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6월항쟁에 굴복해 6·29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게 핵심이다
프레시안 : 1987년 6·29선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는가를 두고 그간 논란이 적지 않았다.
서중석 : 6·29선언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그 과정을 보자. 많은 사람이 굉장히 궁금해한 것이 6·29선언의 주역이 노태우냐 전두환이냐, 이것이었다. 처음에는 노태우가 독자적으로 결단해 이 선언을 내놓은 것처럼 보도됐는데 조금 있으면 정반대로, 그러니까 전두환이 주도한 것처럼 얘기가 많이 돌고 그랬다.
6·29선언과 관련해 제일 중요한 문제는 6월항쟁에 굴복해 6·29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 선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나왔으며 왜 그와 같은 깜짝쇼 형태를 취했는지는 부차적인 중요성만 가진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도 뉴라이트나 수구 냉전 세력, 극우들은 6·29선언이 나오게 된 과정에 대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 하면서 그것에만 중요성을 부여하는 걸 볼 수 있다.
'6·29선언으로 우리도 민주화에 큰 공'? 수구 냉전 세력의 후안무치한 궤변
프레시안 : 지적한 것처럼 6월항쟁에 굴복해 6·29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게 핵심인데도, 그걸 가리려는 이들이 있다. 예컨대 뉴라이트 계열인 박효종 교수의 주장에서도 그러한 점은 잘 드러난다. 박효종은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유신 체제를 찬양하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펴냈던 교과서포럼의 공동 대표를 지낸 인물이다. 2012년에는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으로서 박근혜 후보를 위해 일했고, 박근혜 후보 당선 이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위 간사를 거쳐 2014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박효종은 2007년 '6·29 민주화 선언 알고 있는가'라는 토론회에서 "6·10항쟁 못지않게 6·29선언도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6·29선언이 민주주의 이행에서 매우 중요했음에도 폄하되고 있다며,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되는 6·29선언을 6·10항쟁과 "하나의 패키지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들의 요구와 시대정신에 순응해 권위주의를 해체하고자 했던 의지와 선택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월항쟁의 성과 중 절반은 6·29선언을 결단한 군부 독재 세력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수구 세력 역할론을 내세워 자신들도 민주화에 공헌한 것처럼 포장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6월항쟁 이후 '민주화는 너희 공이지만 산업화는 우리 공임을 인정하라'는 모양새를 취했던 수구 세력이 2000년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것이고 민주화도 알고 보면 우리 것'이라는 궤변을 퍼뜨리는 간교한 전략을 구사한 것과도 닿아 있다고 본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그동안 6·29선언과 관련해, 주로 1990년대 초중반에 그런 문제를 가지고 논의를 많이 했지만, 처음 발표됐을 때 보도된 것처럼 노태우의 고뇌에 찬 결단의 산물인가, 그렇지 않고 나중에 전두환 쪽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두환의 주도 아래 나온 작품인가, 이게 한때 화제가 됐다. 후자라면 6·29선언의 주역은 전두환이고 노태우는 전두환의 각본대로 연기한 배우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게 있다. 뭐냐 하면,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6·29선언으로 우리도 민주화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전두환·신군부와 수구 냉전 세력의 후안무치하고 철면피한 궤변, 견강부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6·29선언과 관련해 제일 중요한 건 6월항쟁에 굴복해 6·29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그 부분을 애매하게 처리한다. 그러면서 전두환·노태우 측이 6·29선언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처럼, 시민들의 저항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게 아닌 것처럼 호도하거나 유도했다. 이런 사람들은 전두환이 1987년 6·10 국민 대회 며칠 후부터 직선제를 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에 각별히 의미를 부여하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에 적극 협력했던 정치인이나 언론인 가운데 일부, 그리고 뉴라이트는 '민주화 운동 세력만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권력 내부의 결단에 의한 6·29선언이 단적으로 그걸 입증한다. 권력 내부의 결단으로 6·29선언을 해 평화적 권력 이양이 이뤄진 것은 민주화 운동 못지않게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이런 논리를 폄으로써 전두환·노태우와 자신들도 민주화에 큰 공이 있다고 강변했다. 또한 질문에서 얘기한 것처럼 '민주화는 너희 공로이지만 산업화는 우리 공로'라고 예전에 주장하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공로이고 민주화에 대해서도 우리 공로가 인정돼야 한다'는 강변을 하기에 이르렀다.
(수구 세력은 6·29선언의 의미를 실제와 다르게 부풀린 것에 더해, 민주화를 이룩한 핵심 세력이 자신들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2011년 3월 4일 열린 <박종철 열사와 6월 민주화 운동> 출판 기념회에서도 그러한 궤변이 난무했다. 지은이는 1987년 박종철 사건 담당 검사 중 한 명인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 이 자리에서는 "6월 민주화 항쟁은 안상수 대표의 양심적인 정의감이 이뤄낸 일"(박희태 국회의장) 같은 듣기 민망한 말이 쏟아졌다. 안상수가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 은폐·조작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이용하는 행위를 이제라도 중단하라"(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 없었다.
또한 한때 반정부 투사였다가 수구 세력의 일원이 된 이들은 이 자리에서 민주화 운동사를 왜곡하는 궤변을 쏟아냈다. "한나라당이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중심 세력이었다."(김덕룡 대통령 특보) "많은 분이 한나라당을 독재당, 민주주의 탄압당이라고 하는데 우리 한나라당에 이렇게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일꾼들이 많다.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우리 한나라당에 있다."(김문수 경기도지사) "한나라당에는 민주화 시절 잘 먹고 잘살았던 사람만 있는 웰빙당 이미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재오 특임장관)
2012년 김무성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6월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거짓 주장을 하며 "새누리당 안에 나 같은 민주화 세력이 있다. 우리는 6월항쟁을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강변한 것도 김문수 등의 2011년 궤변과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탈취하려는 일련의 시도엔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것에 관해 기자 시절인 2012년에 쓴 기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6월항쟁 이후, 특히 1990년대 들어 보수를 자임하는 이들이 심심찮게 한 이야기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협력'이다. 민주화가 대세로 떠오르자, 자신들의 과거 중 독재에 빌붙었던 부분은 슬쩍 가리고 산업화를 상징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게는 '그래, 너희들의 민주화 공로는 인정하마'라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이 상징으로 내세운 '산업화'를 온전히 이들의 업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을 빼놓고 산업화를 논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을 '수출 역군'이라 부르며 혹독하게 일을 시켰던 자칭 '산업화 세력'은 1990년대 들어 김문수 같은 과거의 노동 운동가를 개별적으로 흡수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전태일'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산업화'라는 상징을 확보한 이 세력은 어느 순간부터 '민주화'의 역사마저 가져가려 시도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협력'이라는 표현을 여전히 쓰면서도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것, 민주화(의 일부)도 알고 보면 우리 것'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이다. 자신들이 민주화를 이룬 주역이라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정치인들, 이를 지원하는 뉴라이트 인사 등의 행보는 모두 이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이들에게 6월항쟁을 비롯한 현대사는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더 공고하게 하는 데 쓰이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분명한 건, 6월항쟁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주물럭거려도 되는 노리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6월항쟁이 이들의 것이 아니라면, 1980년대 운동권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즐비한 야권의 것일까? 물론 '아니올시다'이다. (…) 6·10항쟁과 6·29선언이 하나의 패키지라는 박효종 교수의 주장과 달리, 6월항쟁과 패키지로 묶여야 할 것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다. 그러나 386 정치인들을 비롯한 야권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 분야로 민주주의를 심화·확대한다는 '노동자 대투쟁'의 과제를 대부분 저버렸다. 지금의 야권이 연이어 집권하고 386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때,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드러났던 인간다운 삶을 향한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6월항쟁은 새누리당 정치인들의 것도, 386으로 대표되는 야권 정치인들의 것도 아니다.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해 죽이는 정권을 더는 참고 볼 수 없어 거리로 나선 수많은 시민들의 것이다. 질식당한 민주공화국을 살려낸 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 했다' 식으로 정치적 목적 달성 혹은 입신양명을 위해 6월의 기억을 우려먹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갔다. 역사를 만든 건 이들이다. 6월항쟁을 노리개쯤으로 여기거나 정치적 자산으로 써먹기 전에, 이런 이들에게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편집자')
진보 세력이 1980년대의 현대사 인식에 머물러 있어 6·29선언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또 199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신드롬이 무서운 기세로 팽창하던 분위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6·29선언의 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6·29선언이 왜 나왔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은 상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강변과 관련해 주목되는 책이 1992년에 나온 <전두환 육성 증언>이다.
위신 실추한 전두환 측, '6·29선언 주역은 전두환' 주장 유포
프레시안 : 이 책이 그 시기에 나온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서중석 : <전두환 육성 증언>은 전두환의 공보 비서관이었던 김성익이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전두환이 주로 청와대 회의에서 얘기한 것의 일부를, 어디까지나 일부인데, 발췌해 편집하고 김성익 자신의 촌평까지 붙여 출판한 책이다. 노태우 정권 말기이던 1992년 전두환 쪽에서 이 책을 낸 이유는 명확하다.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긴 지 두 달 만에 치러진 1988년 4월 총선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지 않았나. 그래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전초전으로 그해 11월에 5공 비리 청문회가 열렸다. 이 청문회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의 형제를 비롯한 그 친인척이 줄줄이 구속됐다. 대학생과 시민들은 전두환·이순자 구속을 위한 궐기 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전두환 체포 결사대를 조직해 연희동으로 달려갔다. 결국 그해 11월 23일 전두환·이순자 부부는 짤막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떠났다. 현대판 귀양이었다. 전두환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지가 나빴는데,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위신이 실추할 대로 실추했다. 전두환 쪽에서는 이걸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전두환 육성 증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전두환 기준으로 보면 노태우는 배신자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그런 노태우에게 앙갚음을 한다고 할까, 노태우 쪽을 폄하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전두환 육성 증언>에서 김성익은 촌평을 통해 전두환과 6·29선언을 연결시키려는 주장이나 논리를 폈다. 그렇지만 그게 구체성이 약하다. 또 <전두환 육성 증언>에 수록된 '전 대통령이 말한 6·29의 전말'을 보면, 전두환 특유의 견강부회와 앞뒤가 안 맞는 자가당착적인 주장, 횡설수설이 많다.
<전두환 육성 증언>이 나왔으면 노태우 측에서 반박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여러 해 동안 반박이 안 나왔다. 전두환 주장이 옳다는 걸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6·29선언은 전두환에 의해 나온 것이라는 식으로 분위기가 많이 조성됐다.
노태우의 뒤늦은 반박
프레시안 : 노태우 쪽의 반박은 언제 나왔나.
서중석 : 노태우의 반박은 한참 후에, 그것도 세상이 많이 바뀌어 사람들이 6·29선언에 별 관심이 없었던 1999년에 나왔다. 그해 <월간조선> 6월호에 조갑제가 노태우와 인터뷰한 '노태우 육성 회고록'이 실렸다. 그리고 6·29선언 20주년인 2007년에 조갑제의 이 1999년 인터뷰가 주된 내용을 차지하는, 6·29선언과 관련해서 특히 그런데, <노태우 육성 회고록>이 출판됐다.
그런데 2007년에 이 책이 나왔을 때에는 '전두환이 6·29선언의 주역이고 전두환은 일찍부터 직선제를 하려고 했다'는 주장, 앞에서 얘기한 '우리도 민주화를 하려고 했다'는 수구 냉전 세력 또는 뉴라이트의 강변이 여기서도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노태우 책이 너무 늦게 나온 것이다.
또 수구 냉전 세력이든 뉴라이트든 그런 정설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자신들한테 불리한 책을 가지고 논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노태우 책이 나왔으니까 자기들 주장이 많이 뒤집어지는 것이었지만 그걸 가지고 논쟁은 안 한다, 이 말이다. 지난 얘기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자기들한테 손해니까. 특히 뉴라이트는 항상 자기들한테 유리한 것만 가지고 얘기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전두환 증언에도, 노태우 회고에도 6·29선언 부분이 소략한 이유
프레시안 : 노태우로서는 전두환 쪽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노태우 육성 회고록>에 6·29선언 관련 내용을 많이 담는 게 자연스러울 터인데, 실제로 어떠한가.
서중석 : 6·29선언 20주년에 <노태우 육성 회고록>을 낸 건 6·29선언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노태우 자신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 아니겠나. 따라서 6·29선언에 대한 비화가 이 책에 풍성히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놀랍게도 또 아주 신기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전두환 육성 증언>보다는 분명히 <노태우 육성 회고록>이 구체적이긴 하다. 그런데 두 책 다 기이하게도 6·29선언 부분이 아주 소략하다. 전두환 쪽이나 노태우 쪽이나 6·29선언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둘 다 서로 자기가 주역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본다면 자세하게 얘기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전두환 육성 증언>, <노태우 육성 회고록>을 보면 6·29선언에 대한 내용이 아주 조금밖에 없다. 아주 조금밖에 없는 그걸 가지고 뉴라이트나 극우,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이용해먹는다, 이 말이다. 그 점이 아주 중요하다.
왜 그렇게 소략할까. 그건 사실은 두 사람이 공개할 수 있는 것보다 숨기고 싶은 것, 켕기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 아니겠나. 그와 함께 6·29선언이 전두환의 주장과 달리 오랜 각고의 산물이 아니라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직선제 논의 시점에 대한 전두환, 노태우, 이만섭의 엇갈리는 주장
프레시안 : 하나씩 짚어보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직선제 수용 문제를 언제부터 논의했나.
서중석 : 직선제 논의 시점이 언제냐. 이걸 가지고 과거에 논란이 많이는 아니고 조금 있었는데 그 부분을 보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직선제 얘기를 꺼낸 시점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전두환은 <전두환 육성 증언>에서 직선제에 대해 두 차례 언급했다. 두 번밖에 없고, 그것도 나중에 얘기를 한 것이다. 하나는 6·29선언 전날인 6월 28일 김성익에게 2주일 전에 노태우 대표에게 "직선제를 받도록 시킨 것"이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직선제를 얘기한 시점은 6월 14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장소나 시간도 안 나오고,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는 얘기도 안 나온다. 그냥 이렇게 짤막하게 얘기했다는 서술만 있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김성익이 1987년 6월에 들어와서 들었다고 하면서, 이것도 언제 들었는지 그 시점이 명확하지 않은데, 전두환이 6월 15일경 노태우를 안가로 불러 얘기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두환이 일찍부터 직선제를 생각했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는 아주 불분명하고 흐리멍덩하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경우나 구체적이지 않고, 명확하지도 않은 내용이다.
프레시안 : 노태우 쪽은 어떠한가.
서중석 : <노태우 육성 회고록>, 그리고 그것보다 나중인 2011년에 나온 노태우 회고록을 보면 노태우가 1987년 6월 20일 이만섭 국민당 총재와 회담을 할 때 '전두환이 직선제를 권유했다'는 점을 완강하게 부정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주장을 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부분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날 회담에서 이만섭이 직선제를 하자고 얘기하니까 노태우가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4·13 (호헌) 조치를 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전 대통령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전 대통령이 안 된다고 할 텐데 그게 가능할 것인가", 이렇게 걱정했다고 <노태우 육성 회고록>에 나온다.
이 부분에서 노태우가 하는 말과 행위는 전두환의 주장과 달리 구체적이고 논리적이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인 이만섭이 노태우의 두 책이 나왔을 때 살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태우가 거짓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만섭 회고록 <나의 정치 인생 반세기>를 읽어보면 노태우가 주장한 것과 또 조금 다르게 나온다.
프레시안 : 이만섭은 회고록에 어떻게 썼나.
서중석 : 이만섭 회고록에는 6월항쟁 시기에 노태우를 두 번, 즉 6월 20일과 22일에 만났는데 노태우가 했다는 얘기가 두 번째 만났을 때인 6월 22일에 나왔다고 돼 있다. 이만섭은 명확하게 두 차례에 걸쳐 만났다고 썼고 그게 더 논리적이다.
6월 22일 노태우를 두 번째 만났을 때에 대해 이만섭은 이렇게 썼다. "내가 설득하는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노 대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직선제를 하자고 해도 전 대통령이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그러니까 노태우의 주장을 간단히 얘기하면 '전두환은 6월 20일 또는 22일 전에는 나한테 직선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이것이다. 그 주장을 강력하게 편 것이다. 6·29선언의 주역을 둘러싼 논란의 전초전에서 전두환 쪽 주장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또 노태우는 6월 20일 민정당 기획팀에서 직선제를 수용하기 어려운 이유로 첫째, 선거에서 패배한다는 점, 당연하게도 그때 다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데, 둘째, 대통령이 결코 직선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추진할 수 없다는 점을 제시했다고 노태우 회고록에 썼다. 여기서도 노태우는 구체적인 얘기를 했다. 이 주장이 사실과 어긋난다면 민정당 기획팀 이쪽에서 가만히 안 있을 수도 있었다. 그쪽에는 전두환계도 있지 않았나.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김용갑의 증언
서중석 :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김용갑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 사람은 극우인데, 어쨌건 김용갑이 1987년 6월 14일 박영수 비서실장 등에게 직선제를 받아들이라고 얘기했고 비서실장은 그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김용갑의 이러한 주장은 과대 포장됐거나 수긍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하여튼 이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은 6월 17일 저녁 노태우를 따로 불러 직선제 수용 방안을 검토해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김용갑이 이렇게 얘기하는 게 나온다. 6월 18일 김용갑 자신이 전두환을 만나 직선제 수용을 강력히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전두환이 '지금 바로 노태우에게 가서 그대로 설명해줘라', 이렇게 지시해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 증언에 따른다면 전두환은 6월 19일에도 노태우를 만나 17일보다 강한 어조로 직선제 수용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도 전두환이 자신의 견해라고 하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직선제를 받아들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말했으니 검토해보라고 했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이 증언들이 얼마만큼 신뢰성이 있느냐 하는 건 2차적 문제이고, 우선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내용이 그렇다.
그렇지만 전두환과 김용갑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 만약 전두환이 자신의 견해라고 하면서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얘기했다면 노태우가 이만섭에게 그렇게 얘기할 리가 만무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전두환과 노태우는 엄격한 상명하복 관계에 있었다. 이런 것들보다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 더 살펴볼 만한 기록이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거짓말 경쟁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노태우 회고록을 보면, 노태우가 6월 17일 밤 박철언을 집으로 불러 이렇게 얘기했다고 나온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 그러면서 초안을 만들라고 말했고, 이 지시를 받은 박철언이 6월 18일부터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노태우는 박철언이 20일과 22일 두 차례 보고를 하고 자신의 보완 지시를 받아 수정 작업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전두환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두환의 지시도 없이 17일에 노태우 스스로, 단호하게 '직선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전두환이 주장한 것 못지않게 진실이라고 보기가 매우 어렵다.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라면 그전에 나온 <노태우 육성 회고록>에 이게 들어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라면 박철언 회고록에도 담겨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박철언이 자세하게 쓴 그 회고록에도 그에 관한 내용이 한마디도 없다. 사료를 평가할 때, 나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건 대개 가짜로 만들어서 주장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노태우 회고록에 들어 있는 이런 주장을 볼 때 전두환과 노태우는 거짓말 경쟁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볼 수밖에 없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전두환 회고록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것에는 또 어떠한 기가 막힌 주장이 실려 있을지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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