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사건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 25일 대구에서 열린 미군의 피난민대책회의에는 "만약 피난민들이 미군 방어선의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경고사격을 하되, 이를 무시하고 남하를 강행할 경우 (피난민들은) 총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한미 양국이 결정했다.
이 자리에는 미군과 미국 정부 관계자 뿐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 당국자들도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동안에는 직책만 알려졌었다.
그러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노근리대책위) 등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사건 대책위원회 대표들이 20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 대책회의에는 김갑수 당시 내무부 차관, 이계무 내무부 비서실장, 최창순 사회부 차관, 김태선 경찰국장이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난민대책회의 이후 미군은 피난민 및 일반 민간인에 대해 보다 공세적인 정책을 취하게 됐고 노근리 사건을 필두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이 결정에서 비롯됐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피난민 발포 결정 회의 기록 공개
노근리 대책위, 곡계굴 사건 대책위원회, 둔포 미군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 송골해변 미군양민학살 대책위원회 등의 대표들은 이날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은 내용을 담은 미공개 문서들을 공개했다.
이 문서들은 지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벌어진 한국과 미국의 조사 과정에서 미국 정부로부터 우리 정부에게 넘겨졌고, 이를 한국 정부 조사반이 번역한 것이다. 조사반의 일원이었던 익명의 제보자가 노근리대책위 측에 전달함으로써 이날 공개된 것이다.
특히 이 문서들은 <AP> 통신에 의해 지난해 4월 공개된 '무초 서한'이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무초 서한은 피난민에 대한 총격을 결정했다는 등 피난민대책회의의 내용을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회의 다음날인 7월 26일 미 국무부의 딘 러스크 차관보에게 보낸 비밀 서한이다.
이날 공개된 문서에는 무초 서한의 핵심인 '양민 발포 허용'과 관련된 명시적 문구는 없다. 하지만 정구도 노근리대책위 부위원장은 "군인들이 기록한 문서인 만큼 민간인에 대한 발포 등 민감한 내용은 제외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무초 서한이 이날 회의 내용을 본국에 보고한 것이니 회의에서 그런 내용이 충분히 논의되고 결정됐음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피난민에 대한 발포를 허용한 사실은 지난 13일 <AP> 통신의 보도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기도 했다.
무초 서한이 공개된 이후 노근리대책위는 미 국방부가 1999~2001년 조사 당시 노근리 사건이 일선 병사들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결론에 끼워 맞추기 위해 무초 서한을 고의적으로 누락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한국 정부의 확인 요청에 대해 진상조사 당시 무초 서한을 검토했으나 그 내용은 승인된 정책이나 일선 부대에 전달된 정책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우리 정부도 미국 측의 해명이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더이상 문제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노근리대책위는 무초 서한이 피난민 대책회의의 '결정'을 담은 것으로 노근리 사건이 상부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이를 무시하는 것은 사건을 축소·왜곡하려는 의도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대책위는 또 이같은 증거에 대한 미국의 해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비난해 왔다.
실제로 무초 서한에는 "아군은 이런 위협을 차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혹은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어 피난민에 대한 발포가 상부 차원에서 '승인되고 결정된' 사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쟁 시기 양민학살에 한미 양국 정부 차원에서 협조했다"
대책위는 또 워커 당시 미8군 사령관이 신성모 국무총리에게 피난민대책회의의 내용을 통보한 서한도 함께 공개했다. 워커 사령관은 "이날 회의에 참석한 요원들은 다음에서 개요한 계획을 만장일치로 합의했다"고 설명하고 있어 미군의 양민학살이 양국 정부 차원에서 논의된 것임을 보여줬다.
노근리 학살 사건을 맡아 온 마이클 최 변호사는 이에 대해 "한미 양국이 민간인 학살을 정부 차원에서 협조했던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것"이라며 "이번 계기로 한미 양국이 의회 차원에서 재조사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들은 "당시 양국의 결정은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민 통제 정책과 그 집행방법을 상세하고 기술하고 있다"며 "이는 단순히 노근리 학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전쟁 기간 벌어졌던 모든 양민학살 사건의 배경이 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노근리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재차 요구하는 한편, 지난 13일 <AP>통신에 의해 또다시 밝혀진 경북 포항 송골해변 사건, 경북 예천 산성마을 사건 등 60여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양국 정부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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