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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오보로 판명된 <조선일보> "세계적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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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오보로 판명된 <조선일보> "세계적 특종"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30> 6월항쟁,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금강산댐 사건 와중에 "김일성 사망 확실시" 터트린 <조선일보>

프레시안 : 금강산댐 사기극이 한창일 때 김일성 사망 오보 소동까지 일어났다. 이 시기에 왜 그런 일이 터졌는지 찬찬히 살펴봤으면 한다.

서중석 : 각 지역에서 또 각계에서 금강산댐 규탄 궐기 대회를 계속 열고 TV 등에서는 엄청난 과장 보도를 하고 전문 학자, 관계자들의 금강산댐 관련 발언이 이어지고 있을 때 김일성 사망설이라는 게 나왔다. 1986년 11월 중순 깜짝쇼랄까 포복절도할 기만적 사건이라고나 할까, 쓰나미처럼 남한을 집어삼키는 것 같은 김일성 사망설이 갑작스레 터졌다.

1976년 1월 박정희의 포항 석유 발표 때처럼 장기간에 걸친 것은 아니었지만, 김일성 사망설은 많은 대중을 히스테릭한 흥분 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에서 정부 그리고 일부 언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표와 보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김일성 사망 오보 소동의 주역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어떻게 보도했나.

서중석 : 최초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조선일보>였다. 1986년 11월 16일 <조선일보> 1면에 사이드 톱으로 '김일성 피살설 동경에 소문 파다, 사실 여부 확인 못해'라는 제목으로 5단 기사가 실렸다.

그다음 날 <조선일보>는 놀라운 기사를 실었다. 호외로 나왔는데 엄청나게 큰 글자로 '김일성 총 맞아 피살',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김일성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 굵은 글씨로 <휴전선 방송 "열차 타고 가다 총격 받았다", 전방 북괴군 영내에 일제히 반기(半旗) 올려, "군부 중심 심각한 권력 투쟁 진행 중인 듯">,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기사보다 큰 글씨로 이렇게 썼다. "북괴 김일성이 총 맞아 피살됐거나 심각한 사고가 발생, 그의 사망이 확실시된다. 휴전선 이북의 선전 마을에는 16일 오후부터 반기가 게양되었으며 휴전선의 북괴군 관측소 2개소에서는 이날 '김일성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했고 4개소에서는 '김정일을 수령으로 모시자'는 대남 방송을 했다." 확인이 안 되는 얘기를 어떻게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게 호외로 나왔다.

호외 뒷면엔 '동경엔 군부 불만 세력 저격설'이라는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뽑혔다. 그러면서 또 세로로 주요 내용을 설명했다. 그 가운데 네 번째가 정말 기이하고 도깨비 같은 기사였다. <조선일보>가 세계적 특종을 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사는 16일 자에서 김일성의 피살설을 세계 최초로 특종 보도했다. 김의 피살설이 처음 들어온 것은 15일 오후 9시 30분께였다. 본사 김윤곤 특파원은 일본 정부 소식통으로부터 김이 피살된 것 같다는 첩보를 입수,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여러 증상이 나타나 이를 긴급 본사에 송고, 세계적인 특종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 신문들도 17일 자 조간에서 본지를 인용, 김의 피살설을 보도했다." 이게 17일에 나온 <조선일보> 호외의 주된 내용이다.

이러한 <조선일보> 보도도 큰 문제였지만, 그것 못지않게 국민들한테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은 정부의 발표였다.


▲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라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조선일보 1986년 11월 17일 호외. ⓒ조선일보

"확인은 안 되었지만 보도는 필요", 정치적으로 김일성 사망설 이용한 전두환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전두환은 11월 16일 네 차례에 걸쳐 보고를 받고, 김일성 사망설에 대한 보고일 텐데, 북한의 심리전으로 파악하고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어떻게 그렇게 꼭 집어서 얘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게 심리전인지 뭔지는 그때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하여튼 그 이상은 없었다, 이 말이다.

17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김일성 사망설에 따른 대응책 논의를 위한 비상국무회의가 열렸는데, 전두환은 이 회의를 주재하면서 신빙성이 없다고 피력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그런데 그렇게 당연한 얘기를 했는데도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김일성 사망설이 확인은 안 되었지만 보도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사망설을 보도하라, 이 얘기였다. 아니, 신빙성이 없으면 보도하지 않거나 또는 확인된 사실이 전혀 아니라고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망설을 보도하라고 한 건 무슨 의도로 그런 것이겠나.

프레시안 : 왜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인가.

서중석 : 전두환이 그렇게 얘기한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10년 전인 1976년에 불거진 포항 석유 문제에서 포항 석유 시추를 관리한 곳은 중앙정보부였다. 이번에는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에서 금강산댐 문제를 전부 다뤘다. 1976년 포항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데도 석유가 나온다고 발표를 해가지고 국민들을 몇 달 동안 포항 석유설 환상에 매달리게 해서 다른 데 관심, 그건 유신 체제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건데, 그걸 갖지 못하게 하지 않았나. 그 사실을 전두환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개헌 투쟁을 분쇄하고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데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 사건, 건대 사태,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을 활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두환 정권은 김일성 사망설도 같은 방식으로 이용했다.

그러한 전두환한테는 아주 든든하고 믿음직한 우군인 <조선일보>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바로 11월 17일 호외에서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제목을 뽑아 보도라는 걸 한 바가 있다.

보도는 필요하다고 전두환이 말한 대로 정부는 17일 상오 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북괴는 16일 전방 지역에서 대남 확성기 방송을 통해 김일성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을 방송했다"고 발표했다. 이걸 자세히 분석하면 '그냥 그렇게 방송한 모양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만, <조선일보> 보도하고 맞춰서 보면 '정말 사망한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더 쉽게 돼 있었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이런 발표가 나왔을 텐데, 그것도 아주 큰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의 발표는 이기백 국방부 장관의 국회 보고를 통해 나왔다.

이기백, 정반대 보도들이 나왔는데도 "김일성 사망 확실해 보인다"고 국회 보고

프레시안 : 이기백은 국회에서 뭐라고 얘기했나.

서중석 : <서울신문> 보도를 보면, 17일 그날 오후 이기백 국방부 장관은 국회 보고를 통해 "여러 가지 통신과 전방에서 입수된 북괴의 동정, 외국 공관의 첩보 등에 따르면 아직 김은 확실히 죽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김일성의 사망이 확실해 보인다", 이렇게 말했다.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에 더 믿음성을 둘 것이다, 이 말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더 추가된 말도 있었다. "북괴 내부에 심각한 권력 투쟁이 있는 것이 확실하며, 아니면 김이 일단 죽었으나 수장이 사망할 경우 3일 이상 비밀을 지키다가 발표하는 공산 국가의 관례에 따라 아직 발표하지 않은 것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얘기했다.

이기백 장관의 이러한 발표는 자신이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정치적인 의미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국방부 대변인 발표도 문제가 심각했지만, 이기백 국방부 장관의 17일 오후 발언은 더욱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정치적인 의도가 무의식중에라도 깊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기백이 그러한 발표를 하기 전에 이미 그 발표와 배치되는 사실이 보도됐다.

프레시안 : 어떤 보도였나.

서중석 : 이기백 장관의 국회 보고 내용은 18일 자 아침 또는 17일 오후 여러 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동아일보> 11월 17일 자에는, 이 보도는 이기백의 국회 보고 전에 나온 것인데, 중국 베이징의 북한 대사관 관리가 김일성 사망설에 대해 AP통신에 "완전 조작이며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딱 부러지게 말한 것이다. 또 어떤 기사가 실렸느냐 하면 "중공 외교부의 아시아국 고위 당국자는 17일 김일성이 살해되었다는 정보는 현재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는 <교도통신> 보도를 전하는 기사도 게재됐다. <교도통신>이 폴란드 관영 통신 평양 주재 특파원의 보도를 인용해 "북한 당국은 김일성 피살설을 부인했다"고 전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이 세 가지 보도가 17일 자에 나왔는데, 이것만 봐도 김일성 사망설을 믿기 어렵다는 건 분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경향신문> 11월 17일 자 보도를 보면, 백악관 대변인이 17일 미국 정부는 김일성 사망설에 대해 뉴스 보도 이외에는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미국 정부 소식통들은 16일 최근 나돌고 있는 북한의 김일성 사망설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논평했다"고 <경향신문>은 보도했다. 또한 주한 미군 당국이 17일 아침, 이기백은 그날 오후 발언한 것인데, 김일성 사망설에 대해 "상황을 논평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중요한 보도가 이렇게 여러 가지 나왔는데 어떻게 이기백처럼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말이다. 또 한미 연합사 정보 참모 부서는 17일 아침 회의에서 김일성 사망을 확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판문점에서 반기 게양을 관측한 사실이 없다. 어떤 미국인도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확성기 방송을 들은 바 없다"고 미군 측은 밝혔다. 미군 측은 "휴전선 확성기 방송 내용도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그러고저러고 이기백 발표는, 이미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이 많이 보도됐는데도 그런 식으로 발표했다는 것, 그 점이 문제였다고 나는 본다. 국방부 대변인 발표도 문제였고 호외를 비롯한 <조선일보> 보도도 아주 문제가 많았다. 그렇게 명백하게 규정할 만한 게 없지 않았나.

오보 가능성 높아지는데도 '김일성 사망설' 밀어붙인 <조선일보>

ⓒ오월의봄
프레시안 :
"세계적인 특종"이라고 자화자찬한 <조선일보>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조선일보>는 11월 18일 자에도 17일 호외에 쓴 것과 비슷한 보도를 또 했다. 18일 자 <조선일보>는 1면, 2면, 3면, 4면, 5면, 10면, 11면, 이렇게 여러 면에 걸쳐 이 문제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5면의 경우 김일성 사망설로 채웠고, 다른 면에서도 김일성 사망설 관련 기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1면 톱 제목이 "김일성 피격 사망", 아주 크게 뽑은 그것이었는데 이번엔 따옴표를 붙였다. 그러면서 김일성 사망설의 근거로 네 가지를 소제목으로 뽑았다.

앞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김일성 사망설과 배치되는 여러 이야기가 17일에 공산권 등에서 나왔고, 사실 휴전선에서 뭔가 있었다는 부분도 미군 측 발표를 보면 불확실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18일 자에도 같은 기조로 보도했다. 18일 자 1면 보도를 보면 사이드 제목이 '14일 서부 전선 시찰길 저격, 오진우가 실권 장악 가능성', 이렇게 돼 있고 부제가 '김정일도 연금 상태 추정'이라고, 출처가 일본 외교 소식통이라고 하면서, 돼 있다.

놀라운 것은 1면 '팔면봉', 몇 자로 촌평하는 이 코너에도 '김일성 피격 사망, 제명에 못 죽는 걸 보니 역시 무심치 않군', 이렇게 돼 있다는 점이다. '팔면봉'에 실린 촌평이 4개였는데, 전부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풍자 글이었다.

그런데 사실 1면에 1단으로 돼 있는 조그마한 기사에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몽골 주석 잠빈 바트문흐가 예정대로 방북을 위해 출발했다고 소련 <타스통신>이 보도했다고 나와 있다. 이건 김일성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확인된 정보 없다", "분명해질 때까지 추측 안 해"라는 미국 국무성 브리핑도 들어 있다.

극우 반공 체제에 유리하면 허위 기사·발표도 괜찮다는 이상한 사회

프레시안 : <조선일보>는 왜 그렇게 단정적으로, 시쳇말로 세게 보도한 것일까. 신문사가 기본적으로 특종이라는 것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조직임을 감안하더라도, 근거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단정하는 기사를 내보낸다는 건 상식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냉전이 계속되던 시기였고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서중석 : 그런데도 왜 그렇게 보도했느냐. '이건 의도가 상당히 있는 것이다. 뭔가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에서 양 진영이 대결할 때, <조선일보>가 그런 경우가 많았지만 다른 신문도 북한이나 공산권에 관해 사실이 아닌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내보낸 경우가 적잖게 있었다. 그 점은 정부 발표도 비슷했다.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대해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을 왜 그렇게 크게 발표했느냐', 이렇게 물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런 허위 톱기사 또는 발표는 그것대로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고 할까, 그래서 극우 반공 체제를 굳히는 데 일정한 역할을 분명히 했다. 그게 허위인데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문제 삼을 수 있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돼 있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신문에서나 TV에서나 그런 문제가 있는 것들을 기자로서 양식도 없이 또는 죄의식도 없이 그렇게 크게 발표하고 '나중에 틀리면 어때?' 하면서 '홍콩에 있는 모 소식통', 이런 식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그 시기에 드물지 않게 있었던 게 사실이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또 1980년대에 걸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1990년대나 2000년대에 와서도, 물론 그전보다는 줄어들었지만,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설 때의 발표 또는 보도와 같은 식으로까지 하는 건 없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조금만 냉정하게 사태를 보려 했다면 그렇게 보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신빙성이 없다고 자기가 얘기해놓고도 사망설 보도는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더군다나 1986년 11월 17일 오후에 있었던 이기백 발표, 그건 조금이라도 제 정신을 가지고 사물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그런 발표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발표가 나왔다. 또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이, <조선일보>가 제일 많이 언급되지만, 그런 보도를 했다.

▲ "김일성 살아 있다"고 보도한 경향신문 1986년 11월 18일 자 1면. ⓒ경향신문


오보로 판명된 "세계적 특종"…김일성 사망설과 금강산댐 사건은 결코 무관치 않다

프레시안 : 김일성 사망 보도는 얼마 못 가서 오보로 판명되지 않았나.

서중석 : 1986년 11월 18일 자 <경향신문>에 이렇게 나왔다. <동아일보>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는데, 이날 <경향신문>은 1면 톱으로 "김일성 살아 있다"고 큰 제목으로 뽑아서 보도했다. 그러면서 평양 공항에서 김일성이 직접 몽골 국가 원수를 영접하는 사진을 일본 NHK가 내보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1월 19일에 가서 "김일성은 살아 있었다", 이렇게 제목을 뽑았다. 그러면서도 북한 내부에서 심각한 권력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기사를 썼다.

프레시안 : 김일성 사망 오보 소동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나고 보나.

서중석 : 김일성 사망설과 관련해 특히 일부 신문은 40년 동안 휘둘러온 반공 냉전 이데올로기를 한꺼번에 극대화해 최대의 효과를 보려는 듯 선정적으로 보도해 일반 대중을 큰 혼란에 몰아넣었다.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여러 날 동안 김일성 사망설은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일반 대중 역시 진실이 뭔지를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지식인, 언론인조차 흥분해 있었다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모습을 그 당시에 찾기가 어려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렇게까지, 정말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비합리적인가' 하는 생각이 그때 많이 들었다. 지식인, 언론인조차 그런 모습을 보였다.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광기 어린 사이비 종교에 홀린 것 같기도 했고 집단 최면에 걸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이 금강산댐 규탄 사건과 결코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고 본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금강산댐 규탄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김일성 사망설은 얼핏 보면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로 기득권을 누렸던 자들이 보인 광태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보면 권력이건 일부 언론이건 선정적으로 반공 심리를 자극하고 흥분시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하면서 극우 반공 체제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정치 쇼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강산댐 규탄 사건과 김일성 사망설은 파시스트들이 대중을 정치 조작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또한 '북한 관계 및 공산권 관계에 대한 발표나 보도는 아무리 허위이고 과장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반공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괜찮다'는 통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사건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같은 곳에서 그렇게 허위 보도를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북한이나 공산권에 관한 건 틀려도 좋다. 반공 의식을 굳히는 데 역할을 하는 것이니까 잘못된 일이 아니다'라는 식의 사고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 사망설이 오보로 판명된 직후인 1986년 11월 19일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에 출석한 노신영 국무총리에게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노신영 국무총리는 "북괴가 김일성의 사망설을 유포한 것은 기만 술책", "궁지에 몰린 북괴가 우리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려는 술책"이라고 주장하며 사과 요구를 거부했다.

"세계적인 특종"이라고 강변한 <조선일보> 역시 전두환 정권과 마찬가지로 사과하지 않고 북한을 탓했다. 이것에 대해 <한겨레>는 2001년 '언론 권력' 기획 연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숱한 북한 오보에서 그랬던 것처럼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 식으로 버티며 독자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서방 언론들은 정말 놀라고 있다.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알린 셈이 되었다"고 쓰면서 책임을 엉뚱하게 북한에 떠넘겼다.>

언론학자인 김정기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한겨레> 기고(1998년 9월 24일 자)에서 1986년 <조선일보>의 김일성 사망 오보와 1984년 <워싱턴포스트> 기자 더스코 도더의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사망 특종을 비교하며 이렇게 썼다. "두 공산 국가 지도자의 사망에 관해 왜 한쪽은 세계적인 특종을 할 수 있었고 다른 한쪽은 세계적인 허보를 내고 말았는가? 한쪽은 전문 직업주의의 기준 아래 논리적 추론을 수행한 반면 다른 한쪽은 반공 신화의 순환론 안에서 추측을 뉴스로 만든 결과이다. (…) 김일성 사망이라는 세기적 오보는 기자가 논리적 추론을 하는 대신 북한에 관한 나쁜 소식이면 그것을 모두 반공 신화라는 가마솥에 넣어 뉴스로 만들어내는 반공 신화의 순환론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신문들은 언제까지 반공 신화의 순환론에서 맴돌 것인가?" '편집자')

그런데 이게 정치적인 의도가 아주 심각하게 들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게 또 있다.


▲ 평양의 축구 경기장을 시찰하는 김일성 부자. ⓒ연합뉴스


금강산댐 공포 조장해 평화의 댐 성금 거둬들인 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김일성 사망설 파동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크게 부끄러워할 일 아닌가.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바로 금강산댐에 대한 대응 운운하면서 새로운 댐을 만들기 위해 성금을 걷자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1986년 12월부터 그해 연말을 거쳐 이듬해 초봄까지 북한의 수공 작전과 성금, 평화의 댐 착공식 보도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그런데 지난번에 얘기한 1993년 감사원 발표를 보면, 1986년 안기부에서 정보 분석을 한 결과 북한이 금강산댐 공사에 전력투구하더라도 최초의 위협 시기는, 이건 9억 톤이 저수되는 시기를 말하는데, 1989년 10월이라고 판단했다. 전두환 정권이 엄청나게 선전한 것처럼 금강산댐이 공격용이라고 치더라도, 1989년 10월이면 88올림픽과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안기부장이 의견 조정을 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단계에서 대응 댐을 조기 착공토록 변경해 올렸다. 감사원은 또 금강산댐 건설 목적에 대한 정보 분석이나 사력댐의 인위적 폭파 가능성 검토 결과에 따르면 대응 댐을 착공할 필요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대응 댐을 지을 필요 없이 화천댐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으로 북한의 수공 가능성에 대비할 수 있었다고 감사원은 판단했다. '편집자')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으로 성금을 모았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원납전이라는 이름으로 성금을 모은 이래 성금이라는 건 최근의 사건까지 포함해서 대부분 권력을 위한 성금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 말에도 성금을 내라고 얼마나 독촉했나. 1987년 6월항쟁 이후 그래도 그런 식의 성금이라는 게 많이 없어졌는데, 예전에는 국민학생 호주머니까지 터는 식으로 성금을 걷었다. 하여튼 그때 1년간 400억 원을 목표로 성금 모으기가 추진됐는데, 목표를 초과해 660억 원 넘게 걷혔다.

이 성금 모으기 또한 안기부 2차장 이학봉이 주재한 대책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안기부는 성금을 최대한 많이 모으기 위해 언론 기관을 활용한 홍보 대책도 세웠다. 안기부가 금강산댐에 대한 허위 과장 보고나 규탄 대회 같은 걸 통해 국민들한테 공포감을 갖게 하고, 그러면서 국민들이 성금 모으기에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도록 홍보 조작을 해낸 것이다.

(원납전(願納錢)은 원해서 자발적으로 내는 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강제로 내야 하는 등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원납전(怨納錢), 즉 원망하면서 낼 수밖에 없는 돈으로 불렸다.

평화의 댐 성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정권 차원의 할당도 이뤄졌다. 1993년 8월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은 매출 규모를 기준으로 각 기업체에 10억 원에서 700만 원까지 성금 액수를 할당했다. 또한 평화의 댐 성금 모금 성과를 높이기 위해, 연례적으로 실시하던 연말연시 불우 이웃 돕기 운동 홍보도 보류했다.

평화의 댐 성금 모으기를 위해 각계 인사가 동원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당시 MBC 아나운서였던 손석희는 "아나운서, 기자, PD 할 것 없이 모든 탤런트, 코미디언, 가수까지 다 동원돼서 시내로, 학교로, 절로, 교회로 뛰었다"며 "우리는 그것을 '앵벌이'라 불렀다"고 1993년에 쓴 글에서 밝혔다.

그런 식으로 정권 차원에서 긁어모은 성금 661억 원 가운데 22억 원은 노태우 정권 때 평화의 댐 공사가 중단되면서 5개 은행의 특정 금전 신탁에 들어갔다. 대통령령으로 정한 관리 규정에 오직 댐 건설에만 쓰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일반 예산에 편입되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자가 계속 붙어 1997년 1월에는 원금의 10배에 가까운 214억 원으로 불어났다. 이 때문에 "댐 공사를 다시 시작하거나 대통령령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돈으로 계속 이자 놀이만 할 수밖에 없으나, 공직자 재산 등록과 금융 소득 종합 과세 시행으로 '건교부 장관' 이름으로 통장을 관리하기도 어렵게 됐다"고 건교부 관계자가 토로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나타나기도 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당시 초등학생이던 제 지인 중에는 자기 돼지 저금통을 깬 것은 물론 친구들 돼지 저금통까지 깨게 해서 성금을 낸 경우도 있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터트리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걱정에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금강산댐 사건이 사기극이란 걸 알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 일 이후 당시 정권 및 여당이었던 쪽에서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고 한다. 다시 돌아오면, 전두환 정권이 민주주의 요구를 분쇄하기 위해 김일성 사망설 등을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나.

서중석 : 김현규 신민당 총무는 정부가 "김일성 사망설이라는 미확인 정보를 국회에 정식 보고하는가 하면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국가 위신을 추락시키고 국민을 당혹케 했다"고 지적하고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또 김일성 사망설로 히스테릭한 흥분이 대단하던 11월 17일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 주교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이 공동 집전해서 정의·평화를 위한 미사를 올렸다. 그런데 이 미사가 끝나고 나서 그날 저녁 청년 신도, 상계동 철거민, 구속자 가족 등 400여 명이 성당 입구에서 "장기 집권 획책하는 군부 독재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18일 KNCC 가입 교단 목사 60여 명은 '영구 집권 획책하는 독재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민정당사 정문 앞에서 "독재 타도하자", "민정당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처럼 이 시기에 전두환이 장기 집권을 획책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규탄하는, 이런 시위가 꼭 김일성 사망설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 우려할 만한 여러 행위를 하고 있는 것에 강하게 항의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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