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수해 구호물자 제공 계기로 분위기 바뀐 남북 관계, 정상 회담 논의 급물살
프레시안 : 1984년과 1985년에 남북 관계에서 중요한 일이 연이어 진행됐다. 북한에서 제공한 수해 구호물자가 남한에 내려오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정상 회담 논의까지 비밀리에 이뤄졌다.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1983년) 기억이 생생할 때인데 어떻게 1984~1985년에 그런 일들이 있게 된 것인가. 이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박근혜 정권에 들어와서 개성공단까지 폐쇄되는 등 꽉 막힌 남북 관계를 풀어갈 길을 찾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1980년대 중후반부터 국내에서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1984년에 조직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 모두 통일 문제를 중시했고, 이 두 조직이 통합해 1985년에 출현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도 이름 자체에 통일이 들어간 데서도 드러나듯이 통일 문제를 중시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 동안 453시간 45분에 걸쳐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한 것도 사람들한테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갖게 했다.
그러면서 1980년대 중반에 남북 간의 관계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였다. 남북 관계는 자연재해로 인해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다. 1984년 가을에 접어들 무렵 남한에 큰 물난리가 났다. 그해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폭우에 산사태까지 겹치면서 사망자가 190명, 수재민이 20만 명에 이르렀다. 그해 7월에 집중 호우로 수재가 발생했는데, 그 수해 복구 작업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또 폭우가 쏟아져 피해 규모가 아주 컸다. 영호남에서도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피해 규모가 특히 컸던 지역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였다. 한강이 역류해 서울 망원동 일대가 물에 잠긴 게 바로 이때다.
이렇게 큰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이 남한에 구호물자를 전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두환 정권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놀랍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그 전 해에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이 있었는데도 수해 구호물자 전달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의 구호물자 전달 제안을 전두환 정권이 받아들이면서 남북 관계는 '남북 정상 회담을 하자'고 논의하는 수준까지 진전됐다.
프레시안 : 이때 북한은 남한에 쌀, 시멘트, 의류, 의약품 등을 전달했다. 남북 관계에서 이런 일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그 후 정상 회담 논의, 어떻게 진행됐나.
서중석 :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가 남한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후인 1984년 12월 26일 임창영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장시간 면담을 했다. 임창영은 장면 정부 때 유엔 주재 대사를 한 사람인데,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에 머물렀다. 이 사람은 1970년대에 미국에서 반(反)박정희 운동을 강도 높게 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호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해서 친북 세력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임창영이 이제는 전두환의 밀사로 김일성을 찾아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임창영이 남북 정상 회담을 제의하자 김일성은 즉각 동의했다.
그러나 이때는 남북 정상 회담이 실현되지 못했다. 그 후 1985년 5월에 들어와 남쪽에서는 안기부가 주무 부처가 되면서 다시 남북 비밀 접촉이 이뤄지게 된다. 이때 안기부장은 장세동이었다. 장세동은 청와대 경호실장을 하다가 1985년 2·12총선 직후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해 5월 장세동은 남북 관계와 관련해 안기부가 모든 일을 준비하고 시나리오를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5년 남북 정상 회담 논의 과정은 박철언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상세히 나온다. 박철언은 이때 안기부장 특보였는데, 안기부가 남북 비밀 회담의 남쪽 실무를 맡게 될 때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자격으로 남북 비밀 접촉의 수석대표를 맡았다. 북쪽 수석대표를 맡은 사람은 1970년대에 유엔 대표부 대표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낸 한시해였다.
박철언과 한시해는 1985년 7월 11일 판문점 남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철언 등 남측 대표단은 최고위급 회담을 제의했으나 북한 대표단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북한 대표단은 정상 회담을 하기 전에 두 정상이 논의할 의제, 회담 후 발표할 선언 내용 등을 미리 정해놓자는 태도를 취했다.
7월 26일에는 박철언이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으로 가서 한시해와 두 번째 회담을 했다. 8월 9일 박철언이 한시해와 세 번째 비밀 회담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상호 방문에 대해 북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상호 방문 문제는 공개 회담인 적십자 회담에서 난항을 겪던 사안인데, 이 비밀 접촉 자리에서 큰 틀에서 사실상 합의를 봤다고 박철언은 밝혔다. 그 후 8월 22일에 열린 남북 적십자 실무 회담에서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상호 방문에 공식 합의하게 된다.
"어마니~", 눈물바다 이룬 분단 후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프레시안 : 분단 후 공식적으로 처음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그해 9월 20일 오전 9시 30분 판문점 군사 분계선을 넘어 북측 고향 방문단 50명, 예술 공연단 50명, 취재 기자 30명, 지원 인원 20명, 대표 1명, 총 151명이 3박 4일 일정으로 서울에 왔다. 똑같은 인원 151명이 남쪽에서 평양에 갔다.
남북 고향 방문단은 9월 21일과 22일, 이렇게 두 차례 가족과 상봉했다. 북한으로 가족을 만나러 간 지학순 주교는 월남하기 전에 교회를 다녔던 누이를 만났고, 박정희 정권 때 내무부 장관을 한 홍성철도 누나를 만났다. 북한의 인민 배우 김세영은 서울에서 한 살 때 헤어진 딸 김민희를 만났다.
남북 간에 혈육이 분단되고 처음으로 만나면서 수많은 일화, 눈물의 장면이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특히 북한에서 농업대 교수라는 54세의 서형석이 83세의 어머니 유묘술을 만나는 장면은 신문에 아주 크게 실렸다. 귀와 눈이 어두워진 노모는 처음에는 아들인지도 잘 알아보지 못하고 돌부처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흐느껴 울던 아들은 어머니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큰소리로, 귀가 어두우니까, "어마니, 맏아들 형석이가 왔어요"라고 외쳤다. 그렇게 소리쳤는데도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지도,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아들은 왼쪽 눈 가장자리 흉터를 어머니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마니, 어려서 돌 장난을 하다가 다친 흉터가 이것이지요. 이 상처를 고치느라고 어마니가 무척 고생하셨었지요." 마침내 어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조용히 글썽거렸다.
유묘술-서형석 모자의 이러한 모습을 여러 신문에서 찍어 크게 보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일보 1면에 아주 크게 난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서형석이 "어마니" 하면서 유묘술을 붙잡고 울부짖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었다. 이것은 분단의 비극 또는 분단의 아픔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그 후 여러 저서라든가 언론에 계속 오르내렸다.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갔지만 가족을 못 만난 경우도 있었다. 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던 71세의 박재창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1951년 1·4후퇴 때 고향을 떠났는데, 그때 고향 집 장독대에 올라서서 '어서 가라'며 손을 흔들던 어머니를 34년 만에 만나기 위해 평양에 갔다. 그렇지만 92세 노모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박재창은 대동강 강물과 평양 땅의 흙 한 줌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9월 23일 낮 12시, 똑같은 시간에 남측 고향 방문단, 예술 공연단 등 151명과 북측 151명이 군사 분계선을 통과했다. 3박 4일, 75시간 동안 열렸던 단절의 땅은 그렇게 또 막혔다. 양측 적십자사에서는 다시 만날 기회를 갖자고 다짐했지만, 다음 번 이산가족 상봉은 15년 후에야 이뤄지게 된다.
전두환-김일성 정상 회담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
서중석 : 1985년 9월 4일 조선노동당 중앙당 비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고위직에 있는 허담이 특사로 한시해 등과 함께 내려왔다. 허담 일행은 9월 5일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별장에서 전두환을 만나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다.
김일성의 친서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평양 방문 초청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높이 평가한다"며, 이건 정상 회담을 열자고 그전에 남측에서 제안한 그 부분을 가리키는 건데, 평양에서 정상 회담을 개최했으면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평양을 방문하라고 초청하는 내용이었다. 북한에서도 남북 정상 회담에 찬성한다는 것을 허담을 통해 전달한 것이다. 정상 회담 시기에 대해 김일성은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실현되기를 희망하며 회담 준비 사업이 진척되면 연내에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허담은 장세동 안기부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금년 내에 정상 회담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급하다"고 강조하면서 남측의 조속한 평양 방문을 촉구했다. 정상 회담 장소를 평양으로 기정사실화하려고 한 것이다.
10월 16일에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박철언 등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갔다. 장세동은 김일성에게 전두환의 친서를 전달했다. 전두환은 그 친서에서 남측의 정상 회담 제의를 수락한 김일성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정상 회담 의제와 관련해 공동 성명 채택, 불가침 선언 등에 대해 언급했다. 장세동, 박철언 일행이 서울로 돌아온 10월 18일 북한은 약속대로 제2계영호의 송환을 발표했다. 제2계영호는 백령도 근해에서 홍어를 잡다가 북한에 나포된 어선인데, 장세동 일행이 이 얘기를 꺼내자 북측에서는 이 배를 남쪽으로 보내주겠다고 밝히고 18일 그것에 관한 발표를 한 것이다.
프레시안 : 전두환-김일성 정상 회담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참 이야기가 오갔는데 어찌하다가 무산된 건가.
서중석 : 장세동 일행이 평양에서 돌아오고 나서 이틀 후인 10월 20일 새벽 북한 무장 간첩선 한 척이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서 침투하다가 우리 군에 의해 격침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이걸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북한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것에 대해 박철언은 "권력 핵심 쪽에서 언론에 그런 방향의 뉘앙스가 전달된 듯했다"고 썼다.
여기서 권력 핵심이라는 건 전두환 쪽을 가리키는 것 같다. 간첩선 격침 사건 발생 후 열흘이 지난 10월 30일 박철언이 장세동과 함께 남북 정상 회담 관련 사항을 보고했는데, 이때 전두환은 정상 회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면서 "간첩선 사건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며 비밀 회담 대표인 박철언한테도 강경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전두환은 "이제는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하지 마라"고 말했다.
이것으로써 남북 간 물밑 접촉을 통해 정상 회담을 열려는 노력은 사실상 끝을 맺게 된다. 박철언은 전두환 정권 내부의 친미 일변도, 극우적 흐름이 전두환한테 강하게 전달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서 그런 인물로 노신영 국무총리, 이원경 외무부 장관, 이규호 청와대 비서실장, 허문도 정무1수석을 꼽았다. 그 이후에도 남북 간 비밀 접촉이 몇 번 더 이뤄지고 박철언이 1986년에 다시 평양에 가기도 하지만, 1985년에 논의됐던 수준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남북 정상 회담 추진에 담긴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노림수
프레시안 :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 이듬해에 남북한이 수해 구호물자를 주고받고, 1985년에는 특사와 친서를 주고받으며 정상 회담 논의까지 진행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과 김일성 정권은 각각 무엇을 노리고 1984~1985년에 그러한 일들을 진행한 것인가.
서중석 : 전두환은 박정희보다는 통이 크다고 할까, 대담한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전두환이 1984년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를 받으면서 임창영을 통해 정상 회담을 타진한 것이나, 그다음 해에 특사를 주고받으면서 정상 회담을 열려고 한 데에는 정치적 목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이나 박정희나 1964년 올림픽이 열린 도쿄에서 신금단 부녀가 만났던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는가, 그리고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한국인들이 얼마나 환호작약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북한의 경우 '정상 회담을 하면 우리한테 불리한 것보다 유리한 게 많다. 7·4남북공동성명의 대원칙 하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할 경우 항상 우리가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신들한테 불리하면 언제든 거부하면 된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7·4남북공동성명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보면 북한은 남북 관계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해 구호물자 제공의 경우 북한에서 남쪽에 보낼 물품을 굉장히 서둘러서, 아주 힘들게 마련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구호물자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남쪽에서 받아들일 일은 없을 것이라고 봤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면서도 북한이 구호물자 제공을 나름대로 선전의 기회로, 물론 이 시기에는 남쪽이 더 좋은 물건을 만들고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생각하는 한편 이게 관계 개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기는 했을 거라고 본다.
그런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남북 정상 회담 논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이렇게 남북 정상 회담까지 한때나마 추진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적 목적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전두환의 밀사 임창영이 김일성과 만난 1984년 12월은 2·12총선을 앞둔 때였고, 1985년에 남북 비밀 접촉을 진행한 건 총선 이후 개헌 정국이 등장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에 대비한 조치라는 측면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프레시안 : 특사가 남북을 오가며 정상 회담 문제를 논의한 사례가 1985년 이전에는 없었나. 박정희 정권 때에는 어떠했나.
서중석 : 박정희 정권 때에도, 그러니까 7·4남북공동성명 무렵에도 북한에서 그 부분을 꺼낸 적이 있다.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은 이후락에게 박정희와 정상 회담을 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쳤다. 그렇지만 박정희는 정상 회담을 해서 자신한테 유리할 게 없다고 봤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볼 것이 7·4남북공동성명의 근거를 불확실하게 해놓았다는 점이다. 박정희, 김일성이 서명한 게 전혀 아니다. 서명자 부분을 보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 이후락 김영주", 이렇게 돼 있다. 정식 국호도, 서명자들의 직책도 안 넣었고 문구도 애매모호하게 해놓았다. 그래서 사실은 7·4남북공동성명에 남북이 합의한 건 틀림없고 박정희도 합의해준 건 틀림없지만, 공식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인정했으니까 그게 다 이뤄진 것이지만, 하여튼 이런 것들이 아주 묘한 측면이 있다.
한 가지 덧붙이면, 1984년 말과 1985년에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비밀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이 알려지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이 사실이 드러나기 전에는, 1985년 이산가족 상봉을 예로 들면 남북 적십자사 회담에서 합의를 이뤘다는 식으로만 쓴 글들도 여럿 있었다. 박철언과 한시해 간의 비밀 회담에서 그 문제에 대해 큰 틀에서 사실상 합의를 보고 그다음에 적십자 실무 회담에서 공식 합의했던 것인데, 비밀 접촉 부분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썼던 것이다. 그 시기의 남북 비밀 접촉과 정상 회담 논의 과정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박철언의 책, 돈 오버도퍼의 책 같은 게 나오면서 많이 알려지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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