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비상 조치 카드 만지작거린 전두환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은 1986년 5·3 인천 집회 이후 민주화 운동 세력과 야당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러면서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 사건, 건대 사태, 금강산댐 사기극, 김일성 사망 오보 소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런 속에서 전두환 쪽에서 비상 조치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 내용은 무엇이었나.
서중석 : 전두환은 1986년 9월 하순경부터 비상 조치 카드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9월 29일 신민당이 국회 개헌 특위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로부터 3일 전인 9월 26일 아침 장세동 안기부장 등이 비상 시국 대비 조치 방안 보고를 준비하기 위해 회동했다. 그날 오후에는 전두환이 장세동,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 박철언 등을 불러 비상 조치로 계엄령을 선포해 군을 출동시키는 것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한마디로 판을 싹쓸이하겠다는 것이었다.
(박철언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모든 것이 야당과 무능한 정치인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고 "계엄령은 6개월 정도는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아울러 북한의 군사 상황, 88올림픽, 혼란 극복 등에서 계엄 명분을 찾으라고 지시하고 국회 해산, '불순한' 국회의원 검거 및 군법회의 회부, '문제 학생'을 구속해 3개월 정도 교육시킬 것 등 구체적인 실행 방안도 제시했다. 전두환은 "유신 헌법은 집권 연장을 위한 것이므로 내외의 비판을 받았다"고 지적한 후 자신이 선포하려는 계엄은 "장기 집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 안정,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자신은 박정희와는 다르다는 얘기를 여기서도 빼놓지 않았다. '편집자')
개헌 특위 중단 발표에 이어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10월 10일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 책임제를 국민에게 직접 선택케 하자"고 제안했다. 선택적 국민 투표를 하자는 것이었다. 바로 이날 박철언은 전두환의 극비 지시에 따라 비상 조치를 위한 구체적인 스케줄 작성에 들어갔다. 이 비상 조치 스케줄 작성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10월 14일 유성환 의원 발언이 나왔다. 그러자 전두환이 '잘 걸렸다'고 하면서 10월 17일 유성환 의원을,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 내에서 한 발언인데도, 잡아 가둔 것이다. 그러면서 뒤이어 금강산댐 사건을 발표하게 된다.
유성환 의원을 전격 구속한 다음 날인 10월 18일 안기부, 행정부, 청와대, 민정당의 고위 간부들이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장세동은 비상 선진 계획, 비상 조치 계획에 이런 이름을 붙였는데, 그걸 설명했다. 이규효 건설부 장관이 금강산댐 공사에 대해 터무니없는 발표를 한 10월 30일, 전두환은 비상사태 시 김대중과 김영삼을 보안사에서 연행해 안기부에서 수사하라고 장세동을 통해 지시했다. 지금 얘기한 것들, 그러니까 비상 조치 관련 사항은 다 비밀리에 이뤄졌다. 당시 공개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직선제 개헌 수락하면 불출마" 선언한 김대중
프레시안 : 전두환 쪽에서 드러내놓고 진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김대중이 이 무렵 보인 모습을 떠올려보면 김대중 쪽에서도 비상 조치 관련 사항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어떠했나.
서중석 : 금강산댐 규탄 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던 11월 2일에도 전두환은 11월 8일 자정을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비상 조치를 발표할 예정이며, 김대중을 정계에서 은퇴시켜 재수감과 외국행 중 하나를 택하게 하겠다는 지침을 장세동을 통해 내렸다. 이런 지침은 당연하게도 극비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또 이건 외부로, 그것도 김대중과 김영삼 쪽으로 흘러나가도록 돼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전두환은 야당에 1980년 5·17쿠데타 이후의 공포 분위기를 상기시켜 정국을 자기 의도대로, 그러니까 직선제 개헌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끌어가려 했다. 아주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11월 5일 김대중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현 정권이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 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유명한 불출마 선언을 했다. 김대중은 성명서에서 전두환 정권이 "모든 민주 세력에 대하여 1980년과 똑같은 처절한 집중 공격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두환이 1980년에 저지른 것과 똑같은 짓을 할 지도 모른다', 김대중이 이런 위기의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무렵 전두환이 계속 몰아붙일 수만은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11월 4일 미국 중간 선거가 치러졌는데 여기서 레이건의 공화당이 패하고 민주당이 상·하원을 모두 석권했다. (이 선거 전 상원에서는 공화당, 하원에서는 민주당이 다수당이었다. 민주당은 이 선거에서 압승하며 하원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상원에서는 다수당 위치를 회복했다. 그렇게 해서 1980년 이후 6년 만에 상원과 하원을 모두 지배하게 됐다. '편집자') 전두환의 독재는 레이건의 방조 아래 이뤄지고 있지 않았나. 전두환 정권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박철언은 자신의 회고록에 미국 의회 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오면서 권력 핵심의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고, 겉으로는 여전히 비상 조치 발동도 언급했지만 그해 연말까지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고 썼다.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의 체질이 바뀐 건 물론 아니다. 폭압은 계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11월 7일 청계피복노조 등 14개 노조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것에 이어 8일에는 재야 단체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본부 및 서울지부 등 4개 지부에 대해서도 해산 명령을 내렸다. 12일 새벽 경찰은 해머와 산소 용접기까지 동원해 민통련 본부 사무실 문을 부수고 난입했다. 경찰은 농성 중인 50여 명을 몰아낸 다음 사무실을 강제 폐쇄했다. 이 과정에서 성유보 사무처장 등이 구속됐고 김승균, 이재오, 이해찬 등이 수배됐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및 영구 집권 음모 분쇄 범국민대회를 11월 29일 옛 서울고 자리에서 열고자 했다. 그러자 11월 2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이 대회를 불법 대회로 규정했다. 또한 이 대회 직전에 전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는데, 이것은 이 대회에 으름장을 놓는 것으로 비쳤다.
29일 대회 시작 전, 지방에서 차출한 7000여 명을 포함해 3만 2000여 명의 경찰 병력이 옛 서울고 부근과 서울 곳곳에 쫙 깔렸다. 김영삼이 전날 밤부터 연금되는 등 등 많은 사람이 연금됐다. 그런 속에서도 이날 1만 5000여 명이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연행된 사람이 2255명, 구속된 사람이 27명에 이르렀다. 미국 언론은 최대의 경찰 동원으로 정부의 강경한 의지를 과시했다며 '야당 데모'가 아닌 '정부 데모'였다고 보도했다. 전두환은 경찰을 동원해 신민당의 범국민대회를 봉쇄한 데 이어 야당 분열 책동에 돌입했다.
난데없이 출현한 이민우 구상, 심한 내분에 휩싸인 신민당
서중석 : 12월 24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송년 기자 회견에서 이민우 구상이라는 걸 발표했다. 지방 자치제 실시, 언론 자유 보장 등 7개 항의 민주화 조치가 이뤄지면 내각제 개헌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민당은 그렇지 않아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 몰아치는 검은 폭풍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난데없이 이민우 구상이라는 복병까지 출현하면서 혼선을 거듭하고 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김대중, 김영삼 측은 이민우 구상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렇지만 이민우 구상은 전두환 정권만이 아니라 미국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신민당 내에서도 이철승 등의 비주류는 이민우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이민우가 사전에 전두환 쪽과 교감하며 그러한 구상을 발표했던 것인가?
서중석 : 그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선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이민우는 유진산의 수석 상좌 노릇을 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유진산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본래 그 성향이 아주 보수적이라는 얘기를 듣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1986년 봄 뜨거운 개헌 열기를 맞아 곤경에 처했던 전두환은 5·3 인천 사태를 계기로 개헌 열기를 무산시키기 위해 공포 정치와 정치 조작을 통한 전면 공세를 펼쳤다. 그로 인한 살벌한 분위기에서 이민우 구상까지 나타나 야당은 수습하기 어려운 분열을 맞이하게 됐다.
그렇지만 전두환의 초강경 초토화 공세는 박종철 고문 사망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느냐. 전두환의 초강경 초토화 공세는 민중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심하게 얘기하면 사상누각의 초강경 초토화 공세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 사망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박종철 죽게 만든 경찰의 궤변,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
프레시안 : 고문으로 박종철을 죽게 만든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박종철이 당시 학생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 시기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박종철 한 명뿐이었던 것도 아니다. 전두환 정권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전두환 집권기만 놓고 봐도 여러 학생, 노동자 등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억울한 죽음에 더해 그 진실이 묻히는 일도 적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그리고 극우 반공 체제의 속성상 박종철의 죽음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다른 경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면서 6월항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밑거름이 됐다. 어떻게 해서 그런 차이가 생겼는지 짚어봤으면 한다. 우선 운명의 1987년, 어떻게 시작됐나.
서중석 : 전두환은 1987년 대통령 선거의 해를 맞아 1월 12일 국정 연설에서 헌법 문제에 대해 끝내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중대한 결단"에는 국회 해산도 포함되는 것으로 그 당시에 알려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호헌 조치도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틀 후인 1월 14일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끝에 숨을 거뒀다.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은 정국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사실 박종철 고문 사망은 까딱하면 묻히거나 변색될 뻔했다. 그런데 1월 15일 오전 10시경 중앙일보 기자가 한 검찰 간부로부터 우연히 "경찰들 큰일 났어"라는 말을 듣고 취재에 나섰다. 서울대 언어학과 박 모라는 학생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 기자는 돌아가던 윤전기를 세워 기사를 싣게 했다. 그래서 1월 15일 자 중앙일보 석간, 오후 4시경에 받아볼 수 있는 제2판에 박종철 사망 소식이 사회면 2단 기사로 실렸다.
이 기사를 본 동아일보에서도 긴급히 취재에 나서 이 날짜 지방판에 크게 보도했다. 특종은 중앙일보가 했지만 정작 큰 사건으로 다룬 건 동아일보였다. 그러면서 외신까지 이 소식을 다루게 됐다.
이렇게 사건화가 됐는데도 경찰 관계자들은 딱 잡아뗐다. 그러나 15일 저녁때가 됐을 때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민창은 치안본부에서 14일 아침에 박종철을 연행해 심문했는데 "심문 시작 30분 만인 오전 11시 20분경에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 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며 책상 위로 쓰러져 긴급히 병원으로 옮기던 중 차 안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 유명한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는 명언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1월 16일 자 신문을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이 곧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날 동아일보 기사를 읽었다면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억울하게 자식 잃은 부모의 애끊는 외침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했나.
서중석 : 11면 사회면에 꽤 자세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거기에는 한양대 부속 병원에서 황적준 집도로 사체 부검을 했는데 사체 오른쪽 폐에서 출혈반(피하나 점막에 출혈로 인해 얼룩진 무늬가 생긴 병증)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부검을 집도한 의사는 이것에 대해 "전기 충격 요법을 쓰거나 인공호흡을 했을 때 생길 수도 있다"고 밝혔다. 부검에 입회한 박종철의 삼촌 박월길이 사체의 머리 한쪽에서 피멍 자국을 봤고 뒤통수, 목, 가슴 등 몸 곳곳에 피멍 자국이 있었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분명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는 쇼크사가 아닌 고문사로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다음 날인 1월 17일 동아일보는 박종철 사건을 크게 다뤘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로 시작하는 김중배 논설위원의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이날 황열헌 기자가 '창'란에 쓴 기사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자식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아픔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기사였는데, 1월 16일 벽제 화장장에서 화장한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썼다. <아버지 박 씨는 아들의 유골 가루를 싼 흰 종이를 풀고 잿빛 가루를 한 줌 한 줌 쥐어 하염없이 (임진강) 샛강 위로 뿌렸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 박 씨는 가슴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박 씨는 끝으로 흰 종이를 강물 위에 띄우며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라고 통곡을 삼키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우리 자식이 못돼서 죽었소." 박종철 부친 박정기의 이 말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아드님을 왜 못됐다고 하십니까"라고 기자가 묻자 박 씨는 "이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된 거지요"라고 답했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으려 양심에 따라 행동한 많은 사람이 수십 년간 극우 반공 체제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절규였다. '편집자')
은폐 시도하던 전두환 정권, 닷새 만에 마지못해 고문사 인정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은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고문 사실을 파악한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한 것도 그런 차원 아니었나.
서중석 : 이 사건에 대해 일부 언론이 용기 있게 보도했지만, 사건이 커진 데에는 의사들의 용기도 작용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외부인으로 박종철의 시신을 처음으로 본 사람은 내과의 오연상이었다. 오연상은 검안 소견서에 고문, 그것도 물고문 같은 것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을 썼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한 소견이 보도된 후 협박 전화가 빗발쳤지만 오연상은 굴복하지 않았다.
박종철 사체를 부검한 황적준도 경찰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 황적준은 경찰 고위 간부들로부터 '감정서 내용을 쇼크사로 해서 보고하라', '감정서에서 모든 외상을 삭제하라. 검찰도 협조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같은 협박과 강요를 거듭 당했다. 1월 16일 오후 4시 30분경에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황적준한테 100만 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네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적준도 자신이 본 대로 감정서를 썼다.
결국 1월 19일 오전 강민창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다고 발표했다. 사건 발생 닷새 만에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다음 날(1월 20일) 전두환은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김종호 내무부 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해임하고 정호용과 이영창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때 정호용이 내무부 장관이 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정호용은 광주 학살 문제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었지만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동기로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고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 연결돼 있었다. 정호용은 전두환, 장세동과 맞설 수 있는 배짱도 있었다. 그런 정호용이 내무부 장관이 된 데에는 전두환 정권 내부의 복잡한 사정이 작용했다.
1월 17일 당정 협의에서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은 이 사건 관련자들을 엄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무부 장관 경질까지 요구했다. 이춘구는 박정희 정권 때 김재규처럼 합리적인 면이 많았다. 군으로부터 상당히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더라. 하여튼 이때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은 내무부 장관 경질을 자기들이 건의할 수는 없다고 봤다. 그래서 '대통령한테 건의해달라'고 이춘구한테 얘기했다.
1월 19일 이춘구는 전두환을 만나 직접 얘기했다. 한참 후에야 전두환은 내무부 장관을 경질하는 데에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이춘구가 정호용을 추천하자 전두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다음 날 이춘구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다시 정호용을 추천했다. 그제야 전두환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춘구가 정호용을 추천한 건 중요하다. 나중에, 그러니까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 사망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폭로되지 않나. 그것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전면 개각을 하게 되는데, 그때 정호용은 전두환의 분신으로 통하던 장세동을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져 안기부장을 그만두게 만들었다. 그건 정호용만이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장세동을 물러나게 한 건 상당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자식 키우는 것이 두렵다", 박종철 사건에 분노한 여성들
프레시안 :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분위기, 어떠했나.
서중석 : 박종철 고문 사망에 대해 강하게 항의한 것은 여성들이었다. 박종철 사망 사실이 보도된 1월 15일 그날 바로 항의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5일 오후 8시경부터 구속자 가족 등 20여 명이 박종철의 죽음에 항의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 16일 오전 10시에는 여성 50여 명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향해 행진했다. 그날 오후 5시 30분에는 민가협 관계자 40여 명이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농성했다.
왜 여성들이 이렇게 신속하게 항의 시위를 했을까. 1960년 제2차 마산의거(4월 11~13일)를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해 4월 11일 김주열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을 때 학생들도 분노했지만 어머니들이 병원으로 달려가고 시위에 적극 나섰다. 어머니들은 따로 모여서 '죽은 학생 책임지고 이 대통령 물러가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4·19 때조차 학생들이 "이승만 물러가라"는 얘기를 하기가 어려웠는데, 4월 11일에 이미 어머니들이 그렇게 외친 것이다. 얼마나 분노했으면 그랬겠나. 그 점은 198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박종철이건 김주열이건 어떤 어머니든지 자기 자식도 독재 권력에 그와 같이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신속하게, 적극적으로 항의 시위를 한 것이다.
사실 신문에서 박종철 사건을 크게 다루게 된 데에도 여성들의 항의가 큰 역할을 했다. 여성들은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가슴이 떨려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땅의 어느 부모에게도 이번 일은 결코 남의 일로 여겨질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 두렵다"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대해 항의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1월 17일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그 전날만 해도 당직자 간담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으나, '박종철의 죽음이 단순한 사망이 아니다'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자 17일에야 확대 간부 회의를 열고 성명을 발표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1986년 5·3 인천 사태 이후 야당과 재야, 학생 운동권이 분열돼 있었는데 박종철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연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근태 고문 사건(1985년)으로 생긴 고문 공대위는 박종철 사건 관련 고문 폭로 대회를 열기로 1월 17일 오전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2·7 추도 대회를 열게 된다.
박종철의 죽음은 전두환이 밀어붙인 초강경 초토화 정책의 필연적 귀결
프레시안 : 1987년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을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집무 의욕"에서 비롯된 "불상사"로 규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소수 좌경 용공분자를 척결할 때까지 경찰이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계속 협조해주기 바란다."
이런 식으로 '체제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다가, 잘해보려다가 저지른 우발적인 실수'라고 왜곡하는 것은 이 사건뿐만 아니라 부천서 성고문 사건(1986년) 등 다른 여러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행태다. 그렇지만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의 발생 과정, 조직적 은폐 시도 등 모든 면에서 '일부 경찰의 우발적인 실수'와는 거리가 멀지 않았나.
서중석 : 박종철의 죽음은 엄밀히 따지면 전두환과 장세동, 김종호 내무부 장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986년 하반기에 전두환은 민주화 운동을 초토화하기 위해 계속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 그러면 장세동은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고, 김종호는 돌격 대장 노릇을 했다. 전두환은 자신을 꼭 빼닮은 사람들을 핵심 요직에 앉혔다. 박종철이 고문 사망하게 된 데에는 전두환의 분신으로 통하던 장세동과 비슷하게 전두환의 지시를 받들어 강경 일변도로 나갔던 김종호 장관, 그리고 포상이나 진급을 위해 이른바 '공적'을 세우는 데 급급했던 대공 수사관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신민당이 1986년 11월 29일 열려고 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및 영구 집권 음모 분쇄 범국민대회가 경찰에 의해 봉쇄됐다고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나. 그다음 날(11월 30일)에 열린 당정 회의에서 치안 총수인 김종호 장관은 그 대회에 대해 '서울 심장부에서 궐기해 폭동화를 기도한 것이 명백하다'며 이 기회에 김대중과 김영삼을 구속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앞서 1986년 10월 17일 치안본부에서는 주요 수배자 54명을 조속히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주요 수배자를 검거하면 특진과 격려금이 따랐기 때문에 '공적'을 세우려 경쟁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박종철이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87년 1월 13일 김종호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러 격려하는 동시에 초강경 지침을 다시 내렸다. 내무부 장관이 남영동 대공분실에 직접 와서 이렇게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것에 대해 한 저술가는 내무부 장관이 대공분실에 들러 그렇게 지시한 건 '한두 명쯤 죽여도 괜찮다'는 살인 허가증을 발급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박종철은 우연히 탁 치니 억 하고 죽은 게 결코 아니었다. 박종철의 죽음은 전두환의 초강경 초토화 작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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