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오후 2시에 효창공원에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3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한민당, 공산당, 한독당, 민전, 독촉국민회, 전평 등 주요 정당, 단체들이 좌우 구별 없이 참가한 이 국민장에 5만여 군중이 참례했다고 한다. 이 날 조성된 삼의사묘가 효창원 독립운동가 묘역의 출발점이 되었다.
3의사 유해는 해방 후 일본에서 결성된 민족주의 단체 신조선건설동맹이 일본 각지의 형무소 묘지에서 수습해 5월 15일에 국내로 봉환한 것이었다. 4월 하순에 유품을 먼저 가져온 이 단체 관계자들은 유해 수습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재일 동포는 220만 있었는데 해방 후 귀국한 게 약 백만이요 현재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조국의 정세를 염려하고 있는 게 120만 명가량 된다. 이 사람들의 생활은 매일 2홉 1작의 배급을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나 일본 전체에 배급미가 쌀 부족으로 5월말 경에는 배급이 없을 것으로 대단 걱정이다.
더구나 우리 동포의 실직자가 반 수 이상이나 되어서 하루빨리 조국이 완전 독립하여 귀국 후 건국 대업에 참가할 날을 목이 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그래 이 사람들을 참된 노선으로 지도하려고 조직된 것이 신조선건설동맹인데 이 동맹은 22년 만에 私田 형무소를 출옥한 朴烈을 중심으로 민족 단결 생활 안정 등 여러 가지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우선 전기 3의사의 유골과 유품을 눈물로 찾은 이야기를 하자.
우리는 제 일착수로 윤봉길 의사의 유골을 찾아 金澤으로 갔다. 그러나 공동묘지라 알 수가 없어 며칠을 묵고 부근 왜놈들이 입을 합하여 모르겠다고 가르쳐주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그러면 이 부락의 묘를 전부 파보겠다"로 말하였더니, 놀랐는지 우리가 자고 있는 밤중에 패를 꽂아 가르쳐주기에 기쁨에 넘쳐 우리는 한숨에 파본 즉, 목제 십자가와 자색 양복 검정 구두 중절모자와 유골을 발견하였다.
고 이봉창 의사는 浦和 형무소 묘지에 계신 것을 알고 사법대신을 만나 이야기하고 포화형무소에 가서 물은즉 소장은 모른다고 회피한다. 그러면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고 강경하게 나섰더니 교무관을 불러 가르쳐주도록 하여 겨우 모시게 되었고,
다시 長崎로 白貞基 의사를 찾은 우리는 그 곳 형무소장의 독장(獨葬)이 아니고 딴 시체와 합장을 한 것 같다는 말에 놀랐다. 분개한 우리는 한 나라의 열사를 이름 모를 추한 딴 시체와 합장을 하는 모욕이 어느 나라에 있느냐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피를 억지로 참고 반문한 즉, 우리의 기세에 놀랐는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매장 장부를 조사하더니 '독장입니다. 장소도 알겠소.' 하고 사과하며 가르쳐주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옥사하신 백 의사의 유골을 李 尹 양 의사와 같이 동경 陸大 우리 본부사무소에 모시고 지난 2월 19일 神田 공립강당에서 유골봉환회를 거행하고 요번 귀국에는 우선 윤의사의 유품, 양복, 모자, 구두 당시 윤 의사의 사건을 기재한 신문의 복사진만을 모시고 왔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27일)
그런데 5월 15일에 봉환된 유골은 3의사의 것만이 아니었다.
광복 해방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적지에 유골을 묻고 있던 윤봉길·이봉창·백정기·김청광(金淸光)·김석영(金錫永)·홍성주(洪性周)·박상조(朴尙祚) 등 7의사의 영령은 15일 상오 9시에 해방된 조국에 첫발을 들여 놓았는데 무언의 개선을 한 영령은 부산항에 도착하자 대창정 남선고녀에 봉안되었다. (<중앙신문> 1946년 5월 16일자)
3의사 외의 4인은 누구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보이지 않는 이름들이다. 일본 형무소 묘지에서 3의사의 유해를 찾는 과정에서 수습된 조선인들의 유해가 아닐지?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한 사람들일 것 같은데, 어떤 죄목으로 수감된 것인지 확인되어 있지 않다. 당시 '7의사'의 이름으로 유해가 봉환된 인물들인 만큼 일본 재판 기록을 통해 실상이 밝혀지기 바란다.
1932년 1월에 도쿄에서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1900~1932년), 4월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요인들에게 폭탄을 던졌던 윤봉길(1908~1932년)에 비해 백정기(1896~1934년)는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윤봉길의 거사에 동참하려다가 입장권을 못 구해 실패하고 이듬해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암살 계획을 추진 중 체포되었다.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이듬해 옥사했다. 세 사람 모두 김구의 지도와 지원을 받아 테러 항쟁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유해 봉환에 앞장선 신조선건설동맹은 후에 재일조선인거류민단으로 재편되었는데, 그 지도자들도 테러 항쟁 투사들이었다. 위원장 박열(朴烈, 1902~1974년)은 아나키즘 운동가로 천황 암살 계획을 추진하다가 1923년 체포되어 무기수로 22년간 복역하고 해방 후 출옥했다. 부위원장 이강훈(李康勳, 1903~2003년)은 백정기와 함께 체포되어 15년형을 언도받고 12년 복역한 후 해방 후 출옥했다.
항일 투사 추모는 민족의식 고양을 위한 중요한 정치 사업이었다. 그 동안 가장 큰 추모 행사로 1945년 12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순국선열추념대회가 있었는데, 임정 인사들이 중심이 된 대회로, 실질적으로 임정 귀환식의 의미를 가진 행사였다. 민영환, 이준, 박승환, 안중근, 손병희, 강우규, 윤봉길 등을 함께 추모했던 이 대회에 비하면 7월 7일 효창원 행사는 추모 범위가 좁은 것인데도 더 성대하게 치러졌다. 6월 30일로 예정된(폭우 때문에 7월 7일로 연기되었다.) 국민장을 앞두고 주최 측은 이런 방침을 발표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해는 시내 수송정 태고사에 안치되어 있는데 3열사봉장위원회에서는 전 국민의 애도를 모아 30일에 국민장을 집행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일반 국민은 이 날을 기하여 다음의 주의 사항을 실행해야 한다.
1) 3열사 국민장일인 30일은 가가호호에 조기를 달 것
2) 애도의 뜻을 표하며 자숙하는 성의에서 보통 음식점을 제하고 그 외 일체 환락장은 휴무할 것
3) 30일 장의일을 기하여 각 지방에서는 지방마다(군·읍·면) 추도식을 거행하되 서울은 29일에 시행할 것
4) 국민장이니만치 국민 각자의 성의에 의하여 능력껏 부의금을 제출하도록 권장할 것
5) 추도식 절차는 지방 형편에 의하여 적당히 할 것
6) 3열사 약력은 인쇄 중이므로 인쇄 되는 대로 즉송하기로 함
(<동아일보> 1946년 6월 20일자)
이 국민장에서 공산당, 민전, 전평 등 좌익 정당과 단체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요인 암살은 좌익보다 우익에서 많이 채용한 투쟁 방법이었다. 3의사 모두 김구와 연계된 인물들이었으므로 3의사 추모는 특히 김구의 정치적 권위를 높여주는 행사였다.
그런데 이 행사에 좌익이 대거 참여한 데서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3·1절 기념식을 준비하던 2월에는 민주의원과 민전의 발족으로 좌우 대립이 극심할 때였기 때문에 기념식을 양쪽에서 따로 열어야 했다. 4개월이 지난 지금 '우익의 잔치'라고도 할 수 있는 3의사 국민장에 좌익이 참여한 것은 음미할 만한 일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