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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주무른 보도지침, 그 배후는 청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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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주무른 보도지침, 그 배후는 청와대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7> 6월항쟁,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언론을 농락한 보도지침, 그 본모습을 드러낸 <말>

프레시안 : KBS 시청료 거부 운동과 더불어 언론과 관련해 1986년에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보도지침 폭로 사건이다. 언론을 수중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집권 세력의 시도가 최근까지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주요하게 되짚을 만한 사안이다. 어떻게 해서 보도지침의 실체가 세간에 드러나게 됐나.

서중석 : 보도지침 폭로 사건은 민주주의 쟁취가 절실한 과제임을 깨닫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1984년 12월에 창립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1985년 6월 <말>을 창간했는데, 1986년 9월 <말> 특집호에 보도지침이 폭로됐다.

보도지침은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전두환·신군부는 1981년 1월 문공부에 홍보조정실을 두고, 계엄사령부가 언론을 검열하던 기능을 여기서 그대로 이어받아 언론을 통제하게 했다. 1985년 10월 홍보조정실은 홍보정책실로 이름을 바꿨는데, 매일 각 언론사에 가이드라인으로 보도지침을 내렸다.

보도지침이 세상에 폭로된 계기는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1985년 10월 19일부터 이듬해 8월 8일까지 나온 보도지침 자료를 입수한 것이었다. 보도지침을 철해서 편집국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걸 발견한 것이다. 보도지침은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자상하게' 언론에 기사를 배급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프레시안 : 보도지침, 어떤 식이었나.

서중석 : 기사를 어떤 면에, 몇 단 크기로 게재하라고 지정해줬다. 기사 크기에 대해 '조그맣게', '조용히', '너무 흥분하지 말고', '크지 않게', '눈에 띄게', '돋보이게', '균형 있게', '적절하게' 등 다채롭게 지시했다. 보도지침에는 1단 기사 지시가 많았다. 보도를 막고 그냥 넘어가자니 뭔가 마음이 안 놓이고, 그렇다고 지침을 안 내리고 그대로 두자니 신문사에서 눈치 없이 2~3단으로 키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제목에 대해서도 이런 표현 대신 저런 표현을 쓰라고 하거나 또는 그런 식으로는 뽑지 말라는 지시도 내렸다. 예컨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경우 검찰 발표 직후에 나온 보도지침을 보면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줄 것"이라는 부분이 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때 신문에 '공안 당국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실린 자료가 있는데 그 글에 '사건의 성격'(또는 '사건의 본질')이라는 부분이 있다. "혁명을 위해서는 성도 도구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그런 걸 가지고 기사 제목을 붙이라는 지시였다.

사진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지시했다. 이 기사엔 사진을 쓰지 말라든가 또는 폭력성을 부각할 수 있는 사진은 넣으라는 식이었다. 또 공안 사건을 비롯한 이런저런 사건에 대한 당국의 분석 자료는 간지에 실으라고 아주 '친절하게' 지시했다.

다양한 사안에 대해 보도지침을 내렸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한 사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1986년 필리핀에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나. 언론도 민주화 운동 세력도 전두환 정권도 이것에 아주 큰 관심을 쏟았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피플 파워에 놀란 전두환 정권 '필리핀 기사는 축소 보도할 것'

▲ 보도지침을 폭로한 1986년 9월 <말> 특집호.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프레시안 :
왜 그랬던 것인가.

서중석 : 독재자 마르코스의 행적이나 행태가 박정희나 전두환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필리핀의 피플 파워(people power)는 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는 일종의 대리전쟁이었다. 학생들과 민주 인사들은 필리핀의 민중 혁명이 실패하면 당분간 한국 민주주의는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과 똑같은 이유로 전두환 정권은 필리핀의 민중 혁명이 실패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플 파워 또는 민중 혁명으로 마르코스 정권이 뒤집어지느냐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986년 2월 7일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는데, 그 이전부터 전두환 정권은 독재자 마르코스와 맞서는 세력에 대해 잘 써주지 말라는 보도지침('야권 후보인 코라손 아키노 이야기를 부각하지 말 것')을 내렸다. 또한 '필리핀 선거 기사를 너무 크게 취급하지 말 것', '필리핀 선거 관련 기사는 1면에 싣지 말고 외신면에 실을 것' 등을 지시했다.

대선에서 마르코스는 부정 선거로 재선됐다. 그러면서 대통령 당선을 기정사실로 굳히려 했다.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독재 정권을 몰아내려는 피플 파워가 이때부터 더욱 거세졌다. 그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불안과 우려도 당연히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2월 10일 자 보도지침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이날 전두환 정권은 '필리핀 선거 관련 기사 (1) 1면에 내지 말 것, (2) 가급적 간지의 한 면으로 소화하되 여러 면으로 확대 보도하지 말 것, (3) AFP 통신의 가상 시나리오와 미국, 일본, 유럽에서 본 필리핀 선거 등은 박스 기사로 싣지 말 것' 등의 보도지침을 내렸다. 그다음 날에는 '필리핀 관계 기사는 외신면에 축소 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무너진 마르코스 독재…전두환 정권 '우리 현실과 비교하지 말 것'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의 바람과 달리 마르코스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전두환 쪽으로서는 씁쓸하고 안타까운 심정과는 별개로 뭔가 대책을 내놓아야 했을 터인데, 마르코스 정권 붕괴 후 어떤 보도지침을 내렸나.

서중석 : 피플 파워가 절정으로 치닫자 마르코스는 2월 25일 밤 관저인 말라카낭 궁에서 허둥지둥 도망쳤다. (미국으로 달아난 독재자 마르코스는 3년 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숨을 거뒀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이 5년 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난 것과 닮은꼴이다. '편집자') 그러자 더욱 불안해진 전두환 정권은 훨씬 자세한 보도지침을 시달했다. 2월 25일 자 보도지침을 통해 '필리핀 사태, 1면 톱기사로 올리지 말 것'을 지시한 전두환 정권은 27일에는 '자상하게' 이런 보도지침을 내렸다. '필리핀 사태 (1) 1면 3단 정도로 취급하고 나머지는 간지에 싣되 4면(외신면)과 5면(체육면)에만 한정할 것, (2) 국내 정치인들의 개별적인 논평은 가급적 보도하지 않도록 하고 대변인 논평만 실을 것, (3) 해설, 좌담 등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우리 현실과 비교하거나 강조하지 말 것, (4) 세계 독재자 시리즈, 마르코스 20년 독재 등의 시리즈를 싣지 말 것.'

전두환 정권과 반대로 민주화 운동 세력은 필리핀 민중의 승리를 매우 기뻐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세계 어떤 지역보다도, 미국 정부 못지않게, 어쩌면 미국 정부보다 더 크게 필리핀의 피플 파워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학생, 민주 인사 외에도 많은 시민이, 기독교 관계자와 신자들이 특히 그랬는데, 필리핀의 피플 파워에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필리핀의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정권만 골머리를 앓게 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한 정책에도 두통거리였다. 미국은 필리핀과 한국은 다르다며 필리핀의 피플 파워가 한국에 전이되는 걸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프레시안 : 예나 지금이나 어둠의 세력은 햇빛을 두려워하고 진실 공개에 극도로 거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전두환 정권은 보도지침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이들에게 어떤 보복 조치를 취했나.

서중석 : 보도지침 폭로는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또한 젊은 기자들이 각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보도지침이 폭로되자 전두환 정권은 1986년 12월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신홍범 조선투위 실행위원, 김주언 기자를 잇달아 구속했다. 1987년 6월 3일 서울형사지법에서 김태홍은 징역 10월에 집행 유예 2년, 김주언은 징역 8월에 집행 유예 1년, 신홍범은 선고 유예 판결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 (전두환 정권은 보도 지침을 폭로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 누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와 함께 국가모독죄를 뒤집어씌웠다. 1987년 유죄 선고를 받았던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은 1994년 7월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5년 12월 대법원은 세 사람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지 9년 만이었다. '편집자')

언론 통제 강도, 전두환 정권 때보다 유신 정권 후기에 훨씬 셌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1988년 국회에서 보도지침을 비롯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 실상을 다룬 언론 청문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정권 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이광표는 "언론기본법 제정과 (일상적으로 보도지침을 내린) 문공부 홍보조정실 설치는 허문도와 이수정이 재직하던 청와대 정무비서실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고 말했다. 보도지침 배후에 청와대가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주언은 "보도지침을 어겼을 경우에는 야간에까지 전화를 하거나 기관원들이 편집국에 와 확인하고 신문사의 존폐 문제를 들어 협박했다"고 진술했다. 한국일보에 드나든 기관원 숫자에 대해서는 "안기부 1명, 보안사 1명, 문공부 홍보조정실 1명, 치안본부와 종로경찰서 직원 등 가장 많을 때는 7명 정도 됐다"고 말했다. 보도지침 위반 사례와 관련, 전두환 정권에서 KBS 사장을 거쳐 문공부 장관을 지낸 이원홍은 언론인에 대한 구타와 고문이 상당수 있었음을 인정했다.

청문회에서는 "홍보정책실이나 정무비서실 등의 구성 인원은 대부분 언론계 출신"(강삼재 의원)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것에 대해 김주언은 "많은 언론인이 전두환 체제 구축에 앞장선 것은 사실"이라며 "그런 사람들은 민주 언론 육성을 외면하고 언론 통제를 통해 못살게 굴었다"고 말했다.

신홍범은 "언론사 사주는 5공화국의 피해자로 자처하고 있으나 전두환 정권과 제도 언론은 공동 정범"이라고 지적했다. 기자들에 대한 촌지와 관련해 이광표는 "추석, 연말, 여름휴가철에 관례에 따라 성의를 표시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어떤 식으로 다뤘는가를 여러 측면에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보도지침 폭로 사건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짚었으면 한다. 전두환·신군부 정권 때보다 유신 정권 후기에 언론 통제 강도가 더 셌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전두환·신군부는 언론 통폐합을 단행하고 언론인 대량 해직 사태를 일으켰으며 보도지침을 통해 일상적으로 언론을 옥죄지 않았나.

서중석 : 언론 통제 강도는 유신 정권 후기에 월등히 셌다. 전두환·신군부 정권 때에는 권력의 통제를 당하는 속에서도 신문에 그래도 상당히 쓸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유신 체제에서는 아예 긴급 조치로 유신 체제와 관련된 어떠한 사항도 보도할 수 없게 했다. 특히 1975년 5월에 나온 긴급 조치 9호가 유신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는데, 그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다 그랬다고 볼 수 있다. 긴급 조치 9호 아래에서는 유신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또는 권력 쪽 기준으로 볼 때 모욕하거나 헐뜯는 어떤 것도 보도할 수 없게 돼 있지 않았나. 그래서 예컨대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났는데도 18일 계엄이 선포되기 전에는 어떤 언론 기관도 보도하지 않았다.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그런 식으로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신 체제 자체가 강권 통치 체제 아니었나.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고 모든 언로를 막았다. 시민들이건 언론인이건 학계건 문화계건 다른 어떤 데건 자기 귀에 거슬리는 얘기는 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거기에 긴급 조치라는 쐐기를 콱 박아버린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권력이 예전처럼 마음대로 통제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런 사회로 변모해 간 것이다. 노동 문제를 보더라도, 전두환 정권이 그렇게 노동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악법을 비롯해 뭔가를 많이 만들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그만큼 통제하기 힘든 쪽으로 사회가 변화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전에 1985년 2·12총선을 다룰 때 얘기하지 않았나. 1978년 12·12선거 때에는 유신 체제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2·12선거에서는 "광주사태 최고 발포 명령자는 누구인가", 이렇게 소리 지를 수 있었다고. 그건 상당한 차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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