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노동자들, 6월항쟁으로 통제가 이완된 시기에 들고일어나다
프레시안 : 노동 문제는 독재 타도 문제와 더불어 1980년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양대 축이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월항쟁에 이어 그해 여름과 가을 전국을 뜨겁게 달군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 살펴봤으면 한다.
서중석 :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가보자. 6월항쟁에서 인천, 익산, 부산, 마산, 성남, 울산, 안양, 포항 등 여러 지역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넥타이 부대로 불린 사무직 노동자들의 시위도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적잖은 노동자들이 6월항쟁에 참여했지만, 6월항쟁에서 노동 문제가 부각되거나 노동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6월항쟁에 굴복해 6·29선언이 나오고 권력의 통제가 이완되면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7~8월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오랫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억압당했던 노동자들이 엄청난 규모로 궐기했다. 세계 노동자 역사에서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6·29선언이 나온 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연이어 일어나는 속에서 전국적인 투쟁을 촉발한 큰 사건이 바로 1987년 7월 5일에 있었던 울산 현대엔진 노조 결성이었다. 권용목을 중심으로 한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이날 노조를 결성하고, 7월 13일에는 노조 설립 신고증을 받아냈다. 이로써 국내 굴지의 재벌인 현대 그룹에 드디어 노조가 발을 붙이게 됐다.
이틀 후인 7월 15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조가 결성됐다. 그런데 그다음 날(7월 16일) 회사 측이 현대미포조선 노조 설립 신고서를 울산 시청에서 탈취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은 곧바로 투쟁에 들어갔다. 결국 회사는 노조 설립 신고서를 노동자들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현대미포조선 노조도 시청에서 노조 설립 신고증을 받아내게 된다. 그 후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중전기, 현대정공 등에도 연이어 노조가 들어섰다.
울산 현대 노조 결성을 기폭제로 전국을 강타한 민주 노조 바람
프레시안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유명 재벌 회장의 말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재벌을 주축으로 한 한국의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억압하며 대놓고 노조를 금기시했다. 더욱이 끔찍한 대규모 학살과 전쟁을 거치며 기반을 다진 극우 반공 체제였기 때문에 대다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한국 분위기를 대표하는 재벌 중 하나였던 현대에서 노조가 탄생한 사건은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나.
서중석 : 현대엔진과 현대미포조선에서 노조를 결성하는 데 성공한 것은 노동자 대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노동자들이 현대라는 대재벌과 맞서 싸워 민주 노조를 결성했다는 소식은 다른 지역,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에게도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런 속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도 거세게 불이 붙었다. 7월 16일 민간 탄광으로 제일 큰 곳인 동원탄좌에서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해고자들의 무기한 단식 농성에서 시작됐다. 같은 날 동해 탄광, 그리고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이 투쟁에 돌입했다. 7년 전 사북항쟁이 일어난 데가 바로 이 사북 동원탄좌다. 18일부터는 태백 한보탄광 등에서도 투쟁이 벌어졌다.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에 더 확산됐다. 태백 황지광업소, 화순 호남탄좌, 정선 대성탄좌, 함백광업소 등에서 계속해서 광산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 20일경까지 계속됐는데 노조 사무실을 비롯한 광업소 내 점거 농성에서 가두 진출, 철도 및 도로 점거로 나아가기도 했다.
다시 울산 상황을 살펴보면, 투쟁의 불길은 현대 그룹 너머로 번졌다. 7월 17일과 18일에 울산 택시 노동자들이 투쟁에 돌입했다. 7월 하순에는 풍산금속, 태광산업, 동양나이론 등 울산 지역 대부분의 사업장으로 투쟁이 번져갔다.
부산에서도 큰 사업장에서 파업 농성이 연쇄적으로 벌어졌다. 마산, 창원 지역에서도 한국중공업, 현대정공 창원 공장, 효성중공업,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파업 투쟁이 전개됐다. 인천에서도 7월 중순부터 파업 투쟁이 번지다가 8월 6일 대우중공업 파업 농성을 계기로 지역 전체로 퍼졌다. 7월 말 이후 노동자 투쟁은 대구, 구미, 광주, 익산, 성남, 부천, 안양, 안산 등 전국의 공단 지대로 번져갔다. 사측에서는 구사대도 동원해보고 어용 노조를 설립하는 방안도 내보는 등 온갖 방법으로 노동자 투쟁을 막아보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민주 노조 결성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기업 노조의 위력 보여준 현대 그룹 노동자들
프레시안 : 8월 이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노동자 대투쟁은 8월에 절정에 이르렀다. 8월 8일에 있었던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결성과 대우조선 파업을 시작으로 대투쟁 제2기라고 부를 만한 투쟁이 폭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8월 17~18일 울산에서 엄청난 규모의 투쟁이 일어났다. 이건 정말 대단한 투쟁이었는데, 현대 그룹 산하 11개 기업의 노조 대표자들이 결성한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 교섭 요구를 회사 쪽에서 묵살하면서 시작됐다.
8월 17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정문을 돌파했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합류하면서 연합 시위가 시작됐다. 경찰이 행진하는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을 퍼붓고 사측은 단전, 단수 조치를 취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가 더 커졌다.
18일에도 시위가 벌어졌는데, 전날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 엄청난 숫자의 현대 그룹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가족 3000여 명까지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 집결했다. 이들은 정주영 회장 및 족벌 체제 타도 화형식을 거행한 뒤 덤프트럭, 소방차, 지게차 등을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한 자료에는 이때 행진 참가자가 무려 4만 명이 넘었다고 나오는데, 그것보다도 인원이 더 많았다고 나오는 자료도 있다.
이렇게 되니까 전경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그것도 덤프트럭 같은 걸 앞세우고 밀려오는 상황에서 전경들도 딱히 손을 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행진 대열은 4킬로미터가 넘었다. 이들은 울산 공설 운동장까지 16킬로미터를 행진한 다음 거기서 집회를 열었다. 엄청나게 규모가 컸고,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8월 17~18일 현대 그룹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또다시 최루탄에 희생된 청춘,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죽음
프레시안 : 6월항쟁 과정에서 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진 데 이어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는 노동자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나. 공교롭게도 이한열과 같은 나이인 21세의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는 뜨거웠던 그해 여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서중석 : 8월 22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사건을 계기로 투쟁은 한층 격렬해졌다. 엄청난 규모의 노동자 투쟁은 8월에 들어와서 전 산업, 전 지역, 전 규모에 걸쳐 확산됐다. 예컨대 8월 셋째 주인 17일에서 23일까지 1주일 동안 88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113개의 노조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8월 28일 이석규 장례식에 대해 경찰이 강경 탄압으로 나오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급속히 위축됐다. 그 이전에는 6월항쟁에서 이어진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에 경찰이 강하게 나서지 못했다.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는 데 그것도 상당한 요인이 됐다. 그런데 이석규 장례식과 관련해 933명을 연행하고 67명을 구속한 것을 시작으로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대투쟁을 강압적으로 억눌렀다. 9월 4일에는 대우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파업 농성장에 경찰을 투입해 대우자동차 95명, 현대중공업 40명을 구속했다. 전두환 정권이 강경하게 탄압하면서 노동자 투쟁은 약화되고 잦아들게 된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 세계 노동 운동사를 다시 쓰다
프레시안 : 노동자 대투쟁을 약화시킨 건 전두환 정권의 강경 탄압만이 아니었다. 숱한 언론은 노동자 대투쟁에 '좌경 용공', '불순 세력', '악성 분규' 등의 딱지를 붙이며 왜곡 보도했다. 박정희 정권 이래 계속된 병영 같은 공장, 장시간 노동, 그리고 기록적인 3저 호황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저임금 체제를 비판하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친 노동자들을 매도했다. 아울러 6·29선언 이후 대선에 매몰돼 노동자를 외면한 야당의 행태도 빼놓을 수 없다. 그처럼 불리한 여건에서도 대규모로 전개된 노동자 대투쟁, 전반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1987년 7월, 8월, 9월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은 전 지역, 전 산업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업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에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의 투쟁이자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투쟁이었다.
1987년 6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총 3311건의 노동 쟁의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97.7퍼센트인 3235건이 파업이었다. 참여한 인원은 상용 노동자 333만 명의 36퍼센트가 넘는 122만여 명에 달했다. 이 시기 노동 쟁의 건수는 전년도(1986년) 쟁의 건수(276건)의 12배에 달했고, 1977년부터 10년간 발생한 노동 쟁의 건수(1638건)의 두 배가 넘었다. 6월 말 2700여 개였던 노조가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1987년 말에는 4000개가 넘게 됐고, 같은 시기에 조합원은 105만여 명에서 126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전보다 훨씬 규모가 큰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축 세력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의 노동 투쟁에서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그리고 여성들이 주축인 민주 노조들의 투쟁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 전반기에도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이와 달리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전 지역, 전 산업에서 사업장 규모와 관계없이 전개되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중화학 공업 분야의 대기업 생산직 남성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점에서 그 이전의 투쟁과 명확히 다른 면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기본적 권리 보장, 억압적이고 병영적인 노무 관리 철폐, 노조 결성과 조합 활동 보장 등을 요구했고 노동 환경 개선과 각종 차별적인 제도의 철폐도 강력히 주장했다.
한계도 있었다. 노동 전문가 이원보는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했다.
6월항쟁의 계승이자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노동자 대투쟁
프레시안 :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관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6월항쟁에서도 여러 노동자들이 노동 3권 보장 등 노동 문제에 대해 많은 요구를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기본적으로 노동자 권익 투쟁에 중심을 둔 게 아니라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같은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에 더 비중을 두고 투쟁했다.
노동자 대투쟁은 6월항쟁의 계승이라고 할 만하다. 투쟁 방법을 보더라도 6월항쟁 때 하던 방식을 많이 배운 것이 파업 투쟁에 큰 도움이 됐다. 6월항쟁에서 나타난 강력한 투쟁 동력을 이어받은 면도 강했다. 그러면서 6월항쟁에서 빠져 있던, 민주주의의 강력한 보완 요소로서 노동자의 기본권 쟁취라는 면이 7·8·9월 노동 투쟁으로 이어져 전개된 것이다. 다시 말해 6월항쟁이 기본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대투쟁은 바로 그걸 계승해서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익, 몇 십 년 동안 억압 속에서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던 그 권익을 쟁취하려 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큰 틀에서 목표가 동일한 투쟁의 앞과 뒤라고 할 수 있는 면이 다분히 있다.
프레시안 : 노동자 대투쟁은 6월항쟁과 이어져 있으며 중요성에서도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정치 영역으로 한정하지 말고 경제를 비롯한 전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그러한 중요성에 걸맞지 않게 그동안 현실에서는 노동자 대투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또는 6월항쟁과 무관한 것처럼 따로 떼어서 바라보는, 즉 노동 운동을 제외한 여타 민주화 운동 세력은 6월항쟁 위주로 기념하고 노동 운동 쪽만 노동자 대투쟁을 기념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서중석 : 6월항쟁은 모두 함께 기념할 만한 일이겠고 노동자 대투쟁도 민주주의의 진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중시해야 할 터이다. 그런데 노동자 대투쟁을 사회 전반적으로 기념하는 움직임은 사실상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눈에 띄는 게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왜 그렇게 됐느냐. 아까 이원보 주장에서도 나온 것처럼 대개 개별적인 기업별 투쟁으로 전개됐기 때문이다. 물론 울산 같은 데서는 현대 그룹 산하에 있는 각 기업 노동자들이 연합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기업별로 투쟁을 전개했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넘어 동시에 조직적으로 행동한 총파업 투쟁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까 7월, 8월, 9월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을 하나로써 노동자들이 기념하는, 즉 '우리 운명을 바꿔놓은 아주 중요한 투쟁으로 기념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어느 한 시점을 잡아서 기념하는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대부분 기업별로 다른 날짜에 투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절, 그리고 전태일이 분신한 11월 13일 같은 날만이 아니라 더 기념할 만한 것을 모색할 때 노동자 대투쟁이 다시 논의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민주 노조들의 전국 조직, 민주노총 출범
서중석 :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노조 결성은 계속됐다. 1986년에 노조 2675개, 조합원 103만여 명이었는데 1989년에는 노조 7883개, 조합원 193만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노조 숫자가 약 3배로 늘어나고 조합원이 87퍼센트나 증가한 것이다. 1986년에 12.3퍼센트였던 조직률도 1989년에는 18.6퍼센트로 상승했다.
그러나 1989년이 정점이었다. 그 후 노조 숫자도, 조합원 수도 줄어들었다. 1992년에는 노조가 7527개, 조합원이 173만여 명으로 줄었고 조직률은 15.0퍼센트로 낮아졌다. 파업 건수도 비슷한 변화를 보였다. 1986년 276건에서 1987년 3749건으로 급증했다가 1988년과 1989년에는 각각 1873건, 1616건을 기록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 급격히 감소해서 1990년 322건, 1991년 234건, 1992년 235건을 기록하며 1986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새로 조직된 노조들은 어용이라는 비판을 받던 한국노총에서 나와 자신들의 독자적 조직을 갖고자 했다. 1987년 12월 마산창원지역노동조합총연맹(마창노련)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1989년까지 11개의 지역별 노조 협의회(지노협)가 결성됐다. 제조업 부문에서 새로 생긴 노조들이 지노협의 주축을 이뤘다. 비제조업 부문에서는 1987년 11월에 조직된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을 시작으로 1989년까지 언론, 화물, 병원 등을 비롯한 11개 업종별 노동조합 협의회(업종협)가 결성됐다.
민주 노조들은 1988년 '전국 노동법 개정 투쟁 본부'를 결성하고 제3자 개입 금지 규정을 비롯해 복수 노조 금지, 노조의 정치 활동 금지, 공익사업에 대한 직권 중재,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 금지 등 노동 기본권을 제한한 법률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전국적 노조의 결성을 지향해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했다. 이게 전노협인데 여기에 지역 협의체 14개, 업종별 조직 2개, 단위 노조 456개, 조합원 16만 6307명을 포용하게 됐다.
전국 조직에 대한 민주 노조 진영의 열망은 더욱 커져 1993년 6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발족했고 그다음 해 11월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1995년 11월 11일 마침내 민주노총이 창립 대회를 열었다. 창립 당시 가입 노조는 862개, 조합원은 41만 8153명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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