐야겠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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