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6·29선언이 나온 건 계엄 선포나 친위 쿠데타를 할 수 없었기 때문
프레시안 : 1987년 6월항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했다. 왜 이 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서중석 : 6·29선언과 관련된 사항 중 제일 큰 것은 왜 군이 출동하지 않았나, 왜 군을 출동시키지 않았나 하는 문제일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한다면, 6·29선언이 나오게 된 것은 계엄이 선포되거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게 정곡을 찌르는 것일 것이다.
6·10 국민 대회 바로 그날부터 6·26 국민 평화 대행진까지 상황을 보면 경찰은 6월항쟁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부산, 대전, 진주뿐만 아니라 서울, 광주, 순천, 여수, 목포, 전주, 익산, 천안, 청주, 대구, 안동, 춘천, 원주, 성남, 안양 등 전국의 많은 곳에서, 또는 전국 어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곳곳에서 경찰력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났다.
경찰이 치안을 유지할 수 없다면 권력이 마지막으로 의존할 게 무엇이겠나. 군대다. 더구나 전두환·신군부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지 않았나. 그 경력을 보면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웬만큼 큰 사태만 일어나도 군대를 동원했음직하다. 그런데 끝내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6월항쟁 시기에 왜 군이 동원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간 여러 주장이 나왔다. 전에 미국의 역할 문제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살폈는데, 이번에는 종합적으로 이 문제를 짚어봤으면 한다. 전두환 정권은 왜 군을 출동시키지 않은 것인가.
서중석 : 그것에 대해 88올림픽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미국 언론에서는 한국에서 위기적 사태가 계속되면 88올림픽을 치를 수 없다는 보도가 나오고 그랬다. 그러나 88올림픽의 경우 군이 출동하지 않은 직접적 요인이라기보다는 부수적 요인 정도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미국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민주화 운동권의 상당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미국의 압력 때문에 군이 출동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그 당시에도 했고, 그 후에도 그걸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부분도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면밀히 검토해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자료를 가지고 얘기할 때에는 미국에서 한국의 시위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건 1987년 6월 18일을 전후한 시기부터다. 미국 의회나 언론에서는 그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지만 미국 정부는 그 시기부터 관심을 보였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보낸 친서가 6월 17일에 도착했고 그걸 19일 오후 2시에 릴리 주한 미국 대사가 전두환을 만나 전달했다. 그 친서에 민주화 관련 사항은 있었지만 군 출동에 반대한다든가 하는 얘기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다만 릴리는 19일 오후 전두환을 만났을 때 자신이 군 출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그건 사실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러 상황을 살펴볼 때 릴리가 한 말 때문에 전두환이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유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두환은 19일 오전 10시 30분에 열린 회의에서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가 그날 오후 4시 30분경 그 지시를 유보했다. 오전에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군을 정말 출동시키려 했다기보다는 그런 지시를 통해 군 관계자들한테 긴장감도 갖게 하고 출동 태세도 점검하는 등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군을 출동시키려 했다고 볼 만한 증거라고 할까, 자료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날 오후 2시에 열린 당정 회의에서 논의된 주요 내용을 보더라도 그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면, 전두환에게는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군 출동을 명령할 수 있는 자는 전두환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군에 출동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전두환이 군을 동원하지 않은 데에는 미국의 압력이나 88올림픽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노태우와 민정당은 왜 어떻게든 군 출동을 막으려 했나
서중석 : 우선 대통령직을 승계하기를 전두환이 바라고 있었던 노태우 그리고 민정당에서 군 출동을 바라지 않았다. 군 출동에 관한 지시가 나오고 나서 몇 시간 후인 19일 오후 2시부터 노태우와 안무혁 안기부장 등은 당정 회의를 열고, 비상 조치 대신 정치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논의했다. 당시 전두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도 당정 회의에서 비상 조치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이건 전두환도 사실은 군을 지금 출동시키려 하지는 않는다는 걸 노태우와 안무혁 또는 민정당 주요 간부들까지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봐야 한다. 또 노태우나 민정당은 군이 출동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논의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해 2011년에 출간된 노태우 회고록을 보자. 노태우는 전두환이 19일 오전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전두환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라인에 있는 이기백 국방부 장관, 안무혁 안기부장, 권복경 치안본부장 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출동만은 불가하다는 점을 건의해달라." 노태우는 이 회고록에서 전두환이 이러한 건의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직위를 걸고서라도 군 출동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1일에 열린 민정당 의원 총회에서도 비상 조치를 반대하거나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직선제로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프레시안 : 노태우와 민정당은 왜 군 동원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노태우나 민정당에서 '군이 출동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고까지 주장한 것은 이 사람들이 문민정치를 바랐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의 핵심으로서 억압 통치, 권위주의 통치를 해온 당사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노태우와 민정당은 어떻게 해서든 군 출동을 막고 정치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뛰어다닌 것일까.
6월 20일 자 동아일보를 보면 이런 지적이 나온다. "강성 분위기가 대두되기도 했으나, 통치권 차원의 비상 조치라는 극약 처방이 일시적 사태 해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평화적 정부 이양을 통한 집권 2기 재창출을 궁극 목표로 하고 있는 민정당의 입지마저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할 가능성 때문에 결국 정치적 해결책 모색으로 돌아섰다", 이렇게 동아일보가 잘 지적했다. 노태우나 민정당 간부들에게는 군이 나오면 모든 정치 일정이 새롭게 짜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군이 나올 경우 최악의 상황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한때 노태우 등은 1979년 12·12쿠데타를 일으켜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하극상을 벌이지 않았나. 그것에 이어 1980년에는 5·17쿠데타를 일으켜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박정희 권력의 최고 실력자들을 부패분자로 낙인찍어 처단했다. 비정한 권력의 세계를 그처럼 적나라하게 연출한 당사자들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무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친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태우와 민정당 간부들은 만약 계엄을 선포해 사태가 악화될 경우 이번에는 자기들이 희생양으로 처단될 가능성도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중앙 일간지는 6·26 국민 평화 대행진 다음 날인 6월 27일 자에 '뜻하지 않은 극한 상황이 나타나지 않아 비상 조치라는 최악의 사태가 초래되지 않은 것에 민정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보도했다. 여러 신문이 이렇게 보도한 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이 폭력 사태 없이 이뤄지기를 바란 건 김영삼, 김대중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잠시 내각 문제를 살펴보자.
프레시안 : 내각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내각에서는 계엄 선포 여부를 심의하게 돼 있지 않나. 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의 부서(副署)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이다. 그러면 이 시기에 내각 상황이 어떠했느냐. 6월항쟁 직전인 5월 26일에 이뤄진 대규모 개각으로 새롭게 임명된 장관들은 전임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이때 정호용의 물귀신 작전으로 장세동 안기부장이 물러나고,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과 가까운 안무혁이 안기부장이 됐다. 5·26 개각 이전 전두환 정권이 취한 거의 모든 초강경 조치에는 전두환의 분신으로 통하던 장세동이 관여하지 않았나. 그러한 장세동이 물러난 것은 전두환 정권이 강경 조치를 취하는 데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는 호남 출신으로 온건한 사람이었다. 6월 13일 명동성당 농성 투쟁 등 새로운 사태에 직면했을 때 이한기는 안무혁, 고건 내무부 장관 등이 참석한 청와대 회의에서 경찰의 성당 진입에 반대했다. 6월 24일 시거 미국 국무부 차관보를 만났을 때에도 인내와 자제로 문제를 풀어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계엄을 선포하면 '제2의 광주사태'를 몰고 올 수도 있었다. 그러한 계엄에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가 동의하려 했을지 의문이다. 이한기가 동의를 거부할 경우 고건 등 일부 온건파 국무위원들이 그것에 동조할 수도 있었다.
다시 돌아오면, 노태우와 민정당이 반대한 것은 전두환이 군 출동 문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것 못지않게 직접적으로 전두환한테 영향을 준 것은 군부가 6월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거리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거나 꺼렸다는 점이다. 그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군부는 6월항쟁 진압에 동원되는 걸 꺼렸다
프레시안 : 군부가 6월항쟁 진압에 동원되는 걸 꺼렸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워싱턴포스트는 1987년 7월 5일 자 기사에서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보도했다. "미국은 비밀 메시지와 공개적인 메시지를 통해 계엄을 반대했지만", 이건 6월 19일 이후에 주로 그랬는데, "이러한 메시지보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시위를 종식시키기 위한 군의 동원을 반대한다는 한국 군부 수뇌부들의 메시지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6월 30일 자에서 서방 외교관들의 말을 빌려, 한국 군부 내에도 민간인에 대한 계엄 또는 비상 조치를 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온건파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더윈스키 미국 국무부 차관이 6월 20일에 방한해 24일까지 머물렀는데, 이 사람은 한국을 떠날 때 이기백 국방부 장관이 계엄 등 군부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기백 장관이 더윈스키에게 전두환 정부의 입장을 전한 것인데, 국방부 장관이 그처럼 중요한 발언을 했다는 것은 군부의 동향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자료들도 있다. 한 기자는 육사 20기 준장급 군 후배들의 반대 때문에 6월항쟁 때 군 출동이 강행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은 당시 군 전체가 병력 동원에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6월 19일 오전 군 출동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전두환이 오후에 그 지시를 유보한다고 했을 때 이기백 국방부 장관과 오자복 합참의장이 '잘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게 박보균 기자가 취재한 자료에 나오는데, 그러면서 박보균 기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 비극이 군 수뇌부의 뇌리를 누르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군이 출동하지 않은 핵심 이유였다고 봐야 한다. 이런 증언도 있다. 조갑제에 의하면 6월 19일 군 출동 준비 지시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참모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모두 군 동원에 반대해 고명승은 그날 오후 청와대에 가서 계엄 선포 보류를 건의했다고 한다.
군부를 짓누른 광주 학살의 '악령'
프레시안 : 광주항쟁의 기억은 6월항쟁 시기 군부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군부가 6월항쟁 때 거리에 나서지 않으려 한 데에는 광주 학살의 기억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군 장교들에게 광주 학살은 그 자체가 악몽 중의 악몽이었다. 이것과 관련해 서구 외교 소식통은 '한국 군부가 그동안 광주사태의 악령에 시달려왔다'고 전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저지른 유혈 사태 때문에도 그 '악령'에 시달렸지만, 그것이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물론 재야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끊임없이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묻지 않았나. 학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계속 얘기했다. 그렇기 때문에도 군은 '광주사태의 악령'에 줄곧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이 또 기억난 것이다.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 그게 기억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6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이 나서면 광주항쟁 때보다도 훨씬 심각하고 규모도 큰 유혈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볼 근거가 많았다. 그렇게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노태우는 회고록에 "충성심 강한 군 간부들도 '군이 출동하면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고 써놓았다.
군이 출동할 경우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성남 등 여러 지역에서 돌발 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비극적 상황 또는 파국을 초래할 수 있었다. 광주항쟁 때 시민들이 사생결단하고 맞서 싸우지 않았나. 6월항쟁 때에는 그러한 사생결단 시위가 전국 도처에서, 그것도 동시다발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군인들에게는 군이 개입할 경우 언제, 어떤 식으로 터져 나올지 알 수 없는 지뢰밭으로 보였다.
뉴욕타임스는 1987년 7월 6일 자에서 몇몇 관리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군 지휘관들이 군부가 과거에 국민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에 동원될 때마다 군의 명예가 훼손됐음을 들어 이번에는 사태 개입을 원치 않았다." 이렇게 보도한 것은 군부 나름대로 그때까지 자신들이 한 일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프레시안 : 6월항쟁 시기에 군이 동원되지 않은 것은 그 이전과 비교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여러 주요 국면에서 군이 등장해 민주화를 가로막거나 짓밟지 않았나.
서중석 :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보위한 핵심 장치는 누가 뭐래도 군이었다. 전두환이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걸핏하면 군을 출동시켰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박정희는 공수특전단 병력을 비롯해 계엄군을 부산에 보냈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어떠한 항쟁에도 단호히 대처한다는,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위압적 조치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10·26 이후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로 서울의 봄을 짓밟은 것도 군이었다. 광주 학살도 유신 잔당으로 불린 전두환·신군부가 학생, 시민들의 민주화 염원을 짓누르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군을 동원하면서 발생한 것 아닌가.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부가 간여된 정권이었다. 그러한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행위는 군부에 대한 평가로 고스란히 연결됐다.
이처럼 군은 독재 권력을 출현시키고 영속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주화 운동을 유린하는 데 이용됐다. 그렇지만 6월항쟁 때에는 거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워싱턴포스트 특파원이었던 돈 오버도퍼는 저서 《두 개의 한국》에 전두환이 군 동원 준비 태세를 지시하자 영관급 장교들과 젊은 장성들이 정호용을 찾아와 '시위대는 정당한 명분을 추구하고 있으며 군대를 동원하면 엄청난 파국이 초래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썼다.
6월의 시위대 함성에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각계각층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걸 군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한 염원을 군홧발로 짓누르다가 돌발 사태가 발생해 1980년 5월 광주와 같은 파국을 다시 맞이한다면 군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명확했다.
군 상급 지휘관들이 두려워한 게 또 하나 있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 계엄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지 않았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6월항쟁 진압을 위해 동원된 군이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12·12쿠데타처럼 하극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노태우와 민정당은 물론이고 군 스스로 군이 동원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군이 동원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전두환한테서 찾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6시간 만에 지시 뒤집은 전두환, 군을 정말 출동시키려는 생각은 없었다
프레시안 : 전두환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전두환은 1986년 9월 이래 비상 조치를 발동하겠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그렇지만 그건 대개 협박용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났을 때 비상 조치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6월 19일에 내린 군 출동 준비 지시였다. 그런데 과연 전두환이 이날 비상 조치를 내리려 했느냐. 여러 가지를 분석해보면 그렇게 보기가 어렵다.
19일 오전 회의에서 군 지휘관들에게 지시한 걸 제외하면 비상 조치와 관련된 다른 어떤 조치도 찾아볼 수 없다. 만일 오전 지시가 계엄 선포 같은 비상 조치와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그것과 연결된 여러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없다. 따라서 이날 오전 군 출동 준비 지시를 내렸을 때조차도 군을 정말 출동시키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7일에 레이건 친서가 도착하자 미국 대사관 쪽에서 면담을 요청했지만 전두환은 만나주지 않았다. 그랬던 전두환이 릴리 대사를 19일 오후 2시에 만난 것도 이상하다. 만약 비상 조치를 취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면 그런 조치를 취하고 나서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났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프레시안 : 6월 19일 그날 전두환은 6시간 만에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번복했다.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다.
서중석 : 더 이상한 건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중지한다고 명령한 이유다.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1987년 7월 7일 도지사, 치안 관계자 등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6월 19일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철회한 이유에 대해 전두환 본인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권복경 치안본부장한테 전화해서 "자신 있느냐?"고 물었더니 권복경이 자신 있다고 답했고, 그래서 군 출동을 중지시켰다는 것이다.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 또한 전두환이 '치안본부장이 경찰만으로 진압에 자신이 있다고 하니 기다려보자'고 19일 그날 자신에게 얘기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군 출동 명령을 유보한다고 자기한테 전두환이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어느 쪽을 보더라도 그날 출동 명령을 유보한 건 경찰만으로 진압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치안본부장한테 직접 전화한 것도 그렇지만, 뭐라고 답변할지 뻔히 알면서 물어본 건 정말 싱거운 짓 아닌가. 6월 14일 청와대 회의에서도 권복경은 복창하듯이 시위를 진압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권복경에게 대통령이 "자신 있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지 뻔한 것 아닌가. 아 대통령이 그렇게 물어보는데 어떻게 경찰 책임자가 자신 없다고 답변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자신 있다는 답변이 나오게 돼 있다. 그런데도 전두환은 그렇게 물어봤다. 그건 군을 출동시킬 생각이 없던 전두환이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철회할 핑계거리라고 할까 이유를 찾아내려 했던 것이고 그걸 권복경한테 얘기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6월항쟁 시기에, 정확히 말하면 6월 19일 이전에 전두환은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말을 이미 했다. 6·10 국민 대회 다음 날인 6월 11일 학자들을 초청한 오찬에서 전두환은 비상 계엄으로 싹 쓸어버릴 수 있지만 "가급적 군부 동원을 안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것도 <전두환 육성 증언>에 나온다. 13일 명동성당 농성 사태 관련 회의에서도 비상 조치나 계엄 선포 없이 정부 이양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17일 저녁 노태우,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 등을 불러 노태우를 중심으로 시국 수습안을 마련해오라고 할 때에도 "우리가 과거에 하던 식, 군부를 동원하고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하면 안 되지 않겠어?"라며 군 출동을 배제했다.
군 동원 두려워한 전두환·노태우, "동원된 군이 누구 편에 서게 될지…"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 시절 전두환은 세간에서 박정희의 양자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로 총애를 받으며 권력 지향적 군인으로 살아갔다. 또한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총칼로 권력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툭하면 군대를 동원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후에는 군을 동원하지 않았다. 전두환의 경력과 성격을 볼 때 거리낌 없이 군을 동원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중석 : 6월항쟁은 후임 대통령을 뽑는 정권 교체기에 일어난 데다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대규모의 폭발적 시위였다. 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했는데, 학생을 제외하면 종교인이 특히 앞장을 많이 섰다. 더구나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은 민주화 운동이었고, 명동성당 농성 투쟁에 대해 전두환 본인이 얘기한 것처럼 많은 시위 참여자가 사생결단으로 나서고 있었다. 또한 공권력에 도전하는 위력적인 무력, 이걸 폭력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걸 수반하고 있었다.
아무리 전두환이라고 해도 이것저것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두환은 노태우와 민정당이 비상 조치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군이 거리에 나서는 걸 기피하는 것도 전두환을 무겁게 짓눌렀다. '미국도, 내각도 군 출동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도 생각했을 것이고 88올림픽 문제도, 이 올림픽을 얼마나 고려했는지까지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지만,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뇌리에 항상 떠오른 것이 광주 문제였을 것이다. 그 기억을 어떻게 지울 수 있겠나. 전두환이 군 동원에 소극적인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4·13 호헌 조치라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나. 그것이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외침을 불렀고 그러면서 6월항쟁으로 가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됐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요인이 또 있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전두환은 1986년 11월 1일 3부 요인과 부부 동반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군대라는 데가 이상한 뎁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지금도 솔직히 무서운 단체가 군대입니다." 1987년 6월 28일 전두환이 김성익 비서를 불러 6·29선언을 수용하겠다는 담화문 작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는데 그때 "군대가 나오면 항상 쿠데타 위험이 있어", 이렇게 털어놓았다. 장세동은 전두환이 위기 상황에 힘의 논리로 대처하지 않은 건 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태우는 회고록에 더 직설적으로 썼다. "동원된 군이 누구 편에 서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노태우한테 얘기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노태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직감적으로 '만일 이번 사태에 군을 동원한다면 이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얼마만큼 군 동원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했는가를, 노태우가 한두 마디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회고록에서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바로 지금 얘기한 것, 그러니까 '군을 동원하면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 6월항쟁 때 비상 조치를 취하지 않은 핵심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으로서는 박정희 같은 비참한 최후만은 피해야 했다
프레시안 : 전두환, 노태우는 자기들이 한 짓이 있기 때문에 군대의 무서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래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서중석 : 10·26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었다. 박정희가 왜 그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됐는가에 대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제외한다면 당시 가장 잘 알고 있었을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전두환이다. 6월항쟁 때 군을 동원할 경우 사병들은 물론이고 젊은 장교들이 4월혁명 때처럼 시위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쿠데타로 발전할 때 김재규 같은 무서운 사람이 출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 때 전두환의 처삼촌(이규광)까지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전두환 자신의 핵심 참모가 주장하지 않았나. 전두환은 그걸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칼자루를 쥔 무인들의 비정한 권력 세계를 직접 체현한 사람이었다.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를 주도하고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면서 하극상, 대통령 끌어내리기, 대대적인 숙청을 직접 벌인 사람 아닌가. 그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었다. 그랬던 전두환 자신과 같은 이른바 '패기'가 대단한 군인들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더욱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까지 전두환 정권 지지 대열에서 이탈해 6월항쟁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 아니었나.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을 처단하는 데 명분을 세우기도 좋았다. '패기'가 대단한 군인들이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겠다'고 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두환을 민주주의의 공적으로 처단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두환은 김재규의 10·26 거사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늘이 점지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마누라하고 청와대에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서로 꼬집어봤다는 얘기까지 시중에 돌고 그랬는데, 하여튼 박정희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비상 조치 막은 건 미국? 그렇게 보기 어렵다
프레시안 : 심복의 총에 목숨을 잃은 박정희의 최후와 6월항쟁 시기 전두환의 선택이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서중석 : 일각에서는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에 군이 출동하지 않았다', 이걸 중심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 투쟁 때에도 릴리 대사가 6월 13일에 경찰이 진입하지 않도록 정부에 요구한 걸 근거로 '미국의 영향력 때문에 공권력이 명동성당에 안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그전에 이미 전두환은 '명동성당에 경찰이 들어가지 않게 하겠다'고 천주교 전국 교구장한테 분명히 얘기하라고 지시했다. 릴리가 요구하기 전에 13일 아침 회의에서 그렇게 지시했다. 그것에 이어 이한기 총리 서리도 경찰 진입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릴리가 얘기를 꺼낸 건 그 이후다.
뉴욕타임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등 미국 언론들이 지적한 것처럼 레이건 정부는 전두환 정부의 반발을 사고 싶어 하지 않았다. 17일 레이건 친서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런 태도를 취했다. 1986년이건 1987년이건 한국에서 여야가 대화해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는 상투적 입장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까지 쭉 살펴본 것처럼 6월 19일 전두환의 비상 조치를 막은 것은 릴리 대사, 미국 측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그 후, 즉 20일에 더윈스키 미국 국무부 차관이 방한한 것에 이어 23일에는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정책 최고 실무 책임자인 시거 차관보가 내한해 군 출동 반대 의사를 밝히고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촉구했다. 뒷북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지만, 미국의 그러한 조치는 당시 상황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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