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 5일
1953년 3월 21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이 체포되었다. 이승엽 등 관련 인물들은 그 해 7월에 기소되었는데, 수괴로 지목된 박헌영은 1955년 12월에야 기소되었다. 죄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 행위"였다. 기소장에 기록된 그의 '진술' 가운데 간첩 행위와 관련하여 이런 대목이 있다.
1945년 11월 초순에 나는 남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를 서울 반도호텔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사무실에는 하지와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나하고 간첩 연계를 맺고 있던 언더우드가 있었습니다. 이때 하지와 언더우드는 나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자기의 사령관인 하지에게 향하여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1939년 10월부터 알게 되었는데 그때에 이미 친미적으로 나아가겠다고 언약한 바 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지도 나에게 대하여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의 활동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석상에서 정식으로 하지의 간첩으로 될 것을 약속하고 난 다음 하지에게 다음과 같은 과업을 수행할 데 대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즉 하지는 나에게 앞으로 "당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남조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튼튼히 하기에 노력할 것이며 북조선 지역 공산당 조직 내부에 당신의 세력을 적극 부식시킬 것, 공산당 내에서의 일체 활동에 대하여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사전에 알려줄 것이며 공산당 내에서 호상 분열 사상을 조성시킬 것, 우리와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공산당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타협적으로 나아가도록 지도하며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조선 사람은 일본 시대에 비합법적 투쟁과 폭동 파업 등의 방법으로 나아가서 분쟁을 많이 일으켰는데 미국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렇게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그렇게 하겠노라고 언약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는 나에게 앞으로 자기는 나와 더 만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알아달라고 말하기에 나도 좋다고 대답하고 나의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비밀에 붙여 주기 바란다고 제의하니 그는 그에 대하여서는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밀 회견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으며 통역은 언더우드가 직접 하였습니다. (<박헌영 노선 비판>(김남식·심지연 편저, 두리 펴냄), 463~464쪽에서 재인용)
여기 나오는 언더우드는 원두우-원한경-원일한 3대(代) 선교사의 중간인 원한경(元漢慶, 1890~1951년)이다. 1930년대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고 미일 전쟁 발발로 쫓겨 갔다가 군정청 고문으로 임명받아 1945년 10월 26일 조선에 돌아왔다.
박헌영의 재판은 권력 투쟁의 산물이므로 공정한 재판일 수 없는 것이었고, 그의 혐의나 '진술'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을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1945년 11월 초의 만남도 그 자체가 조작된 것일 리는 없고 실제로 있었던 비밀 회동의 내용을 어느 정도 윤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기소장에는 박헌영이 1939년 10월 "당시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으며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보기관의 노련한 탐정인 언더우드"와 연계를 맺고 미국의 고용 간첩으로 전락되었다고 했다. 출옥 직후의 박헌영이 항일 운동에 동정적이던 언더우드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군정청 고문 취임 직후 공산당 총비서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회동을 주선한다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펴냄) 225~227쪽, 239~240쪽에 따르면 박헌영과 하지의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은 1945년 10월 27일과 11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기소장에서 말한 11월 초순의 모임이 10월 27일의 모임을 가리킨 것 같지는 않다. 언더우드가 바로 그 전날 입국했는데, 그렇게 빨리 움직였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첫 만남이 큰 성과 없이 끝난 것을 언더우드가 나중에 알고 보완을 위한 비밀 회동을 주선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자리에서 간첩 고용 계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주장하는 기소장 내용은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비밀 회동이라면 뭔가 비밀 거래는 있었음직한 일이다. 군정청과 공산당 사이의 거래가 아니라 그 관리자인 하지와 박헌영 사이의 거래가 가능했다. 두 조직의 관리권(executive power)을 가진 두 사람 사이의 양해 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을 줄 수 있었다. 정보의 공유만 하더라도 관리자의 역할에 크게 보탬이 되는 것이었고, 행동의 조율을 통해서는 더 큰 이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박헌영이 공산당에서 강한 지도력을 유지하는 데는 하지와의 비선(秘線)도 한 몫을 맡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기소장의 주장처럼 공산당을 팔아먹는 짓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름대로는 당을 위한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비밀 거래는 편의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자신의 이익이 곧 당의 이익이라는 믿음을 가지면 당의 이익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기 쉽다는 말이다.
김남식과 심지연은 1946년 9월 6일의 체포령(박헌영 등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을 계기로 박헌영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전반부의 '우의적 친선 방향'에서 후반부의 '적대적 대립 방향'으로 옮겨간다고 본다.
미국과 미군정에 대해 박헌영은 일관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도에 정반대로 태도를 바꾸어 많은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즉 46년 9월 체포령을 계기로 그의 견해는 우의적 친선 방향에서 적대적 대립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체포령을 내린 군정 당국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 나온 조치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호칭하는 등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이론 무장에 미흡해 "객관세계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공산주의적 관점과 시각에서 일탈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박헌영 노선 비판>, 76쪽)
1946년 봄까지 박헌영과 공산당이 미국과 미군정에 대한 직접 공격을 삼가고 미군정의 조선인 관리들과 경찰이 미군정의 노선을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미군정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전술적 고려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미군정의 이미 드러난 의도에 대해서까지 너무 눈을 감은 느낌이 든다.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가 공산당의 활동 노선 설정에까지 지장을 준 것으로 많은 비난을 모았다. 박헌영이 진짜 간첩 노릇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미군정과 비밀 관계를 갖고 있었으리라는 의심을 일으키는 점이다.
공산당과 미군정 사이의 관계는 5월 초순 미소공위 정회와 함께 결정적인 악화의 길에 들어섰다. 5월 6일 정판사 사건 수사가 벌어졌고 이튿날 미군 방첩대(CIC)가 조봉암의 편지를 공개했다. 미군정이 좌우 합작 지원 방침을 결정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미군정이 원하는 방향으로 좌우 합작을 진행시키기 위해 공산당이 좌익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황을 깨뜨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되었던 공산당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 이관술이 7월 6일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건 처리가 빨라져 7월 9일에 이관술을 제외한 12인이 검찰로 송국되었고, 7월 19일 9인이 기소되었다. 김용린 검사장은 '사건 전모'를 이렇게 발표했다.
1) 조선정판사 사건 관계자 급 범죄 사실
조선정판사 사장(조선공산당원) 박락종 동 서무과장(조선공산당원) 송언필 동 인쇄주임(조선공산당원) 신광범 동 창고주임(조선공산당원) 박상근 동 평판과장(조선공산당원) 김창선 동 평판부과장(조선공산당원) 정명환 동 인쇄직공(조선공산당원) 김상선 동(조선공산당원) 김우용 동(조선공산당원) 홍계훈
상 박락종 송언필 신광범은 작년 9월에 부내 장곡천정 74번지 근택삘딩을 접수하여 동소에서 경영하던 근택인쇄소를 조선정판사라 개칭하고 인쇄업을 경영하였는데 김창선 외 수명은 일정 시대 근택인쇄소 직공 재직 시 관헌의 명령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한 사실이 있고 또 동 인쇄원판을 절취 소지함을 기화로 하여 상 전원이 공모하여 공산당비 급 정판사 경영비에 사용하기 위하여 작년 10월 하순부터 금년 2월 상순까지 수회에 긍하여 상 정판사 내에서 조선은행권 100원 권 1200만 원을 위조하여 조선공산당본부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교부 사용케 하여서 경제를 교란케 (…)
(<동아일보> 1946년 7월 20일자)
용의자들이 검찰로 송국된 직후 7월 11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공산당의 혐의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맹렬히 규탄했다. 그러나 이 사설의 마지막 문단을 보며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뒷골이 당기기는 당긴 모양이다.
"지금까지에 알려진 내용은 경찰의 활동에 의한 군정 당국의 발표를 중심으로 한 사실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이상의 논단을 내리기에는 충분한 재료가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못 일부의 □□ 추측과 같이 사건이 어떠한 정치적 작위 하에서 경찰이 강작하였거나 위작한 사실이 판명된다 할진대 우리는 경찰을 과신한 우리의 불명과 군정 당국의 발표에 의거한 우리의 불찰을 천하에 사죄하는 동시에 그 사건의 중추를 해부하여 이 붓이 꺾일 때까지 규명할 것을 엄숙히 공약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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