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전두환 집권 중반기에 유화 국면이 나타난 이유
프레시안 :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집권 중반기에 유화 조치라는 것을 취했다. 왜 그랬던 것인가.
서중석 : 1983년 하반기에 가면 유화 국면이라는 게 나타난다. 1983년 12월 21일 이른바 학원 자율화 조치가 발표됐다. 1980년 5·17쿠데타 이래 1983년 말까지 학원에서 제적된 1363명에 대해 복교를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다음 날(12월 22일) 공안 사건 관련자 172명이 특별 사면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고 142명이 복권됐는데, 그중에는 학생 운동으로 수감돼 있던 131명이 포함돼 있었다.
그에 더해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100명에 가까운 해직 교수의 복직이 허용됐다. 예컨대 사학계의 경우 강만길 선생도, 정창렬 선생도 다 이때 복직이 허용됐다.
1984년 2월 25일에는 정치 활동 규제 대상자 중 202명을 해금했다. 1년 전(1983년 2월) 250명을 1차로 해금한 데 이어 이때 2차로 해금 조치를 취한 것이다. 나흘 후인 2월 29일에는 학원에 상주하던 사복 경찰이 철수했다. 3월 1일에는 구속 학생 158명을 석방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러한 유화 국면이 나타난 것에 대해 여러 사람이 얘기를 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보면, 1983년 11월에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고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게 돼 있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도 완화 조치가 나타난 것 아니냐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한 것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는 극단적인 억압 정책을 이젠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계속 강압적으로 끌고 갈 수가 있는 것이냐', 국민들의 이런 목소리에 대해 뭔가 대답을 안 해줄 수가 없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 후 '투 허'(허화평과 허삼수)가 퇴장한 것도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투 허'는 극단적인 억압 정책을 소위 개혁 정책이라고 하면서 밀어붙이지 않았나.
그뿐 아니라 이철희·장영자 사건, 김철호 사건, 영동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전두환 본인과 정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너무나 강했다. 전두환 쪽에서는 그걸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유화 국면 활용해 투쟁 분위기 끌어올린 학생 운동
서중석 : 학생 운동은 1982년, 1983년에 이어서 1984년에도 계속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유화 정국에 맞춰 1984년 3월 서울대에서 학원 자율화 추진위원회가 등장하는데, 학원 자율화 또는 학원 민주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은 다른 대학들로 번져갔다. 학생 운동 세력이 학도호국단을 장악해 학원 민주화에 활용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광주항쟁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활동을 그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전개하게 된다. 특히 1984년 5월 17일에는 서울의 주요 대학들에서 학생들이 일제히 격렬한 교내 시위를 전개한 후 서대문 로터리, 청계천 5가 등에서 가두시위까지 했다. 그다음 날인 5월 18일에는 전국 22개 대학 학생들이 광주항쟁을 기리는 집회를 열거나 가두시위를 했다. 그 가운데 서울대의 경우 5000여 명이 광주민주항쟁 영령 위령제를 지낸 다음 파고다공원에서 민주의 날 전야제를 열었다. 서울 동부 지역 대학생들도 광주 학살 규탄 대회를 열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1984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부터는 전두환의 일본 방문(1984년 9월 6~8일)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전두환의 방일은 바로 전해인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수상이 한국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방한은 해방 후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이뤄진 한국 방문이었다.
그런 속에서 1984년 2학기에 고려대에서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고려대를 시작으로 연세대, 서울대, 경희대, 외국어대, 전남대 등 다른 여러 대학에서도 총학생회가 다시 살아났다. 1980년 2학기에 전두환·신군부가 부활시킨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다시 자율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 것이다.
물론 문교부나 학교 당국은 이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1984년 9월에 일어난 서울대 프락치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학생들이 총학생회 인정 등을 요구하며 시험을 거부하자, 10월 24일 서울대 당국은 경찰 진입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경찰 6400여 명이 다시 서울대 교정에 들어오게 된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더 큰 시위를 벌이며 맞섰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7개 대학 학생들이 부마항쟁 5주년 기념 반독재 민주화 연합 투쟁 실천 대회를 여는 등 여러 대학에서 투쟁이 계속됐다.
또한 학생들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학 연대와 함께 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폈는데 1984년 가을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문제가 부각됐다. 그해 9월과 10월 학생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인정, 노동 악법 개정 등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자와 학생들의 연합 시위는 그해 12월까지 곳곳에서 계속됐다.
1984년 11월 14일에는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학생 264명이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투쟁은 그다음 날 새벽 경찰이 진입해 학생들을 전원 연행할 때까지 13시간 동안이나 전개됐다. 그런 속에서 그해 12월에 가면 학생 운동은 그다음 해에 치러질 총선에 참여할지 여부를 포함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에 들어간다.
23일 단식으로 정치 활동의 돌파구를 연 김영삼
프레시안 : 이 무렵 정치권에서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나.
서중석 : 정국도 1983년에 들어서면서 변화를 보였다. 1983년 5월 2일 김영삼은 장문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건 당연하게도 외신에만, 그것도 16일에 가서야 보도됐다.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김영삼은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돌입했다. 1979년에 신민당 총재가 되면서 박정희와 격돌하던 때의 모습이 여기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동아일보에서 아주 짤막하게, 뭔가를 시사하는 기사 같은 것을 싣는 일은 있었지만 국내 신문에서는 기본적으로 일절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를 알지는 못했지만, 외신에서는 김영삼 단식을 꽤 크게 계속 보도했다.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단식 현장의 전화선을 끊어놓고 수십 명이 들이닥쳐서 김영삼을 강제로 병원으로 이송했다. 10일이 넘으면서 김영삼은 몽롱한 상태가 됐는데 전두환은 '이번에 건강이 회복되면 해외로 나가라. 주선해주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물론 김영삼은 거부했다.
5월 26일 이민우 전 신민당 의원을 비롯한 민주산악회 회원, 김영삼이 1980년대 초에 연금에서 풀렸을 때 이걸 만들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쪽에서 '김 총재 단식을 지지한다'는 결의를 했다. 단식 14일째인 5월 31일에는 함석헌, 홍남순, 문익환 등이 기독교회관에서 민주화를 위한 무기한 단식을 시작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처럼 외신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국내에서도 움직이고 하니까 전두환 정권도 이제는 다급한 상태가 된다. 그런 속에서 단식 23일째인 6월 9일, 23일이면 아주 오래 한 건데, 김영삼은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라고 얘기하면서 단식을 중단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 활동을 전개한다는 걸 의미했고 전두환 정권도 김영삼 쪽을 탄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영삼이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단식에 돌입하긴 했지만, 이 무렵 광주항쟁에 대해 김영삼이 취한 태도는 많은 사람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4년 7월 외신과 한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이) 민주 회복을 공약하는 조건이라면 광주사태를 제쳐놓을 용의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광주항쟁 관련 단체들은 "도대체 무슨 의도로 감히 광주 의거를 정치적 흥정의 제물로 삼는 그 따위 망언을 내뱉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편집자')
다시 손잡고 민추협 만든 김대중과 김영삼
시공간도, 단식의 주체와 그 의미도 다르긴 하지만 먹을거리를 가져와 단식을 방해하고 조롱하는 일은 1983년 김영삼의 23일 단식 때에도 일어났다. 이것에 대해 김영삼은 당시 전두환 쪽에서 불고기, 생선 등 맛있는 음식이 담긴 상을 자신의 병상 앞에 갖다놓고 냄새를 풍기며 방해했다고 밝혔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런 치졸한 짓까지 했을까 싶다. 다시 돌아오면, 1980년에 결정적으로 갈라섰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 단식을 계기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지 않나.
서중석 : 단식을 할 때 이미 김대중과 다시 연대하게 됐는데, 1983년 7월 김영삼은 김대중 측근인 김상현을 만나 함께 민주화 운동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김대중 쪽과 관계를 개선하게 된 것이고, 그러면서 단식 1주년이 되는 1984년 5월 18일 김대중, 김영삼 양쪽의 정치인들이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을 발족했다.
여기서는 "국민이 자신의 정부와 정부 형태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을 때에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봉쇄하고 있는 현행의 모든 제도적 장치와 제약의 개폐를 위해서 투쟁한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5월 18일에 발족을 선언하고 6월 14일에 결성 대회를 열었는데 김영삼이 공동 의장, 김대중은 고문, 김상현은 김대중 쪽의 공동 의장 대행이 됐다.
1985년은 총선이 치러지는 해였는데, 그걸 앞두고 1984년 11월 30일 제3차 해금 조치가 단행된다. 1, 2차 해금 때 제외된 99명 중 84명이 정치 규제에서 풀려났다.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규제된 김종필, 이후락 등 옛 여권 인사 6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옛 야권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다 민추협 소속 정치인이었다. 즉 김대중, 김영삼 쪽이었다.
이 정치 해금을 즈음해서 다음 해에 치러질 선거 대응 방침을 놓고 거부파와 참여파가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 김영삼 쪽은 신당 창당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서 12월 7일 민추협 전체 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총선 참여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졌다.
12월 11일 김영삼과 김대중 고문, 김상현 공동 의장 대행의 이름으로 민추협의 신당 및 총선 참여가 공식 발표됐다. 12월 20일에는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신한민주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당명을 놓고도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과거에 있었던 당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없게, 말하자면 국민들한테 향수가 짙은 과거의 이름을 못 쓰게 했기 때문이다. (1980년 12월 3일 중앙선관위는 이미 해산된 정당의 명칭을 다시 사용할 수 없다고 유권 해석을 내리고, 새로 탄생하는 정당이 사용할 수 없는 당명 목록을 발표했다. 신민당도 그중 하나였다. '편집자') 고심한 끝에 과거에 한 번도 없던 이름인 신한민주당으로 정했다. 그걸 줄이면 신민당이 된다고 해서, 신민당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창당 준비위원장으로는 이민우가 추대됐다.
그렇게 해서 1984년은 저물고 1985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985년 2·12총선을 통해 민주화를 향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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