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야당 대통령 예상했어도 6·29선언 발표했을까?
프레시안 : 1987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6월항쟁에 굴복해 6·29선언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밀려서 그 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직선제로는 대선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6·29선언을 내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부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6·29선언에서 제일 궁금한 것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직선제를 하면 야당에서 대통령이 된다'고 예상했을 경우에도 과연 6·29선언을 발표했을까 하는 점이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야당 대통령이 나오면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들이 김대중, 김영삼에게 한 짓이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예상했을 것이다.
1980년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 문제도 대두될 게 뻔했다. 광주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학살 책임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그것도 아주 거세게 나오지 않았나. 민주주의를 짓밟고 현행법을 어긴 1979년 12·12쿠데타, 1980년 5·17쿠데타에 대한 단죄도 예상했을 것이다.
특히 전두환은 역사 바로 세우기 대상 제1호가 될 게 틀림없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야당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이 1986년 하반기에 초토화 작전이라고까지 얘기할 수 있는 초강경 일변도의 탄압 정책을 펴고, 1987년에는 4·13 호헌 조치에 이어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바로 퇴임 후 자신의 안전 문제 때문이었다.
프레시안 : 직선제가 부활하면 전두환·노태우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
서중석 : 직선제가 실현되면 야당이 승리할 것이 너무나 뻔해 보였다. 노태우 회고록에도 그렇게 돼 있고, 다른 여러 자료에도 그렇게 나온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돼 있었다. 노태우에게 직선제가 사지라는 건 누가 봐도 명약관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는 승리가 절대적으로 요구됐다. 반드시 승리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여기서 전두환에게 퇴임 이후의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그렇게 따르고 자신한테 그토록 고분고분했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전두환이 한 짓을 통해서도 그 문제가 전두환에게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노태우 당선 후에도 자신의 안전 보장 대책 챙긴 전두환
프레시안 : 노태우 당선 후 전두환은 그것과 관련해 어떤 조치를 취했나.
서중석 : 노태우가 당선된 지 불과 열흘 만인 1987년 12월 26일, 전두환은 군 인사를 단행해 친위 세력을 군 요직에 앉혔다. 이미 군의 주요 보직에 자기 측근들을 상당수 앉힌 상태였는데, 퇴임을 앞두고 또 친위 세력을 요직에 등용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퇴임 후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노태우라고 하더라도 일단 대통령이 되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전두환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기용한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 민병돈 특전사령관, 이종구 2군 사령관 외에도 합참의장에 최세창, 3군 사령관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에 최평우, 수방사령관에 김진영을 임명했다.
노태우는 이러한 인사를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그래서 대통령에 취임한 후 반격을 가했다. 전두환의 측근들을 차례차례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예전에 거느렸던 부하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물갈이했다.
프레시안 : 다른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이렇게 전두환은 퇴임 이후의 안전 대책으로 자신의 친위 세력 또는 측근들을 군 요직에 대거 앉혀놨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옥상옥'을 만들려 했다. 전두환 측은 1987년 헌법을 개정할 때 이미 국가원로자문회의, 이때는 국정자문회의라는 용어를 썼는데, 그것에 관한 요구를 했다.
야당은 당연히 국가원로자문회의에 대해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국가원로자문회의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에 찬동했다. '퇴임 후 차지할 그럴듯한 자리를 전두환이 요구하는데, 이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전두환이 평화적으로 물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받아주자',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87년에 탄생한 새 헌법, 오늘날에도 쓰이는 이 헌법의 제90조를 보면 이렇게 돼 있다. "1.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 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 2.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 다만, 직전 대통령이 없을 때에는 대통령이 지명한다." 이렇게 헌법에 명시해놓았다.
그러고 나서 전두환은 퇴임 한 달 전인 1988년 1월 16일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을 국회에 내놓았다. 물론 야당은 이 법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렇지만 전두환 퇴임 이틀 전인 그해 2월 23일 민정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이 법을 통과시켰다.
(전두환이 퇴임 후 안전 문제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사례가 박철언 회고록에 나온다. 임기 중반 무렵인 1984년 12월 3일 전두환은 장세동 경호실장, 허문도 정무1수석과 박철언 등을 따로 불러 전직 대통령의 예우와 경호를 보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단임 의지를 여러 번 천명했다고 얘기한 후, "(그러나) 후진국에(서)는 필사적으로 정권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며 그 이유로 정치 보복 문제를 거론했다.
전두환은 이날 결론 격으로 이렇게 얘기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생존 기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직계 가족에 대해 형사 면책의 신분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그 방안을 박철언에게 중점 연구하라고 얘기하는 한편 당정 협의를 거쳐 정부 입법으로 추진할 것을 참석자들에게 지시했다. 대통령 본인이 재임 중 내란이나 외환의 죄를 제외하고는 형사 소추되지 않는 선을 한참 넘어, 전직 대통령 사후까지 그 직계 가족에게 형사 면책 신분을 보장하겠다는 것은 다시 한 번 헌법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이 시기에 생존해 있던 전직 대통령은 5·16쿠데타 1년 후인 1962년 대통령직에서 중도 사퇴한 윤보선, 그리고 전두환·신군부가 끌어내린 최규하, 이렇게 두 사람뿐이었다. 그 이외에 전직 대통령 직계 가족으로 박근혜를 비롯한 박정희의 자녀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그와 같은 헌법 파괴적 지시를 내린 핵심 이유가 윤보선과 최규하의 직계 가족, 그리고 박근혜 등을 떠받들기 위해서라고 볼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 사후까지 그 직계 가족이 형사 면책이라는 특권을 누리게 하겠다는 발상은 전두환 본인의 퇴임 후 자신 및 가족의 안전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전두환은 이날 "퇴임 후에도 당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편집자')
전두환은 김대중이나 김영삼의 당선을 좌시할 수 없었다
프레시안 : 국가원로자문회의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전두환의 구상도 결국 물거품이 되지 않나.
서중석 : 1988년 4·26총선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면서 다행히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은 폐기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사문화됐다.
이처럼 전두환은 1987년 대선 후 친위 세력으로 군 요직을 채웠다. 그것보다 더 큰 건 국가원로자문회의에 관한 부분이다.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를 1987년 새 헌법에 명시하게 하고, 1988년 2월 퇴임 이틀 전에는 그것에 관한 법을 강행 통과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가장 적합한 후계자라고 생각한 노태우가 당선됐는데도 전두환은 이런 정도로 나왔다.
그렇지만 전두환은 1988년 11월 결국 백담사로 귀양 비슷하게 떠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것에 대해 전두환은 나중에 이렇게 얘기했다. "백담사 생활 초기에는 분노와 배신감, 억울함과 고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백담사로 떠날 무렵 노태우에 대한 전두환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백담사에 가기 보름 전인 1988년 11월 8일 전두환은 노태우 정권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박철언 등 네 명을 불러 이렇게 얘기했다. "(동생 전경환에 이어) 형님이나 처남까지 또 잡아넣겠다는 것은 (…) 노태우가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편집자')
하여튼 전두환은 퇴임 후 자신의 안전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12·12쿠데타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는데, 그런 전두환이 과연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당선되는 것을 좌시할 수 있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바늘에 실 가듯이 따라붙은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 복권
서중석 : 노태우와 전두환에게는 직선제로 할 경우 야당 후보가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니까 양김이 모두 후보로 나와야만 한다는 게 중요했다. 1987년 6월 24일 전두환과 노태우가 직선제 문제를 논의할 때 그 자리에서 '직선제를 한다', '김대중을 사면 복권한다', 이 두 가지만 합의를 봤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6·26 국민 평화 대행진 상황을 보고 나서 결정하자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아무튼 그 두 가지는 그야말로 바늘에 실 가듯이 항상 따라붙게 돼 있었다.
그래야만 김대중과 김영삼, 그 두 사람이 후보로 나올 것이다, 이 말이다.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니까 김대중과 김영삼, 이 두 사람의 사이가 별로 안 좋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김대중을 사면 복권해줘야만 한다'는 것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머릿속에는 철칙 중의 철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6·29선언 전날인 6월 28일 오전 전두환은 김성익 비서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김대중은 직선제가 되면 대통령 선거에 안 나오겠다고 했지만 안 나올 리가 없다. 김영삼도 마음을 비웠다고 했지만 그렇게 못할 것이다." 그날 오후에는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이렇게 얘기했다. 6·29선언의 전말을 김성익에게 얘기할 때에도 전두환은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김대중을 풀어 출마하도록 하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확신을 했고 꼭 김대중과 김영삼, 이 두 사람이 갈라져서 따로따로 후보로 나와야 한다고 봤다.
전두환, 야당 승리에 대비해 비상 대책 마련했을 수도
프레시안 : 6·29선언은 6월항쟁에 굴복한 결과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6·29는 속이구'라는 지적이 세간에서 적잖게 나온 것도 그 부분과 관련이 있다. 더욱이 양김은 6·29선언 이틀 후 "(19)80년과 같은 우매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해놓고 끝내 "우매한 짓"을 저지르며, 민주화를 열망한 사람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두환·노태우의 노림수에 제대로 걸려든 셈 아닌가.
서중석 : 그게 현실로 나타나기는 했다. 그렇지만 전두환이 아무리 확신을 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물론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권유하면서 엄청난 선거 자금을 줬다고 나와 있다. 강준만 교수의 책에는 노태우 정권의 한 핵심 인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나온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전 대통령이 선거 자금으로 민정당에 수천억 원을 지원한 (것) 외에 노 후보의 집을 방문해 천이백 몇 십 억 원을 별도로 줬어요. (…) 그리고 대통령을 물러나면서도 상당한 돈을 정치 자금으로 물려줬어요."
이렇게 엄청난 돈을 준 건 당연히 선거에서 이기라고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대중을 사면하면 김대중과 김영삼 두 사람이 반드시 나온다. 그럴 경우 어마어마한 선거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여러 가지를 하면 노태우가 당선될 수 있다', 99퍼센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나머지 1퍼센트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는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무언가 비상 조치 또는 비상 대책, 이런 것을 마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럴 경우 그전의 사례와 비슷하게 그러한 비상 조치 또는 비상 대책은 군 출동이나 안보 문제와 관련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6·29선언 이후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을 것이다. 양김이 갈라서서 두 사람 모두 출마하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불안과 초조 속에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냈을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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