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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안 파동'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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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안 파동'의 출발점

[해방일기] 1946년 7월 14일

1946년 7월 14일

7월 13일 군정청 문교부에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취지문을 발표했다.

1) 해방 이후 문교부의 첫 일은 우선 닫혔던 학교를 재개하는 일이었다. 국민학교를 열고 순차로 중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열었다. 이것은 일정 시대로부터 있어 온 학교가 완전하여서 보다도 백여 만 학생의 학업을 중단할 수 없어 임시 응급 조치로서 기설 학교를 그대로 열은 것이다.

2) 기설학교를 재개한 뒤 문교부는 조선 교육 제도와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교육 기관이란 것은 물건을 제조하여 내는 공장과 달리 이것을 그대로 접수하여 무비판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문교부는 부내 직원은 물론 널리 사회에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교육계와 저명한 인사를 초빙하여 교육심의회를 열어 교육 제도를 고치고 그 내용을 개선하기에 노력하여 왔다.

3) 문교부에서는 고등 교육 기관의 중요성에 감하여 교육심의회 이후에도 계속하여 수개월을 두고 신중히 전반적 검토와 연구를 하여 왔다. 이 동안에 문교부의 행동을 지도하는 유일한 원칙은 어떻게 하면 우리 고등 교육 기관이 우리 국가에 대하여 최대한 봉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문교부로서는 일정 시대로부터의 유물인 기존 고등 교육 기관을 그대로 존속시켜야 할 아무런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는 기존 고등 교육 기관은 일정 시대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속화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잔재요 우리 민족을 위한 교육 기관이 아닌 까닭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이상하는 신국가에 적합한 고등 교육 기관을 건설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4) 이러한 정신과 원칙 하에서 신중히 연구하여 본 결과 기존 고등 교육 기관을 그대로 두어 가지고는 도저히 우리의 목적하는 바 이상적 능률적 교육을 실시할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기설 일정 시대의 고등 교육 기관에는 일관한 교육적 안도 계획도 없이 조선의 진정한 복리를 무시하고 그때그때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만들어진 잡연한 산물에 불과한 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무용한 중복과 경쟁이 있어 국가의 재정을 남비한 흔적이 심하고 나아가서는 적은 독립한 기관들이 각기 소왕국을 형성하고 군웅할거하여 있어 피차 간에 아무런 연락도 협조도 없음을 알았다. 이상과 같은 불행한 현실을 발견한 문교부로서는 드디어 경성과 그 부근에 있는 관립 전문 대학을 전부 폐지하고 새 이념과 새 구상 아래 우리 국가의 전 학계를 대표할 만한 거대한 종합 대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신고등 교육 기관은 국립서울대학교라는 명칭으로 출발할 것이고 하기 9 대학과 1 대학원으로 조직된다.

문리과 대학 사범 대학 법과 대학 상과 대학 공과 대학 의과 대학 치과 대학 농과 대학 예술 대학 대학원

이상과 같이 재조직함으로써 현재 각 학교가 분립하여 수용할 수 있는 학생 수효보다 수배를 수용할 수 있는 동시에 그 교육적 질을 수 단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14일자)

6월 18일에 러치 군정장관과 오천석 문교부 차장이 '대학 통합설'을 부인했으나 이틀 뒤 문교부 당국이 통합설을 시인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46년 6월 22일자 일기) 그리고 이제 유억겸 문교부장이 나서서 국립대 설립 취지문을 발표한 것이다.

서울대학과(경성대학의 공식 명칭이 1945년 10월 16일 군정청 법령 15호에 의해 서울대학으로 바뀌었다) 경기도 내 9개 관립 전문 학교(경성치과전문만은 사립)를 합쳐 종합 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운영은 문교부의 부장, 차장, 고등교육국장(미군과 조선인 책임자 각 1인) 6명으로 조직될 이사회에 맡기고 그 아래에 총장 부총장 사무국을 둔다고 했다.

이것이 '국대안 파동'의 출발점이었다.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된 파동 기간 중 대상 학교들은 격렬한 좌우 대립의 현장이 되었고, 재학생 8040명 중 4956명이 제적당했으며 429명의 교수-강사 중 380명이 교단을 떠났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277~278쪽)

국대안에 대한 본격적 반발은 8월 22일 "국립서울대 설립에 관한 법령"의 공포 이후에 거세게 터져 나왔다. 그러나 7월 13일의 설립 취지문 발표 때부터 대상 학교의 교수와 학생 대다수는 군정청의 의도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취지문 안에 의혹을 부추기는 요소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방침이 교육심의회 이래 꾸준한 모색의 결과라는 문교부의 주장이 그때까지의 고등 교육 관계 조치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교육심의회는 1946년 2월부터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을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 국대안에 포함된 전문학교들도 대학 승격 절차를 밟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학교 통합은 서울대 의학부와 경성의전 사이의 문제만이 논란이 되고 있었다. 6월 18일까지도 군정청과 문교부는 국대안 방향의 통합설을 극력 부인하고 있었다. 의과 대학 통합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다가 뒤늦게 전면적 통합 방침이 떠오르고 서둘러 추진한 것이 분명했다.

문교부 간부들을 포함한 교육심의회의 인적 구성도 의혹을 부추기는 하나의 요인이었다. 조선교육심의회는 1945년 11월 14일 교육 제도와 정책의 심의를 위해 구성된 조직이었다.

군정청에서는 조선교육심의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제1회위원회가 14일 오후 2시부터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리었었다. 이날 학무국장 락카드 대위의 인사말이 있은 다음 협의로 들어가 아홉 분과위원회를 두고 각 분과회에는 전문적 지도자가 있어 금후에 새로운 조선 교육 건설에 힘쓰기로 되었는데 그 분과회와 위원은 다음과 같다.

교육이념위원 : 安在鴻 鄭寅普 河敬德 金活蘭 白樂濬 키퍼 大尉 洪鼎植
교육제도위원 : 金俊淵 金元圭 李勳求 李寅基 兪億兼 에렛 少佐 吳天錫
교육행정위원 : 崔斗善 崔奎東 玄相允 李卯黙 白南薰 그랜드 大尉 司空桓
초등교육위원 : 李活盛 李揆百 李康元 李克魯 파라 大尉 李承寄 鄭錫鳳
중등교육위원 : 趙東植 高鳳京 宋鎭夏 徐元出 비스코 中尉 李興鍾
직업교육위원 : 張勉 趙伯顯 鄭文基 李奎載 朴璋烈 로즈 大尉 李敬善
고등교육위원 : 趙炳玉 白南雲 兪鎭午 尹日善 크로프스 少佐 金性洙 朴鍾鴻
사범교육위원 : 張德秀 張利旭 金愛麻 愼驥範 孫貞圭 파리 大尉 許鉉
교과서위원 : 趙鎭滿 趙潤濟 金性達 皮千得 黃信德 월취 中尉 崔鉉培

(<중앙신문> 1945년 11월 16일자)

조선인 위원 51명의(위 명단의 53명 중 유억겸 부장과 오천석 차장을 제외한 듯) 수학 배경을 전우용은 이렇게 분석했다.

위원 중 미국 유학생 출신은 10명, 일본에 유학한 사람이 17명, 유럽, 중국에 유학한 사람이 2명이었다. 일본 유학 출신자의 반 이상이 도쿄제국대학과 와세다대학을 나왔다. 미국 유학 출신자의 40퍼센트는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은 3인이었는데, 그중 둘은 기독교계 학교인 세브란스의전과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연전과 이화여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거나 이들 학교에 재직한 사람은 10명이었다. 일제하 '관립 우위'의 원칙 아래 구축되었던 식민지 교육의 위계는 이 위원회에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서울대학과 관립 전문학교 교직원, 학생들이 이 심의회에 의혼의 논길을 보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현대인의 탄생>(전우용 지음, 이순 펴냄), 149~150쪽)

전우용은 군정청의 문교와 의료 분야 정책 개발과 집행에 세브란스 등 선교학교 출신들이 중용된 사실을 민감하게 포착한다. 이것은 두 방향으로 의미를 가진 사실이다. 한쪽으로는 군정 당국자들이 미국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한 '통역 정치' 풍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한쪽으로는 식민지 시대 학술-교육계의 권위주의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탄생>, 142~166쪽)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통념에 따르면 이에 대한 군정청의 도전이 좋은 정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학술과 교육은 '권위'를 필요로 하는 분야다. 기존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무엇으로 대치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우용은 자체 질서를 가진 학계와 교육계가 미군정에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은 데 문제의 발단이 있다고 본다.

군정청은 대학과 전문학교, 중학교와 소학교 교사 인선 과정에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1945년 겨울과 이듬해 봄, 학생들이 스트라이크로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을 때, 군정청은 새삼스럽게 교수와 교사들의 정치적 성향을 조사했고 각급 학교에 좌익이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을 뿐 아니라, 일부 학교는 아예 '좌익의 소굴'이 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태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미 자리 잡은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군정청은 '일제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라는 대중의 요구를 우군으로 삼아 교육 제도 전반을 미국식으로 개편하고 학원 내의 좌익을 제거하려 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은 주로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대개 교육계의 '외곽'에 있었다. 교육계와 학계의 '중심'에 있던 한국인들은 이들을 쉽게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일제하 교육계와 학계에 잠류(潛流)하던 일본계와 미국계의 헤게모니 다툼이 공공연해졌다. (<현대인의 탄생>, 147~148쪽)

국대안이 가장 널리 반발을 불러일으킨 문제는 이사회 제도였다. 교수단이 갖고 있던 운영권을 이사회로('참의원회'라는 이름이었다) 넘기는 방침은 지난 2월에 결정되어 있던 것인데 이것이 통합될 서울대학에 처음으로 적용되게 되었고, 또 서울대 이사회를 미군과 조선인 3인씩의 군정청 관리들로 구성한다는 방침이 나온 것이었다.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대다수 교수와 학생들도 미군정의 학교 '접수' 정책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합 대학 설치 방침도, 식민지 시대 권위주의의 척결도 모두 바람직한 정책 방향이었다. 그러나 좋은 방향이라도, 제대로 성과를 내기 위한 충분한 주의와 노력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폭넓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국대안에 반발한 사람들이 품었던 의혹, 군정청이 소수 친미파를 앞세워 조선의 학술-교육계를 장악하려 한다는 의혹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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