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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노근리학살의 '상부명령' 정말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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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노근리학살의 '상부명령' 정말 몰랐나?

'무초 서한' 공개 후 불거진 한국 정부 관련 3대 의문점

노근리 양민학살이 이 '상부의 명령'에 의해 자행됐음을 입증하는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서신이 확인되면서 '우발적 사고'라는 지난 2001년 한미 공동조사의 결론은 축소·은폐된 것임이 드러났다.

이런 가운데 공동조사 당시 한국 정부가 '상부 명령' 자체와 그를 명시한 무초 서한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는지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다.

# 쟁점 1. 한국 정부, 무초 서한의 존재 정말 몰랐을까?
▲ 지난달 29일 의 보도로 알려진 존 무초 당시 주한 미 대사의 서한. ⓒ 프레시안

<AP> 통신에 의해 무초 당시 대사의 서한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불거지자 정부는 지난달 31일 "미국측에 서한이 실제 존재하는지에 대해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고 밝혀 우리 정부는 무초 서한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무초 전 대사의 서한은 2001년 조사 당시 미 국방부가 검토한 마이크로 필름 목록에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측 최종 보고서에는 언급되지 않아 미 국방부가 의도적으로 뺀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외교통상부 북미국 조병제 심의관은 지난 1일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박에스더입니다'에 출연해 서한이 '문서철 목록'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당시 우리 정부가 몰랐냐는 질문에 "당시 조사했던 문건이 100만 건이 넘는 워낙 방대한 분량이어서 우리 손으로 일일이 다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조사가 한미 공동의 작업이 아니라 각 정부가 따로 관련 자료들을 검토한 사실상의 양국 정부의 개별적 조사였음을 감안하더라도 미국 정부의 조사 목록에 있었던 서한의 존재를 우리 조사단이 몰랐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 서한이 사건 발생 당시의 주한 미 대사가 본국에 보낸 것이라는 점에서 목록을 넘겨받았다면 반드시 검토했어야 할 중요한 문서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 쟁점 2. 보고서에 7월 25일 회의 언급…"그런데 '명령에 의한 학살' 몰랐다?"

조병제 심의관은 미 국방부의 조사 목록을 우리 정부 조사단이 넘겨받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목록을 넘겨받았지만 이 내용을 직접 파악하지 못해 몰랐다는 거냐'는 질문에 "보고서를 직접 보셨으면 알겠지만 보고서에 7월 25일의 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는 나온다"고 대답했다.

조 심의관이 언급한 7월 25일의 회의란 무초 서한에 언급된 "주민들의 남쪽으로의 이동을 금지하며 만일 난민들이 미군 방어선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그들은 경고 사격을 받을 것이며 그래도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당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린 바로 그 회의다.

조 심의관이 밝힌 대로 2001년 발표된 '노근리 사건 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이 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노근리 학살 하루 전인 7월 25일 저녁 6시 대구의 임시 정부청사에서 이뤄진 것으로 기록된 이 회의의 참석자는 주한 미대사관 1등 서기관 해럴드 노블, 유엔 한국 정부 복지담당 고문관, 한국 내무부 차관 및 국장, 한국 경찰국장, 한국 사회부 차관, 미 제8군 헌병, 방첩대(CIC), 미 제8군 인사참모와 정보참모라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측 참석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무초 대사의 서한보다 더 자세한 셈이다.

그러나 당시 조사 보고서에는 무초 대사의 서한에 나온 것과 같은 '총격을 당할 것'이라는 구체적 표현은 없고 "어떠한 경우라도 방어선을 넘는 피난민의 이동은 허용되어서는 안 됨. 모든 한국인의 집단적 이동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킬 것"이라는 내용이 미 제8군에 의해 각 사단에 전문으로 내려졌다고 밝혔다.

이 전문은 7월 26일 오전 10시 부로 내려졌으며 "즉각 효력을 발생한다"고 쓰여져 있다. 노근리에서 최초의 민간인에 대한 항공기 공중 폭격 및 기총소사가 일어났던 것은 같은 날 정오경이다.

이같은 조사 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보면, 한국 정부도 조사 당시 무초 서한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 서한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즉 '노근리 사건은 상부 명령에 의해 이뤄진 학살'이라는 점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백 번 양보해서 미국은 의도적으로 미국에 불리한 증언과 기록을 무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7월 25일 회의의 결론은 물론이고 당시 참전군인들의 여러 증언과 관련 기록을 다 확보했다는 우리 조사단이 '상부의 명령' 대목을 밝혀내지 못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쟁점 3. 미국의 축소·은폐 시도, 우리 정부는 알면서도 손 들어줬나?
▲ 노근리 사건에 대한 한미 양국의 조사는 5년 전 종결됐지만 여전히 의혹은 남는다. ⓒ 연합뉴스

'상부 명령'과 무초 서한의 존재를 알았는지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미국이 조사 결과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우리 정부가 과연 알고 있었는지도 중요한 쟁점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측과의 협상과 진상 조사를 총괄했던 우리 정부 실무대책반장은 미국의 그같은 시도를 당시 우리 정부가 인지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

한미 합동조사 당시 국무조정실 외교안보심의관으로 노근리사건 실무대책반장이었던 오영호 현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은 지난 2002년 국방대학교 안보과정 논문 '노근리사건 조사 및 교섭결과 분석'에서 "미국 내에는 노근리 사건의 존재 사실은 인정하되 우발적인 사고로 몰고 가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도 미국의 고의적 축소·은폐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미국측의 이같은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겁에 질린 병사들이 지휘관의 명령 없이 피난민들에게 발포한 "불행한 비극"으로 "비계획적 살상"이었다는 미국의 주장의 손을 들어줬고 이같은 내용의 한미 공동 발표문에 동의했다.

결국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한국 정부가 '상부 명령'과 무초 서한의 존재 여부, 그리고 진상을 축소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게 당시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전문가들과 피해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미국과 한국이 정확한 진상을 조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2001년 조사 당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굴욕적인 협상 태도에 대한 조사도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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