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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은 왜 직선제 쟁취에서 멈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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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은 왜 직선제 쟁취에서 멈췄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47> 6월항쟁, 스물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직선제 쟁취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6월항쟁의 한계

프레시안 : 6월항쟁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지속된 기나긴 정치적 밤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투쟁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예컨대 민주 대연합이라는 틀로 대통령 직선제 쟁취 투쟁을 전개해 6·29선언을 이끌어낸 것은 의미 있는 성과이지만, 직선제 쟁취에서 멈춰버린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오늘날까지 수구 세력이 발호하는 것도 1987년 6월항쟁으로 표출된 힘을 바탕으로 수구 세력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해 대선에서 어이없는 결과가 나온 것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서중석 : 6월항쟁에서 민주 대연합이 가능했던 건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과 학생들이 야당의 직선제 주장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본과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장애가 됐다.

야당은 1972년 유신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가 직선제로 민간 정부를 세우면 민주주의 사회가 온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당의 민주주의 주장은 정치적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빈약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는 외면하고 있었다.

학생 운동권은 1987년 3월 개학했을 때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자 각계에서 치열하게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학생들은 그것에 호응하는 투쟁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직선제 쟁취 투쟁을 수용하고 국본을 지지하면서 국본 결정을 따랐다.

이 시기에 다수의 학생들이 내세운 주장에는 반미 자주화를 제외하면 특별한 게 없었다. 이들의 주장에는 1987년 이후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이 충실히 담겨 있지 않았다. 1980년대에 수많은 학생들이 노학 연대 기치 아래 노동 현장 취업, 농활, 공활 등 노동자, 농민과 함께하는 연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도 6월항쟁 시기에는 그런 부분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6월항쟁에서 재야나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 것은 당시 운동권과 일반 학생들이 지녔던 한계와 관련이 있다. 6월항쟁에서 학생 운동 주류는 직선제 개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을 펴지 못했다. 그건 당시 학생 운동의 한계이자 NL계 대중 노선의 한계였고, 6월항쟁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조직 역량을 갖추고 투쟁 목표, 전략을 명확히 세운 상태에서 6월항쟁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항쟁이 자연 발생적으로 발전해간 측면이 강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이러한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6월항쟁은 민주 대연합을 통해 기본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준에 머물게 돼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본적 민주주의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 등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해 관철해야 할 내용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고, 경제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주장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는 점은 성찰할 필요가 있다.

▲ 1987년 6월 10일 그날 전국 각지의 거리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시민, 학생으로 가득 찼다. 경찰이 최루탄을 쏟아부었지만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세 번째 해방' 6월항쟁, 아쉬움은 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의 큰 틀 구축

프레시안 : 그동안 6월항쟁을 여러 각도로 살폈다. 한국 현대사에서 6월항쟁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서중석 : 6월항쟁을 통해 민주주의가 더 넓고 깊은 폭과 깊이를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렇지만 6월항쟁 시기는 수많은 한국인들한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의 하루하루였다. 6월항쟁 그날을 떠올리면 한국인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한 것들이 투쟁에 불을 붙여 박종철과 이한열의 염원을 성취했다는 점에서도,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었다는 점에서도 이성의 간지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각지에서 한날한시에 똑같은 행동 요령에 따라 시위를 전개하고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경찰이 퍼부은 '지랄탄', '사과탄'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숨이 콱콱 막히는 속에서도 시위대는 격렬히 맞서 싸웠다. 평범한 학생, 시민이었던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이 사생결단하고 용맹한 투사가 돼서 몇 시간이고 싸우며, 경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수십 차례나 주고받았다. 시위대는 경찰이 최루탄을 수십, 수백 발 쏘아대면 사라졌다가 어느 틈엔가 다시 나타나 대오를 갖추고 구호를 외쳤다. 그러한 장렬한 시위대의 모습은 언제나 6월 그날의 장관을 상기케 한다.

이러한 모습은 때로는 장대한 파노라마처럼, 때로는 몽타주 화면처럼 펼쳐지는가 하면 정겨운 서정적 장면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6월항쟁의 함성이 묻어나는 아름답고 웅혼한 화음을 이루고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세계로 도도히 흘러갔다.

예전에 4월혁명을 다룰 때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으로 볼 수 있다고 얘기했는데,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만하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다. 두 번째 해방은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도 과거의 가시밭길 역사로 인해 계속해서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문화, 예술, 사상, 학문에 불어온 자유의 바람

ⓒ오월의봄
프레시안 : 6월항쟁은 정치 영역에서 직선제를 부활시킨 것을 넘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6월항쟁 이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나.

서중석 : 6월항쟁으로 문화, 예술 분야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1987년 8월 18일, 공연 금지곡으로 지정돼 있던 382곡 중 186곡이 해금됐다. 서민이 즐겨 부르던 '동백 아가씨'를 비롯해 '왜 불러', '거짓말이야' 등이 이때 족쇄에서 풀렸다. 9월 5일에는 김민기의 '아침 이슬' 등 방송 금지곡 500곡이 해금됐다. 또한 '임을 위한 행진곡', '파업가', '진짜 노동자' 같은 운동권 가요가 시위대나 노래패에 의해 불리며 시위 및 파업 현장을 뜨겁게 달구게 된다.

9월 1일에는 영화 시나리오 사전 심의 제도가 폐지됐다.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전두환 정권 때에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해외 영화도 볼 수 있게 됐다. 1920년대부터 많은 한국인이 존경한 인물인 간디를 그린 영화 <간디>가 그런 경우다. 아카데미상을 여러 개 받은 작품인데, 영국과 맞선 거대한 민중 투쟁 장면이 있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 내내 수입되지 못했던 이 영화를 한국에서 볼 수 있게 됐다. (1982년 작품인 <간디>는 노태우 정권 때인 1989년 한국에서 상영됐다. 이 무렵, 6월항쟁 이후 불어온 자유의 바람을 타고 <간디>뿐만 아니라 군사 독재 시기 아르헨티나를 다룬 <오피셜 스토리>, 엘살바도르 내전을 소재로 한 <살바도르> 등 정치 문제를 다룬 해외 영화가 연이어 국내 관객을 만났다. 이에 대해 1989년 4월 11일 자 동아일보는 "민중의 저항을 주제로 한 정치 영화가 계속 수입되면서 붐을 이루고 있다"며 여기에는 "'종전에는 수입이 불가능했으며 국내에서 보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영화'라는 특수성이 관객을 자극하리라는 (영화 수입업자들의) 계산"도 작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편집자') <레미제라블>도 그전에는 파리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투쟁하는 장면 수십 분 분량이 잘린 채 TV에서 방영됐는데, 이제는 원작 그대로 볼 수 있게 됐다. 또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싸우던 미술계, 연극계, 음악계에서도 자유의 신선한 새 바람이 불었다.

프레시안 :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북한 바로 알기 운동도 일어나지 않았나.

서중석 : 1987년 10월 19일 판금 도서 650종 중 431종이 해금된 데서도 드러나듯이 사상과 학문 분야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물론 탄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10월 29일 경찰은 월북, 공산권 작가의 작품 38종 등 219종에 대한 압수 수색을 실시해 동유럽이나 소련 작품 같은 사회주의권 작품,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포함한 북한 작품이나 인문 사회과학 서적 판매를 통제했다. 이러한 탄압과 통제가 계속되긴 했지만,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책들이 6월항쟁 직후부터 시중에 많이 나돌았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과 결합해 전개됐다. 감옥에 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북한 책을 복사하기도 했고, 북한 책과 판형을 달리해 시장에 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북한 책을 사서 보는 게 한때 붐을 이뤘다.

1988년 여름에는 이태의 <남부군>이 출간됐다.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저자의 수기인데, 작열하는 태양 아래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잊혔던 한국전쟁 전후 남한 빨치산 관계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현대사 바로 알기 운동과 연결돼 수구 냉전 세력을 기겁하게 했다. 그 밖에 <항전별곡>, <격정시대> 같은 책과 김일성 관련 책 등이 출판되면서 항일 독립 운동에 대한 시야도 크게 넓어졌다. 이러한 것들과 맞물려 6월항쟁 이후 통일 운동과 남북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별도로 살펴보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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