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군 시내를 빠져 나온 버스는 어느덧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는 가을 산의 정취가 만개해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 속으로 한참을 올라가던 버스가 멈춰선 곳은 전라북도 순창군 석산면 도왕마을 입구. 오늘의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내려서도 승합차로 10여 분을 더 올라가 몇 걸음을 더 움직여야 했다. 감나무 가지를 제치고 올라간 그곳에는 신기하게도 50여 년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지난 10월 24일 영화 <작은 연못>이 순창의 도왕마을에서 막바지 촬영 현장을 공개했다. 이곳 도왕마을은 산세가 험해 실제로 할머니 몇 분만이 남아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인적 드문 산골마을이다. 흐드러지게 가지를 드리운 감나무를 울타리 삼아 집집마다 늘어진 감과 옥수수가 가을 볕에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나무에서 감을 따다 나눠 먹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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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 감독이 찾아냈다는 순창군 도왕마을. 세트가 부럽지 않다. ⓒ프레시안무비 |
'노근리 사건' 영화화 <작은 연못>은 1950년 7월 한국전쟁 중 노근리 철교 및 터널(일명 쌍굴다리)에서 일어난 '노근리양민학살사건'(노근리 사건)을 소재로 한 전쟁영화. <작은 연못>은 이 사건을 발굴, 보도한 AP 통신의 이상훈, 찰스 헨리, 마사 멘도자가 공저한 <노근리 다리 The Bridge at No Gun Ri>와 정은용의 저서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원작으로 '노근리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지난 2000년 AP 통신의 이상훈, 찰스 헨리, 마사 멘도자는 그 동안 은폐되어 왔던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보도로 그 해 퓰리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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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리와 수야를 끌어 안은 꾸리어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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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바위골 사람들이 꾸리네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다. ⓒ프레시안무비 |
더욱이 <작은 연못>은 그 동안 대학로에서 <칠수와 만수>, <비언소> 등 30년 가까이 다수의 연극을 통해 연출력을 인정받은 이상우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다. 이상우 감독은 원래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만 참여하기로 했다가 결국에 감독 적임자로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상우 감독은 이날 산 속의 짧은 해를 붙잡기 위해 촬영 현장 곳곳을 뛰어 다니며 영화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스태프들도 이상우 감독의 호령에 따라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상우 감독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작은 연못>은 반전 메시지를 던지는 한편 전쟁을 오락적으로 즐기기도 했던 기존의 전쟁영화들과 다른 영화다"라고 말하며 "그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전쟁은 학살이고 그 최대 피해자는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그리고 싶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곧 철저히 양민들의 입장에서 전쟁을 그려 보이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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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지시에 바쁜 이상우 감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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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촬영은 피난길에 부모와 헤어진 꾸리와 수야 남매가 대문바위골로 돌아와 어머니와 재회하는 장면. 쌍굴다리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이웃들의 시체를 넘어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의 쓸쓸한 귀향을 그린 장면으로 영화의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수야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던 어미가 흙바닥에 주저 앉아 아이들을 품에 끌어 앉는 장면에서는 촬영장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가족적인 인연으로 모인 배우와 스태프 그러나 이상우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촬영장 분위기는 금방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연못>에 출연하는 50여 명의 배우들은 모두 이상우 감독과 대학로에서 이미 끈끈한 인연을 맺은 사이. 문성근, 김뢰하, 박광정, 이대연, 박원상, 김승욱, 빈복기, 최덕문, 김지아, 전혜진 등의 배우들이 모두 다 그렇게 모였다. 그뿐만 아니다. "옛날 서로의 집에 숟가락 몇 개가 있는지 다 아는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는 진짜 가족과 친구들을 모아 연기해야 한다"는 이상우 감독의 지시에 따라 배우들의 가족들이 대거 영화에 출연했다. 실제 촬영장에서는 서로를 챙기는 가족의 모습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연못>의 제작 방식 또한 가족적이다. 이날 이 영화의 배급과 홍보를 맡고 있는 MK픽처스의 이은 대표는 "소재의 특성상 <작은 연못>은 상업적인 논리에서 자유로운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채택해야겠다는 데 모두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히며 "배우와 스태프, 후반 작업 업체들의 협조로 약 40억 원의 총제작비 중에서 실제작비 10억 원만 조달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의 제목인 '작은 연못'은 이 영화의 여러 장면에 삽입되는 김민기의 동명 노래 제목에서 따왔다. 이상우 감독은 "나는 이 세계가 작은 연못과 같은 하나의 생태계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 영화의 주제도 결국에는 이 세계가 하나의 연못 안에서 어떻게 공존해 나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이와 같은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김민기 역시 이 영화에 자신의 모든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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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공개 후 이어진 기자간담회 현장.이상우 감독(가운데)과 (유)노근리 프로덕션의 이우정 대표(오른쪽) 그리고 주연배우들 ⓒ프레시안무비 |
해가 진 산길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지만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이 영화의 배우와 스태프들은 <작은 연못>이 깜깜한 밤길을 비추는 별빛처럼 지나간 역사의 진실을 펼쳐 보일 것임을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작은 연못>은 오늘 25일 마지막 촬영을 마친 후 후반작업을 거쳐 내년 6월 개봉할 예정이다. (
사진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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