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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전두환의 푸념 "난 카드를 다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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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궁지에 몰린 전두환의 푸념 "난 카드를 다 썼어요"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38> 6월항쟁, 스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프레시안 : 6·10 국민 대회에 이어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1987년 6월 15일까지 이어졌다. 그 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6월 16일에도 여러 도시에서 경찰력으로 시위를 막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도시인 대전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시위대는 전보다 더 무차별적으로 파출소, 관공서, 민정당 당사를 공격했다.

16일 대전에서 시위는 6시경에 시작됐다. 8시가 넘으면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해 시위대가 5000~6000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역과 도청 사이의 중앙로에 진출하려 했는데, 인원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게 가능하게 됐다. 9시쯤 시위대는, <말>에 의하면 이때 2만여 명으로 불어난 상태였는데, 도청 앞에서 시민 대회를 열었다. 시위대가 2만 명을 넘어서자 중앙로를 지키던 경찰의 저지선이 무너졌다. 도청 앞에서 대전역에 이르는 1킬로미터가 순식간에 민주 광장으로 변했다.

11시 30분경 시위대 4000여 명이 도청을 에워싸고 점거하려 했다. 경찰은 다연발탄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댔다. 그 때문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대전백화점 유리창도 시위대의 공격으로 심하게 파손됐다. 대전백화점은 대통령 부인 이순자의 재산이라는 소문이 돌던 곳이었다. 시위는 상오 1시까지 계속됐는데 밤이 깊을수록 실업자, 룸펜 청년 등이 많이 나섰다. 이날 천안에서도 전날에 이어 거센 시위가 일어났고 청주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1862년 진주 민란 연상시킨 1987년 6월 진주 시위

프레시안 : 6월항쟁 때 지방에서 전두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대전과 더불어 부산, 진주를 지난번에 꼽았다. 6월 16일 진주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1862년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해 민란을 일으키지 않았나. 그것의 도화선이 된 게 진주 민란인데, 1987년 6월 16일 진주에서 일어난 시위는 125년 전에 있었던 진주 민란이 떠오르게 했다.

전날(15일) 시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경찰은 16일 요소요소에 전경과 사복 경찰을 배치하고 초동에 완전히 제압하려 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그런 속에서 1시 30분경 시위 인원이 3000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수정파출소를 점거한 데 이어 역전파출소에 불을 질렀다. 또한 상평공단 쪽으로도 진출해 공단파출소와 경찰 기동대 중대를 습격했다.

그 이후에 극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학생 400여 명이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겠다면서 검문소와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인터체인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학생들은 5시 20분경 남해고속도로에 진출했다. 그 후 2시간 동안이나 진주-하동 간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이 차를 세우고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자,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 경찰은 고속도로 점거 농성에 크게 놀라 서둘러 진압에 나섰다. 그렇지만 시위대한테 코가 꿰인 격으로 뾰족한 방안이 없었기 때문에 교수들을 통해 학생들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 민란을 연상시키는 시위가 이날 일어났다고 얘기했는데 진주의 대학생들 중에는 농민 출신, 그것도 가난한 농민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진주 경상대는 국립대여서 사립대보다 학비가 싼 편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경상대에 많이 들어갔는데, 이들은 우직한 면도 있었고 뚝심도 있었다.

치안 부재 상황 그대로 드러낸 전두환 정권

ⓒ오월의봄
프레시안 : 부산을 비롯한 다른 지역은 어떠했나.

서중석 :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규모가 큰 연합 시위를 벌였다. 7시경 학생 6000여 명이 연합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이 남포동 거리를 뒤덮으면서 시위대는 곧 1만 명을 넘어섰다. 시위대는 부산 시내 곳곳에서 11시경까지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자정을 넘긴 시위대는 최루탄 발사와 백골단의 무자비한 연행을 피해 가톨릭센터에 들어갔다. 6·10 국민 대회 때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 밀린 시위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면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시작되지 않았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6월 16일 이날 부산에서 시위대가 가톨릭센터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가톨릭센터 농성 투쟁이 나타나게 된다.

마산, 대구, 인천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수원에서는 시민, 학생 1만여 명이 수원역 앞에서 밤늦게까지 대중 집회를 열고 시국 토론을 했다. 이날 경찰은 한신대 강돈구 교무처장을 비롯한 교수 10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학생과 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자 한신대 교수들이 그것에 항의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후 경찰이 교수들을 잡아간 것이다.

각지에서 거센 시위가 계속 일어나면서 전두환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노태우건 여당이건 국민들이건 모두 전두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4·13 호헌 조치를 강행한 전두환으로서는 6월항쟁에 대응해 내놓을 만한 마땅한 방안이 없었다. 그러면서 6월 15일과 16일 대전과 진주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시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치안 부재 상황을 국민한테 그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군부 독재자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이자 모욕이었다.

시위대와 경찰, KBS 부산방송본부 놓고 치열한 공방전

프레시안 : 17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지 않았나.

서중석 : 17일에도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역시 진주, 대전, 부산의 시위 규모가 컸다. 이날 시위대는 고속도로를 3시간 동안 점거했고 파출소 17곳, 민정당 당사 3곳, 지방 KBS 2곳을 습격했다.

부산에서는 시위대가 농성 중인 가톨릭센터를 둘러싸고 아침부터 공방전이 벌어졌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대자 농성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맞섰다. 그러면서 농성단이 2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곧 끝날 줄 알았던 이 농성은 7일이나, 그러니까 명동성당 농성보다 더 길게 이어지게 된다.

17일 오후에는 부산 시내 10개 대학 학생들이 시내에 쏟아져 나왔고 시민들도 학생 시위에 합류했다. 3시 30분경 부산대 학생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히 시위했다. 그러면서 중앙로의 교통이 1시간 30분 동안 마비됐다.

10시 30분경 시위대는 "가톨릭센터 농성 학생, 시민을 구출하자"고 외치며 가톨릭센터 진입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증원된 경찰에 막혀 진입할 수 없었다. 그러자 시위대는 KBS 방송국으로 몰려가 그 안에 들어가려 했다. 그 와중에 경찰 1개 소대를 포위해 진압 장비를 빼앗고 무장을 해제했다. 10시 35분경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한 자료에는 3만여 명으로 나오는데, 경찰과 대치한 가운데 KBS 부산방송본부 건물을 습격해 철제 울타리 30개를 파손했다. KBS 부산방송본부를 놓고 시위대와 경찰은 자정까지 공방전을 벌였는데, 전쟁터를 상기시킬 정도였다.

고속도로 점거하고 열차 세우고…그러나 내란과는 전혀 달랐다

프레시안 : 진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날 경상대 학생들은 3개 조로 나뉘어 교문을 나섰다. 조별로 임무가 달랐는데 3번째 조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게 돼 있었다. 3번째 조에 속한 300여 명은 옛날 동학농민군처럼, 1894년 동학농민군이 마지막에 싸운 곳 중 하나가 바로 이 진주인데, 산을 타고 넘어 4시 25분경 남해고속도로로 들어가 사천 진입로까지 진출했다.

학생들의 점거로 고속도로가 두절되면서 진주에서 삼천포로 가는 국도까지 막혀버렸다. 고속도로 12킬로미터 구간과 국도 12킬로미터 구간에 1만여 대의 차량이 장사진을 이룬 채 3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기사와 승객들이 시위 현장에 몰려들었는데, 시위대에 물을 건네는 등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8시경 LPG 수송차에 올라탄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시내 쪽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시내에서 시위를 하고 있던 학생들과 합류했다. "연행 학생을 석방하지 않으면 가스차를 폭발시켜 모두 죽겠다", 앞에 선 학생들이 이렇게 소리치자 3000여 명의 학생들이 "죽자! 죽자!"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그러자 전경들이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최루탄을 쏘아대며 가스차를 급습했다. 전경들은 차에 타고 있던 학생들을 군홧발로 짓이기고 각목 등으로 때려 반죽음 상태로 만든 다음 연행했다. 8시 33분경에는 경찰에 밀려 후퇴하던 시위대 일부가 철길에 올라가 마산발 진주행 비둘기호 열차를 세웠다. 이날 창원과 마산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프레시안 : 대전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어떠했나.

서중석 : 17일 대전의 각 대학은 기말 시험을 무기한 연기하고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러 대학 학생들은 출정식을 하고 오후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시까지 경찰과 시위대는 대전역, 홍명상가 일대를 여러 차례 뺏고 뺏기는 격전을 치렀다. 10시경에는 홍명상가 광장에서, 10시 40분경에는 대전역 광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일부 시위대는 열차를 세우고 대전역 선로 위에서 투석전을 벌였다.

이날 시위대는 7시가 조금 지났을 때 은행동파출소를 불태운 것에 이어 11시경 목동파출소를 불태웠다. 또한 용두동파출소, 역전파출소 등을 습격했다. 민정당 당사도 공격을 당했고 KBS 대전총국은 300여 명의 시위대에 의해 습격당했다.

천안과 공주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대구 지역의 5개 대학 학생들도 연합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가두 행진에 시민들이 동참해 시위대는 8000여 명이 됐다. 학생들이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자 시민들이 그것에 항의하는 일도 일어났다. 경찰이 최루탄을 더 많이 발사하고 시민들에게도 '사과탄'을 던지면서 생긴 일이었다. 이날 경주, 광주, 안산, 인천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인천 시위에는 중·고등학생도 1000여 명 참여했다. 성남에서는 5개 대학 학생들이 연합 시위를 했다. 서울에서는 28개 대학 학생들이 교내 집회와 시위를 했다.

이처럼 부산, 대전, 진주와 같은 도시에서 여러 날에 걸쳐 규모가 큰 시위가 일어나고 경찰의 힘으로는 이걸 통제하지 못하는 사태를 맞았다. 고속도로가 장시간 점거를 당하고 철도 운행이 중지되는 사태는 내란 사태와 흡사하게 비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내란과는 전혀 달랐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충격 요법으로, 엄격히 제한된 일시적 공세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궁지에 몰린 전두환의 푸념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프레시안 : 이 무렵 전두환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항쟁을 가라앉힐 묘안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 않았나.

서중석 : 6월 17일 저녁 전두환은 노태우와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 등을 청와대 안가에 불러들였다. 노태우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축하하는 술자리였는데, 여기서 전두환은 "우리가 지금 밀리고 있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썼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쁜 짓을 뭐 많이 했기에 겁이 나느냐"는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이제 없어." 이 자리에서 전두환이 한 말은 물론 전혀 보도될 수는 없었다.

전두환은 며칠 동안 혼자서 되뇌던 말들을 이 자리에서 털어놓은 게 아닌가 싶다. '카드를 다 썼다. 이제 없다', 이렇게 독백 비슷한 푸념을 한 건 그동안 자신이 초강경책을 많이 써서 더 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4·13 호헌 조치 때문에 아무런 카드도 내놓을 수 없게 됐다는 푸념이기도 할 것이다. 또 6·10 국민 대회, 명동성당 농성 투쟁, 그리고 대전, 부산, 진주 등지에서 계속되는 격렬한 시위 등 자신이나 신군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맞닥뜨려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 것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 정권 차원 또는 민정당 차원에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조직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움직임은 없었나.

서중석 : 17일 저녁 이 술자리에서 전두환이 얘기할 때까지 전두환이건 민정당 또는 노태우 쪽이건 정권 비상사태에 당황하기만 했을 뿐 대책 회의다운 대책 회의를 한 적이 없었다. 또 전두환 정권 때에는 '땡전 뉴스'라 불리던 KBS 9시 뉴스에 항상 전두환 소식이 첫머리에 나오지 않았나. 그런데 6월항쟁 때에는 전두환이 '땡전 뉴스'에 나와서 시위대를 설득하거나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연설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 연설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난 직후에 이승만이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6월 17일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중요한 말을 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가 과거에 하던 식, 군부를 동원하고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하면 안 되지 않겠어?"라고 반문하는 투로 말했다. 비상 계엄을 선포할 수 없다 또는 선포하지 않겠다는 걸 술자리에서 그대로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위대가 사생결단 태세로 싸운 명동성당 농성 투쟁, 그리고 대전, 진주, 부산 등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전두환 머릿속에 1980년 광주항쟁이 또 떠올랐을 것이고 그러면서 자문자답한 것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대책을 나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노 대표 중심으로 내놓으시오", 이렇게 얘기했다. 6월 17일 밤이 돼서야 노태우와 민정당이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를 넘어서서 어느 정도 신축성 있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전두환(1985년). ⓒ국가기록원


6·10 국민 대회 이후 진로 놓고 진통 겪은 국본

프레시안 : 이 시기에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6·10 국민 대회 이후 6월 17일까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규모의 투쟁이 벌어졌는데, 그것들은 국본과 상관없이 자발적이고 자연 발생적으로 전개됐다. 그러한 거대한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국본은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국본은 6·10 국민 대회 이후 진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다. 소장 세력 쪽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영삼 측이나 김대중 측에서 나온 이른바 노장 세력 측은 장기 프로그램을 세우자고 하면서 반대했다. 이들 정치 세력은 명동 투쟁처럼 계획에 없던 투쟁이나 장외 투쟁이 뜻하지 않은 사태를 몰고 올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양김은 직선제를 쟁취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투쟁으로 그걸 이번에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이나 의지는 약했다. 통일민주당은 이미 원내 복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의견이 엇갈린 가운데, 6월 13일 국본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명동성당 농성 해산이 확실시된 15일 오전에 국본은 다시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평화적 국민 행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국회 등원을 선언했다.

16일에 가서 국본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로 정했다. 교회여성연합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 주최로 18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최루탄 추방 공청회를 열기로 돼 있었는데, 이것에 맞춰 18일을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로 정한 것이다. 국본은 18일 오후 6시에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밤 10시에 전 국민이 10분간 소등할 것을 요청했다.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 전쟁터를 방불케 한 서울 중심가

프레시안 : 역대 독재 정권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짓밟기 위해 최루탄을 애용했다. 그 과정에서 1960년 김주열, 1987년 이한열이 최루탄에 희생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한 최루탄 추방을 내건 6월 18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18일 최루탄 추방 공청회가 열릴 예정이던 서울 연동교회와 그 부근의 기독교회관에 여성 단체 회원, 학생,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경찰은 연동교회를 원천 봉쇄했다. 4시경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4개 여성 단체 회원과 시민, 학생들은 연좌시위를 벌이며 노상에서 공청회를 열었다.

이에 앞서 1시 20분경부터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 이날의 격전지도 6·10 국민 대회와 비슷하게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 신세계백화점, 퇴계 고가 도로, 시청 앞과 남대문, 서울역 일대에 형성됐다. 6시 40분경 학생들은 동방플라자 앞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싸웠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구호가 울려 퍼지면서 시위대는 곧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같은 시간 명동성당 앞에서는 1만 5000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7시 30분경 신세계백화점 일대에 시위대가 몰려와 군중이 2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적으로 학생들은 계속 "비폭력"을 외쳤다. 그렇지만 3000~4000명의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무장하고, 미도파백화점 앞에 배치된 전경 700여 명과 투석전을 벌였다. 급기야 경찰이 밀렸다. 학생들은 전경 80여 명을 포위해 헬멧, 방독면, 방패 등 시위 진압 용품을 전부 빼앗아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에서 불태웠다. 이어서 무장 해제된 전경들을 최루탄 10여 상자와 함께 분수 안에 몰아넣었다. 8시경부터 서울역 일대에서 마지막 격전이 전개됐다. 8시 30분경 시위대 1만여 명이 광장 앞 도로까지 점거했다. 이 때문에 신세계백화점에서 서울역 사이의 교통이 마비됐다.

6·10 국민 대회 때처럼 이날도 서울 중심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시위대와 경찰이 곳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때마다 경찰의 통제력은 한계를 드러냈다. 학생 시위대가 여러 곳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6월항쟁 최대 인파, 부산 서면 일대를 뒤덮다

프레시안 : 부산에서도 규모가 큰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나.

서중석 : 이날 최대의 시위는, 6월항쟁 최대의 시위이기도 할 터인데, 부산에서 일어났다. 부산에서는 부산 국본이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 행사를 하기 전에, 그것도 이른 새벽부터 놀라운 사태가 전개됐다.

상오 1시 20분경 택시 기사들이 서면 로터리와 부산역, 초량 삼거리에서 경적 시위를 시작했다. 많을 때에는 300대 정도, 적을 때에는 50여 대가 6시 30분경까지 경적을 울리며 시위를 했다. 광주항쟁 때 택시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차량 시위(1980년 5월 20일)가 항쟁 수위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6월항쟁에서 부산의 택시 기사들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 무렵 부산에는 민주택시기사협의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 단체 회원들은 밤늦은 시간에 종종 경적 시위와 노킹 시위, 노킹이라는 건 엔진을 조작해 폭음을 내는 걸 말하는데, 그런 시위를 벌이곤 했다. 이들은 기사 식당에서 집결 장소 등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자기 택시에서 휘발유를 빼내어 화염병을 급조했다.

택시 기사들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느냐. 당시 시민들이 모여 있으면 어디서든 백골단이 쇠로 만든 곤봉을 휘두르고 경찰이 마구 쏜 직격탄에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을 기사들은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계속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는 것에 기사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오후에는 대학생들이 부산 시내에 쏟아져 나왔다. 4시에 학생, 시민 등 3만 5000여 명의 시위대가 파출소 3곳을 습격하고 민간인 소유 트럭과 소방차를 탈취했다.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4시 30분경에 이미 6만여 명에 이르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들이 더 늘어났고, 그러면서 6월항쟁 최대의 인파가 서면 일대를 뒤덮었다.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부산상고 앞 대로와 범내골 일대 도로까지 시민들로 가득 찼다. 서면에서 부산진시장에 이르는 왕복 8차선, 5킬로미터 정도 되는 간선 도로에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프레시안 : 얼마나 모인 것인가.

서중석 : 서면 일대에 모인 인파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료마다 다르게 나온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나온 <6월 민주화 대투쟁>에는 30~40만 명이라고 돼 있는데, 이건 부산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여 있고 서면 로터리에 모인 군중은 6만여 명이라고 돼 있다. 황인성이 쓴 글에는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4킬로미터의 간선 도로를 약 30만 명의 시위 인파가 완전히 메운 상태"라고 나와 있다.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낸 <부산민주운동사>에는 "서면에는 이미 30여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었다"고 돼 있다. <6월항쟁을 기록하다>라는 책에 고호석이 부산의 6월항쟁에 대해 썼는데, 여기에도 <부산민주운동사>와 똑같이 서술돼 있다.

20만 명이 모였다고 나오는 자료도 여럿 있다. 예컨대 이날 서면 시위에 참여한 한 학생은 "서면 로터리에서 범내골 쪽으로는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며 20만 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이것보다는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나와 있다. 동아일보는 5만여 시위 군중, 지켜보던 시민 3만, 그렇게 해서 8만여 명이 서면 로터리 도로를 점거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일보도 숫자가 같다. 8만여 명이라고 썼다.

이런 여러 가지를 놓고 볼 때 10만 명 내외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정확한 숫자를 단정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날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는 건 틀림없다.

정권이 위기감 느낄 만했던 부산 시위, 급속히 퍼진 비상 조치 소문

프레시안 : 18일 저녁 부산에서 시위 양상은 어떠했나.

서중석 : 6시경부터 사상공단 노동자들이 잔업을 거부하고 시위대에 가세했다. 그러면서 사상터미널에서 주례 로터리에 이르는 길에서 노동자와 고교생, 인근 주민 등 2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9시 30분경 시위 군중은 남포동 국제시장 부근의 초량1파출소, 남포동파출소 등 9개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집기를 부쉈다.

밤 10시경 서면에서 이동한 촛불 시위대가 범일 고가 도로를 통해 이어지는 좌천동 고가 도로, 이걸 오버 브리지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여기를 통과하려 했다. 그런데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도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고가 도로 위에 있던 시위대는 독한 최루 가스에 질식돼 갈팡질팡했다. 그때 오버 브리지 밑에서 28세의 회사원 이태춘이 발견됐다. 고가 도로에서 떨어진 것인데, 이태춘은 6월 24일 사망했다.

자정을 넘기면서 경찰 저지선을 간신히 뚫은 시위대는 여세를 몰아 KBS 부산방송본부 앞으로 몰려갔다. 이태춘 추락 소식이 들려오면서 많은 사람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화염병이 날아들어 방송국의 각종 집기류가 불탔다. 경찰도 죽을힘을 다해 KBS를 지켰다. 그러면서 KBS 부산방송본부를 둘러싸고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단한 공방전이었다.

19일 상오 2시 50분경에는 초량 로터리와 KBS 사이에 있던 시위 군중이 대형 트럭, 트레일러 등 차량 10여 대를 탈취한 후 시청으로 돌진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퍼부어댔다. 그런데도 시위대가 물러서지 않자, 경찰도 대형 트럭을 동원해 길을 막은 뒤 64연발 다탄두 최루탄을 발사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전두환 정권이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는 것 아니냐' 하는 위기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격렬한 시위가 이어진 가운데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무렵 전두환 정권이 비상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18일 시위를 거치면서 더 퍼졌다. 당시 나도 그 소문을 들었다. 부산 시위 얘기가 나오면서 그 소문이 급속히 퍼진 것이다.

▲ 최루탄 추방 시위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한 줌의 재로 변한 전두환의 대형 사진

프레시안 : 다른 지역에서는 어떠했나.

서중석 : 마산, 울산, 김해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대전에서도 큰 시위가 일어났다. 7시경 중앙로 일대에 1만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됐다. 시위대는 대전역 광장, 시청 앞, 대전극장 일대에서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와중에 경부선 하행 열차의 통행이 일시 중단됐다.

대구에서는 4시 50분경부터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 등 여성 30여 명이 최루탄 추방을 위한 공청회 안내문을 돌렸다. 5시에 시위가 시작됐는데, 6시 40분경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면서 격렬하게 전개됐다. 서문시장 앞에서 투석전을 벌이던 시위대는 소방차를 빼앗아 전경에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옷이 물에 젖은 전경들은 진압 작전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했다.

익산에서는 이날도 원광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군산, 목포, 광주, 순천, 춘천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춘천에서는 8시 30분경부터 시위가 벌어졌다. 그다음 날(19일) 상오 1시경에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연좌 농성을 벌였다. 이때 시위대 중 200여 명은 도청을 점거하고 전두환의 대형 사진에 불을 질렀다. 원주, 수원, 성남, 인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6·18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에 전국 16개 도시, 247개소에서 시위를 벌인 것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에 난 걸 가지고 쭉 따져보면 실제로는 18개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이날 시위에 8만 6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발표했다. 그와 달리 <6월 민주화 대투쟁>에는 150여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쓰여 있다. 전자는 지나치게 축소했고 후자는 과장됐다고 볼 수 있다. 경찰은 파출소 21곳, 경찰 차량 13대가 불타거나 파괴됐으며 1487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 이후에도 10년 넘게 최루탄을 계속 사용했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에 와서야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최루탄을 제조하는 업체는 그 후 수출에 주력했다. 한국산 최루탄은 '아랍의 봄' 시기 바레인을 비롯해 터키, 미얀마 등에 대거 팔렸다. 영국에 머물던 한 바레인 청년이 '최루탄 수출을 금지해달라'는 편지를 한국 시민 단체에 보내올 정도였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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