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의 저자는 1999년 10월부터 정부의 '노근리사건 진상규명 대책단'에서 핵심 당국자로 활동했던 오영호 당시 국무조정실 국장(외교안보심의관, 현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이다.
오 국장은 2002년 국방대학교 안보과정 학위논문 '노근리사건 조사 및 교섭결과 분석'에서 "노근리 교섭에 대한 평가는 '절반의 성공'이란 수식어를 동반한다"며 정부 교섭 과정에서 '미진했던 점' 4가지를 스스로 털어놨다.
이 논문은 대외비 등 비밀로 분류된 자료는 아니지만 국방대학교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등 접근이 제한적이어서 언론에 의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정부, 전략적 대응 없었다"
오 국장이 지적한 한국 정부의 첫번째 문제점은 전략적 대응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 국장은 이 논문에서 "미국 정부는 AP 보도로 위축되어 있던 참전군인 및 관련협회를 활성화하여 미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완화시켜 노근리사건 처리국면을 전환시킨 계기를 마련"했다면서 그에 반해 "한국 정부는 문제의 초기에서 마무리 계까지 전체적인 로드맵이 없었고, 그때그때 발생하는 사안 처리에 단기적으로 대응하는 데 그쳤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측 조사당장이었던 루이스 칼데라 육군 장관은 조사가 한창이던 2000년 2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발포한 병사들에 대한) 형사처벌 가능성을 아직까지 배제하지 않았다"고 말해 참전 장병들이 미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도록 '입을 막는' 전략을 취했다.
그 참전 장병들은 아예 증언을 거부하거나 상부 명령 여부 등 핵심 쟁점에 대해 말을 바꾸는 태도를 보여 조사단의 '협박 작전'은 진상조사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데 주효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같은 미국의 전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음은 물론, 양성철 당시 주미대사가 "미군 지휘관들이 사살 령을 내렸는지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발언하는 등 협상 대상 앞에서 혼선을 빚는 '전략 부재'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대미 협상은 '지지부진' 언론 대책은 '주도면밀'
오 국장이 지적한 두번째 문제는 한국 정부가 양심적인 참전군인, 인권단체 등 비정부조직, UN 인권위원회 등 노근리 피해주민에게 동정적이고 우호적인 국제기구나 집단을 결집하고 활성화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는 2001년 1월 미 국방부 조사보고서가 발표되기 직전 "피난민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해 모호한 결론을 내린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 피트 맥클로스키 전 하원의원과 같은 인사들과의 연계활동도 이뤄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세번째는 언론 활용의 문제. 그는 "한국측은 피해주민에게 우호적인 외국이나 한국의 언론 활용이 미흡했다 할 것"이라며 "한국측은 언론을 사건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적극적인 생각보다는 주로 교섭 결과에 대한 국내 정치과정에서 언론에 협조를 구하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오 국장이 언급한 '언론의 협조'는 2001년 1월 조사보고서가 발표되기 직전 한국 정부가 주요 언론사의 정치부장, 사회부장, 논설위원 및 총리실·외교부·국방부 출입기자단에 대해 열었던 설명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논문에는 그 과정에 대한 설명도 상세히 나와 있다. 한 피해주민 대표는 이에 대해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그러지 못했던 정부가 사후 언론플레이에만 주도면밀했음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어설픈 우호적인 대미감정'도 지적
네번째로 그가 지적한 것은 "관계 부처 및 관련 집단 간의 유기적, 체계적 대응체제 미흡과 협상 전문 인력의 부족"이다.
그는 "초기 대응시 역할분담이 명확히 부여되지 않아 관련 부처의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응이 부족했다고 평가된다"고 스스로 비판했다.
그는 특히 "(국방부) 진상조사반이 정부대책단의 산하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독자적으로 활동하여 진상조사가 거의 완료되는 시점까지 여타 부처에서는 진행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으며, 대미 교섭시 의제 선정 등에서 혼선이 있기도 하였다"며 진상조사반의 태도를 문제 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어 "이러한 여건하에서는 조직적인 대미 교섭전략 수립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대미 교섭과정에서 드러난 한국측 일부 대표단원의 협상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특히 "미국이 우리의 맹방이며 한국전쟁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나라라는 인식과 어설픈 우호적인 감정은 협상을 그르치기 쉽다"고 언급해 정부 협상단 내부의 우호적인 대미 감정이 협상에서 혼선을 유발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당시 '노근리사건 진상규명 대책단'은 국무조정실장이 단장을 맡아 대미 협상과 진상 조사를 총괄했고, 국방부 진상조사반(반장 김종환 국방부 정책보좌관, 현 합참의장)은 대책단 산하에서 사건의 진상을 기술적으로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 피해주민 대표는 오 국장의 이같은 '실토'에 대해 "진상조사반을 통제하는 것은 국무조정실이었고 오 국장은 그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도 이 비판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도 "정부의 실책을 당국자 스스로가 솔직히 털어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근리 학살이 상부의 명령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의 재협상을 요구해야하는 정부는 오 국장의 지적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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