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25일 미8군 사령부가 미군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는 방침을 세웠고 바로 그 다음날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400여 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 일어났다는 <AP> 통신의 29일자 보도에 대해 미 행정부가 보인 첫번째 반응 역시 '새로운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 국방부는 30일 노근리 사건의 재조사 여부를 묻는 <연합뉴스>의 질문에 대한 답신에서 "이 사건이 조사 결과에 새로운 사실을 제공하는 것은 없다"며 "현재 재조사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는 "(미8군사령부 회의 결과에 대한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서한 전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피난민 대책회의 결정 사항은) 미군과 한국군을 공격하는 적군에 이용되고 있는 민간 피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 국방부는 이어 "노근리 사건에 대해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다"며 2001년 발간된 한미 정부 합동 조사보고서를 읽어볼 것도 권유했다.
이 국방부는 그러나 당초 조사 보고서에서 무초 전 대사의 서한에 대한 언급이 빠진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AP>는 29일 2001년 미 국방부 조사보고서의 자료란에는 무초 대사 서한의 마이크로필름이 수록돼 있으나 300쪽짜리 보고서에는 이 서한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 국무부도 이번 보도에 대해 "노근리 사건은 철저히 조사됐다"며 한미 정부의 합동 조사보고서의 일독을 또한번 권했다.
제 꾀에 빠지는 미국
'새로운 사실이 없다'는 미국 정부의 반응은 어찌 보면 틀리지 않은 것이다. 노근리사건을 전 세계적으로 알린 1999년의 <AP> 보도를 보면 이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 발생된 것임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AP>는 당시 기사에서 사건 당일인 7월 26일 정오 미8군사령관이 주요 지휘관들에게 보낸 메시지에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또 같은 날 밤 10시 미 육군 제25사단 전문일지에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고도 밝힌 바 있다.
로버트 캐럴 미 예비역 육군 대령(한국전 당시 위관급 장교)도 <AP>와의 당시 인터뷰에서 "(피난민에 대한) 발포 명령은 26일 무전으로 전 전선에 하달됐다고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처럼 '새로운 사실'이 아닌 무초 대사의 서한이 새로운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은 2001년 나온 한미 합동 조사보고서의 결론 때문이다.
조사보고서는 노근리사건을 '피난민 틈에 적군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겁에 질린 미군 병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없이 발표한 우발적 살상'이라고 규정해 '상부의 명령'은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발견된 무초 대사의 서한은 미8군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대리 참석) 등 한국에 있던 미국 정부 최고위급에 의해 발포 결정이 내려졌고 미국으로 보고까지 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조사보고서를 완벽히 뒤집는 것으로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또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미 행정부의 반응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는 2001년 조사보고서가 사실을 은폐·왜곡했다는 주장을 미국 스스로가 시인하는 셈이 된다.
'상부의 명령'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서한이 새로운 게 아니라면 결국 미국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필름에는 수록시킨 무초 서한을 조사보고서에는 빼버린 것은 이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피난민 대책회의가 피난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미 국방부의 설명도 '위선'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도 있다. 무초 서한을 보면 피난민이 적군에 악용되는 상황에서 미군을 보호하는 것이 당시 대책회의의 초점이었기 때문이다.
노근리-미라이-하디타…끝없는 양민학살
미 국방부가 새롭게 발견된 노근리의 진실을 이처럼 애써 외면하는 것은 미국내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는 이라크 하디타 마을 양민학살 사건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미국 언론들은 현재 지난해 11월 이라크 주둔 미 해병대에 의해 자행된 하디티 양민학살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하며 ▲학살 방식의 잔혹성 ▲사건 처리 과정의 은폐 의혹 ▲목격자 매수 등을 거론하며 미 국방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1968년 베트남전쟁 당시 양민 500여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미라이 학살'을 연상케 하는 하디타 양민학살이 공개되어 반전 여론이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노근리라는 또하나의 악재가 터진다면 미 행정부로서는 비등하는 여론을 감당키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따라서 미 행정부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언론들이 하디티 양민학살에만 몰두해 노근리에 대한 <AP> 보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을 십분 활용해 일단 무시작전으로 대응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노근리 사건 당시 작전지휘권은 이미 미군에
한편 피난민 대책회의에 한국의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도 참석했다는 사실이 무초 서한을 통해 드러남에 따라 한국 정부도 노근리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의도는 좋지만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정구도 노근리사건대책위 부위원장은 "한국 정부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같은 보도가 나오는 것으로 보이지만 노근리 학살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은 미군에 있음을 우선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부위원장은 "사건은 7월 25일 시작했는데 영동군의 한국 경찰은 24일 철수했다"며 "대책회의에 한국 경찰 관계자가 참석한 것은 그저 '연락책'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사건이 일어나기 11일 전인 7월 14일 한국 군경에 대한 작전지휘권(command authority)의 일체를 미군에 넘겼다. 정 부위원장은 "한국 참여 문제가 불필요하게 확산되면 미국은 그걸 걸고 넘어져 책임을 덜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무초 서신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가 나옴에 따라 미 국무부에 관련 서한이 실제 존재하는지에 대해 최근 사실 확인을 요청한 것으로 31일 알려졌다. 한국 정부의 요청과 피해자들의 재조사 요구 움직임에 미국이 제2의 반응을 어떻게 보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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