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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보다 센 수공? 금강산댐 '공포 사기극'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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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보다 센 수공? 금강산댐 '공포 사기극' 전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9> 6월항쟁,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프레시안 : 전두환의 1986년 하반기 총공세 중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 사건과 건대 사태를 살펴봤다. 이번에는 금강산댐 사건을 짚어봤으면 한다. 북한의 수공이 임박한 것처럼 각계에서 부산을 떨고 방어용 댐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성금을 거두는 등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지금도 기억난다. 누가, 왜 그런 소동을 일으킨 것인가.

서중석 : 건대 사태(1986년 10월 28~31일)가 일어났을 때 전두환 정권은 금강산댐 사건에 대해 발표했다. 그러면서 북한을 규탄하는 반공 대회가 잇따라 열렸다.

금강산댐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이채주가 자신의 저서에서 "모든 구상과 계획과 발표는 장세동 씨의 안기부가 직접 주도했다"고 증언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기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두환과 장세동의 작품이었다. 개헌 열기를 무산시키고 신민당과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의 개헌 투쟁을 무력화하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해서 계획을 세워 실행한 사건이었다.

금강산댐 위협 과대 포장하고 단계별 각본 꾸민 안기부

프레시안 : 그러한 계획을 언제 세웠나. 당시 안기부에서는 금강산댐 규모가 어느 정도라고 파악했나.

서중석 : 그 계획을 정확히 언제 세웠는지는 확실치 않다. 김영삼 정부 첫해인 1993년 감사원은 평화의 댐 사업에 대한 특별 감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그해 8월 31일 발표했다. 1993년 8월 감사원이 작성한 문건인 '평화의 댐 건설 사업 추진 실태'를 보면, 금강산댐에 대한 1차 분석이 1986년 6월 22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나와 있다. (북한은 1986년 4월 금강산 수력 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10월 21일 착공식을 했다. 북한은 원산 지역에 위치한 공장들에 전력을 공급하고 안변 일대에 농업용수를 제공하기 위해 이것을 건설한다고 밝혔다. '편집자') 이때는 안기부 직원 1명과 한국전력 4급 직원 1명이 불과 8시간 만에, 그것도 댐 위치도 확인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첩보를 근거로 추정했다. 이들은 댐 높이가 215미터나 되고 저수량이 199.7억 톤이나 된다는, 아주 심하게 과대 포장한 추정을 내놓았다.

그 후 안기부에서는 분석 인원을 3명으로 늘려 그해 8월 21일에서 10월 25일 사이에 2차 분석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때는 댐 위치 확인 등 추가 첩보가 입수된 상태였는데 댐 높이는 155미터, 저수량은 69.8억 톤이라고 분석했다. 1차 분석 때보다 높이는 60미터 줄어들었고 저수량은 3분의 1 정도밖에 안됐다. 그렇게 축소 수정한 수치를 내놓았다.

이렇게 1차, 2차에 걸쳐 금강산댐에 대해 분석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안기부가 그해 10월에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성명서 발표 및 기자 회견 계획'을 보면 안기부 2차장 이학봉 주재로 10월 25일 대책 회의가 열려 계획이 시달된 것으로 나온다. 늦어도 이때쯤에는 전두환이 펼친 총공세의 일환으로 금강산댐 문제를 대규모 사건화하기로 결정했음이 틀림없다. 안기부는 금강산댐 건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나리오로 단계별 세부 전략을 세웠다.

프레시안 : 어떤 전략을 짜서 실행했나.

서중석 : 디데이를 정하고, 공사 규모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현실감 있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발표를 그날 건설부 장관이 공개 폭로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디데이+7일에는, 그러니까 건설부 장관의 공개 폭로가 있은 지 7일 후에는 국방부 장관이 수공을 통한 북한의 군사 전략적 책략에 대해 경고하기로 했다. 디데이로부터 14일 후에는 문공부 장관이 북한에 계획을 포기하라고 촉구하기로 했다. 또한 국방부 장관, 건설부 장관, 문공부 장관, 통일원 장관이 합동으로, 이게 디데이로부터 며칠 후인지는 안기부 자료에 명시돼 있지 않은데, 금강산댐 건설에 대응하는 조치를 공표하기로 했다.

디데이는 10월 30일이었다. (이 사건에서 눈여겨볼 대목 중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이것을 발표한 시점이다. 10월 30일은 뜻하지 않게 건국대에 갇혀 있던 학생들을 상대로 전두환 정권이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펴기 전날이었다. '편집자') 단계별 세부 전략에 나온 그대로, 이날 건설부 장관 이규효는 대북 성명문을 발표했다.

디데이에 행동 개시한 건설부 장관의 무시무시한 발표

프레시안 : 어떤 내용이었나.

서중석 : 이규효 장관은 북한이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시설 용량 80만 킬로와트 이상의 금강산 발전소 댐이 붕괴하면 수도권 등지가 황폐화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댐의 건설로 한반도 동부 지역의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는 가공할 만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지적했다.

이 장관은 200억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이 댐이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파괴될 경우 안전 문제는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댐이 우리 쪽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시기는 9억 톤 정도가 저수될 때부터라고 주장했다.

이날 이 장관은 이 댐이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보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우선 9억 톤 안팎을 저수한 댐이 붕괴하면 강원도 화천 이남 5개 댐의 안전에 직접 영향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에 더해, 1984년 9월에 있었던 한강 홍수 때의 10배에 달하는 물이 한강 제방을 넘쳐 수도권을 포함한 한강 전역이 가공할 수마로 뒤덮일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댐의 저수량이 200억 톤이라고 이규효가 말하지 않았나. 따라서 9억 톤의 물이 주는 피해가 그렇게 엄청나다면 200억 톤의 물이 가득 찼을 때 댐이 무너질 경우 어떻게 되겠느냐, 이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에 대해 이규효 장관은 200억 톤을 만수했을 때 댐이 무너지면 화천 이남 5개 댐이 모두 파괴되고 서울, 강원, 경기 등 한반도 허리 부분이 완전히 황폐화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가 초래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발표였다. 신문에서는 이 발표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면에 걸쳐 더 자세히 해설하는 등 아주 크게 다뤘다.


▲ 이규효 건설부 장관의 금강산댐 관련 발표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경향신문 1986년 10월 30일 자 1면. ⓒ경향신문

200억 톤 물로 한반도 허리 황폐화? 두려움 부추긴 거짓투성이 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이규효는 무엇을 근거로 그런 발표를 한 것인가. 금강산댐이 대남 공격용이라고 볼 충분한 근거가 있었나.

서중석 : 이규효 장관이 발표한 저수량 200억 톤, 이건 1차 분석 때 안기부 직원 1명이 한국전력 4급 직원 1명과 함께 불과 8시간 만에, 댐 위치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수량이 199.7억 톤이라고 심하게 과대 추정한 바로 그 수치를 가리킨다. 1차 분석에 워낙 허점이 많았기 때문에 안기부에서 분석 인원을 늘려 2차 작업을 했고, 그때는 그래도 1차 분석 때보다는 사실에 좀 더 가깝게 저수량이 69.8억 톤이라고 수정하지 않았나. 사실 2차 분석 결과도 과장된 것이긴 한데, 하여튼 이규효 장관은 1차 분석 때 터무니없이 과대 추정한 200억 톤으로 국민들한테 발표한 것이다. 정치적 의도로 발표했다는 게 이 점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제 인위적으로 댐을 파괴해 남측을 공격,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초래한다는 것이 현실성 있는 이야기였나를 살펴보자. 1993년 8월 감사원이 작성한 문건을 보면 파괴 목적으로 댐을 시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렵다고 돼 있다. 폭파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분석한 결과, 전두환 정권이 발표한 것과 달리 댐 중앙부 점토 부분에 대형 갱구를 만들어 폭약을 설치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감사원은 발표했다. 파괴 목적으로 댐을 시공할 수가 사실상 없다는 말이다.

감사원은 댐을 축조한 후 인위적으로 파괴할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지적했다. 그뿐 아니라 설령 사력(沙礫)댐이 붕괴하더라도 댐 밑바닥까지, 그러니까 댐 전체가 붕괴하는 건 아니라고 밝혔다. (사력댐은 중앙 부분은 점토로, 주변부는 자갈과 모래로 다지고 돌을 쌓아 만든 댐을 말한다. '편집자') 안기부는 금강산댐이 인위적인 방식으로든 자연적으로든 댐 밑바닥까지 완전 붕괴할 것이라고 분석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감사원은 안기부가 금강산댐에서 200억 톤의 물이 완전 방류될 경우 수도권 등이 황폐화하는 것으로 판단했으나, 이규효 장관이 자세히 이야기한 그 내용인데, 그것 역시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발표했다. 감사원은 금강산댐 규모가 최대 저수량 59.4억 톤, 이건 안기부의 2차 분석 결과보다도 작은 규모인데, 보통 때에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27.2억 톤이라고 판단했다. 그러한 금강산댐이 일시에, 그것도 완전히 붕괴하는 것에 더해 50년에 한 번 일어날 수 있는 규모의 홍수가 겹치더라도 서울 일부 저지대 지역만 침수할 것이라고 봤다.

이러한데도 전두환 정권은 인위적으로 댐을 파괴한다는 것을 전제로 몹시 과대 포장된 추정을 가지고 사실과 아주 거리가 먼, 국민을 놀라게 하고 현혹하는 발표를 한 것이다. 이규효 건설부 장관 발표는 보통 터무니없는 발표가 아니었다는 것을 감사원 발표로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

핵무기보다 센 물 공격? '공포 사기극'에 부화뇌동한 언론·전문가

ⓒ오월의봄
프레시안 :
이규효의 발표는 전두환 정권이 일으킨 금강산댐 파동의 시작일 뿐이지 않았나.

서중석 : 이규효 장관의 발표가 있으면서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이 댐을 무너뜨리면 200억 톤의 물이 방류돼 63빌딩 중턱까지 차오를 수 있다', '남산 기슭까지 물바다가 되고 원폭 투하 이상의 피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제2의 남침 음모라는 주장도 나왔다. 매스컴은 북한의 수공 작전이 핵무기보다 위력적이라는 등 두려움을 부추기는 보도를 연일 내보내며 맞장구를 쳤다. 그와 함께 북한이 88올림픽을 방해하려고 저렇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물론 심지어 "살수대첩을 모르냐"는 역사 문답까지 나왔다.

안기부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단계별 세부 전략이라는 각본만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안기부 국장들을 책임자로 한 '금강산댐 건설 규탄 행사 및 홍보 대책 기획 조정 실무위원회' 등을 만들어서 그해 10월 29일부터, 이날은 이규효가 대북 성명문을 발표하기 바로 전날인데, 11월 30일까지 총 28회에 걸쳐 일일 보고도 하게 했다. 예컨대 11월 8일 자 일일 보고에는 강원도민 규탄 궐기 대회 개최 결과 등이 들어 있고 11월 26일 자 일일 보고에는 부산시민 규탄 궐기 대회 개최 결과와 대구시민 규탄 궐기 대회 개최 계획, 시도 규탄 궐기 대회 개최 일정 등이 있다. 보고서의 별첨 자료에는 지역별로 개최된 행사들의 유형과 참가 단체, 인원, 언론사의 취재 내용 등이 기재돼 있다.

프레시안 : 정권 차원의 '공포 사기극'이었던 셈인데,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힐 만한 사기극 아닌가 싶다. 정부가 이렇게까지 나서고 언론이나 전문가도 제대로 검증하기는커녕 부화뇌동했으니 국민들로서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었나.

서중석 :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나온 보고서에는 한 달에 걸쳐 민, 관, 군 그리고 언론까지 동원해 홍보한 탓에 전 국민은 금강산댐의 가공할 위력에 공포감을 갖게 됐다고 쓰여 있다.

이 시기에 토목 공학 쪽 교수나 관련자들이 정부 발표를 지원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도 국민들이 공포감을 갖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교수 등이 그런 발언을 하는 걸 접할 때 '이렇게까지 학문을 악용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금강산댐 사건에서 전두환 정권에 힘을 실어준 대표적인 전문가 중 한 사람이 선우중호 서울대 교수다. 1986년 11월 선우중호는 "금강산댐과 같은 사력댐은 물이 넘치면 순식간에 파괴된다", "1분당 50~60센티미터씩 균열이 계속되면 높이 200미터의 댐은 4~5시간이면 파괴될 수 있다", "200만 톤을 저수할 수 있는 댐에선 10만 톤 정도는 쉽게 내려보낼 수 있고 이 정도만으로도 하류엔 굉장히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며 대응 댐을 건설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KBS TV는 선우중호가 이러한 내용으로 주제 발표를 한 세미나를 전국에 녹화 중계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6년 선우중호는 서울대 총장이 됐다. 그 후 명지대 총장 등을 거쳐 2006년에 정년 퇴임하며 청조 근정 훈장을 받았다.

금강산댐 붕괴 논란은 금강산댐 사건 16년 후인 2002년 다시 불거졌다. 2002년 초 금강산댐을 촬영한 위성 사진 등을 근거로 금강산댐이 붕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햇볕 정책의 전도사로 불린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이것에 대해 <피스메이커>에 이렇게 썼다.

"이 무렵 우리 언론들은 미국 측으로부터 입수한 인공위성 사진을 공개하면서 "북한 금강산댐(안변청년발전소) 세 곳에 균열이 생겨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서울이 물바다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을 규탄하고 나섰다. 북측은 이에 대해 "남북 대화를 파괴하려는 미국의 모략에 남측 언론이 놀아나고 있다"며 반발했다. 보수 언론의 이러한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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