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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래 최대 어음 사기', 그 뒤에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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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단군 이래 최대 어음 사기', 그 뒤에 청와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17>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스물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대통령 친인척이 일으킨 '단군 이래 최대 어음 사기 사건'

프레시안 : 1980년대 전반기에 사회를 뒤흔든 사건 중 하나가 이철희·장영자 사건이다. 왜 그토록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것인가.

서중석 : 전두환·신군부 정권 초반부터 학생 운동이 일어나고 '부미방' 사건(1982년 3월)도 발생하고 1983년에는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도 일어나고 그랬지만, 특히 사회적으로 관심을 크게 모은 것은 장영자·이철희 또는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이었다. 이건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 사건이라고 불렸다.

1982년 5월 7일 대검찰청은 장영자와 이철희를 외환 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이 부부가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에 현금을 빌려주고 대신 몇 곱절로 받아낸 어음 총액이 7111억 원에 달했다. 이 중 6404억 원어치를 할인해서 사용했다고 검찰은 발표했다.

사람들이 이 사건에 큰 관심을 보인 건 단군 이래 최대 어음 사기 사건이라고 불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액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청난 금액 때문에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이철희, 장영자라는 사람 때문에 '이건 굉장한 사건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프레시안 : 이철희, 장영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많은 이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가.

서중석 : 이철희는 일제 말 일본 육군 나가노 정보학교 출신으로 수십 년 동안 정보 계통에서 활동한, 그야말로 정보 계통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철희는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보였다. 그 후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는데, 중앙정보부 차장이라는 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직위 아니었나. 그런 자리에 있던 자였다. 유신 말기에는 유정회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기도 했다. 장영자는 대통령 부인 이순자의 삼촌의 부인 동생이었다. 그러니까 장영자의 형부 이규광이 전두환의 처삼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영자 부부의 어음 사기 사건에는 배후가 있지 않느냐', 이 생각이 많은 사람한테 떠올랐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15개월 동안 교제비와 생활비 등 개인 소비 명목으로 49억 원을 썼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도 큰돈이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엄청난 액수였다. 하루에 1089만 원꼴이었는데 그즈음 10년 경력 교사의 월급이 25만 원 안팎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인가를 알 수 있다고 노재현 기자는 얘기했다.

장영자는 주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건설업체 등과 접촉해 엄청난 액수의 현금을 빌려주는 대신 그것의 몇 배에 달하는 약속 어음을 받아냈다. 예컨대 공영토건, 규모가 상당히 컸던 이 회사의 경우 장영자는 빌려준 돈의 9배나 되는 1279억 원의 약속 어음을 받아냈고, 그걸 할인해서 또 다른 회사에 빌려줬다. 그렇게 받아낸 어음 총액이 7111억 원이었고 이 가운데 벌써 6404억 원어치를 할인해서 사용해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장영자는 남편 이철희의 중앙정보부 경력 같은 것도 활용하고 대통령과 친인척 관계라는 것도 팔고 다니면서 '이건 특수 자금이니 절대 비밀로 하라', 이러면서 돈을 빌려줬다고 한다.

청와대·안기부·보안사는 왜 장영자 부부의 사기 행각을 막지 않았을까

프레시안 : 한두 푼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금액을 굴리며 사기를 치고 다녔는데, 사회 곳곳에 촉수를 뻗친 각종 정보 기관에서 그걸 모를 수 없는 것 아닌가.

서중석 : 장영자 이 사람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 7월 장영자에 관한 첩보가 보안사에 들어갔다. 법명이 장보각행인 장영자라는 여성, 마흔 살 먹은 미모의 여성이 거액을 뿌리며 의문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영자는 1944년생으로 이때 실제로는 36세였다. 이철희는 장영자보다 21세 연상으로 육사 2기(박정희·김재규와 동기)다. '편집자') 그렇지만 보안사는 장영자를 집중 관찰 대상으로 지목하고 '이 사람을 조심하라'고 각 부대에 알리는 정도만 했을 뿐, 더 이상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이것과 관련해 '당시 보안사령관이 누구냐. 전두환 아니었느냐. 그것 때문에 무마된 것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보안사뿐만 아니라 안기부에서도 장영자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고 청와대 민정 비서실에도 장영자 부부가 뭔가 수상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어갔다. 그렇지만 이게 사건화된 것은 1982년 4월 공영토건이 '어음 사기를 당했다'는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하면서부터다. 이 사건으로 은행장 2명과 기업체 간부, 전직 기관원, 그리고 대통령 처삼촌까지 30여 명이 구속됐다. 포항제철 다음가는 규모이던 일신제강과 도급 순위 8위이던 공영토건이 부도 처리되는 등 경제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또한 두 차례에 걸친 개각으로 고관들도 대거 밀려났다.

어음 사기를 그처럼 엄청난 규모로, 대담하게 저질렀다는 점에서도 이 사건은 관심을 모았지만,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대통령의 처가 쪽 친척이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됐다. 그뿐 아니라 권력 내부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 이철희·장영자 구속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82년 5월 7일 자 11면. ⓒ동아일보

처삼촌 위해 보호막 친 전두환, 그럼에도 구속 못 피한 이규광

프레시안 : 권력 지형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나. 그리고 전두환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1982년 5월 17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이규광 처리 문제가 얘기됐는데, 이 시기에 법무부와 검찰은 이규광 처리 방안을 놓고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이종원 법무부 장관이 이규광을 두둔하고 있다는 풍문마저 돌았다.

장영자·이철희 사건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날 회의가 고비였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전두환은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이 회의에 참석한 박철언이 회고록에서 얘기한 걸 한번 보자.

박철언 회고록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 전두환은 비서관들을 계속 질책하면서 "'정치적 속죄양'을 만들기 위해 특정인을 구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중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마라. 의연한 자세로 대처하라"며 허화평 수석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통령이 '특정인 구속은 안 된다'고 하면서 처삼촌인 이규광을 구속하는 데 선을 긋고 나오니까, 회의에 참석한 비서관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들끓고 있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이규광 구속은 불가피했는데,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기 위해 나서려 하지 않았다고 박철언은 썼다. 박철언 주장에 의하면 이때는 허화평, 허삼수 수석도 주춤거려서 자기가 나섰다고 한다. "각하,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하니까 전두환이 나중에 가서야 "그래, 구속해"라고 했다고 박철언은 주장했다.

프레시안 : 고양이 목에 용감하게 방울을 단 건 자신이었다는 것인데, 그 부분이 사실일까? 그동안 나온 이런저런 회고록들 가운데 대체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쓴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규광 구속 수사를 주장해 관철한 건 허화평과 허삼수라는 얘기가 있다는 점에서도 의문이 든다.

서중석 : 박철언 이야기 중 그 부분이 사실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박철언 회고록을 보면, 허화평을 상당히 강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몇 군데 나온다. 사이가 나빴던 것 같은데, 이유는 뻔한 것 아닌가. 계통이 다르지 않나. 군 출신인 허화평과 달리 박철언은 검사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태우 쪽 아니었나. 그리고 '투 허'(허화평과 허삼수)가 이철희·장영자 사건 처리 방향을 놓고 전두환과는 다른 태도를 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부분을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사료 비판은 역사 연구에서 기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와 별개로, 박철언이 1980년부터 20여 년 동안 그때그때 또는 그 직후에 일지 형식으로 기록해둔 것을 바탕으로 회고록을 썼다고 밝힌 부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시간, 장소, 당시 상황 같은 것을 상세하게 서술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부분은 그것대로 평가할 만하다.

아무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다음 날인 5월 18일, 이규광이 이철희와 장영자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는 뉴스가 크게 보도됐다. 여기서 이규광이 누구인가, 이 점도 중요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규광이 단순히 장영자의 형부 또는 이순자의 삼촌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는 데 권력의 핵심들은 또 관심이 있을 수 있었다.

민정 이양기와 유신 말기 이규광의 수상한 행적

프레시안 : 이규광은 어떤 사람이었나.

서중석 : 이규광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9년에 이미 육군 헌병감이 된 사람이다. 이때 30대 초반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힘 있는 자리에 오르며 굉장한 출세를 한 것이다. 그 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런 이규광이 1963년 민정 이양기에 구속됐다. 그해 3월 11일 도하(都下) 각 신문이 호외를 뿌렸는데, 중앙정보부에서 군 일부 쿠데타 음모 사건을 적발했다고 돼 있었다. 그런데 그 관련자가 김동하 전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박창암 전 혁명 검찰부장, 박임항 건설부 장관, 이규광 전 육군 헌병감 등 엄청난 사람들이었다.

이 사건에서는 구속된 사람들의 면면도 굉장했지만 시점이 더 중요했다. 뭐냐 하면 1963년 2·18 성명을 통해 박정희는 민정 이양 때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2·27 선서에서 그걸 국민한테 공약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걸 박정희 쪽에서 깨려고 할 때 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구속자 중 김동하는 공화당의 이원 조직과 김종필에 대해 최고회의에서 가장 강력하게 공격하던 자였다. 2·18 성명과 2·27 선서를 주도한 박병권 국방부 장관도 이 사건으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박병권 사임도 주목을 받을 수 있지만, 이 사건 직후인 3월 15일 현역 군인들의 유례없는 데모,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연장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러자 그다음 날 바로 박정희는 3·16 성명을 통해 '군정을 4년 연장하는 문제를 국민 투표에 부치겠다', 이렇게 나오지 않았나. 한마디로 박정희가 국민에게 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파기하고 민정 참여 문제에 대해 번의를 할 때, 그러면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려고 할 때 터진 사건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정치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그해 5월 22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재판이 이어졌다. 그런데 재판을 받을 때 주동자인 이규광이 공소장에 범죄 사실로 적힌 사항을 거의 모두 시인했다. 대개 사실이 아니라고들 하는 게 일반적임을 감안하면 이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6월 5일 박임항은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다. 이규광이 모사를 했는데, 그걸 받아들인 건 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제거하는 줄로 알고 그랬던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다. 당시 알래스카 세력(함경도 출신 군인들)이라고 불린 이쪽 사람들이 '김종필 제거? 그러면 한 번 해보자', 이랬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하도록 일을 꾸민 자가 누구냐, 이 말이다.

(이 사건 피고인 중 한 사람인 정진은 첫 공판이 열린 1963년 5월 22일 법정에서 "이 사건은 정부가 이규광에게 돈을 주어 정치적으로 조작한 것이오"라고 외쳤다. 그 후 공판 과정에서 정진은 사건이 터지기 전 이규광이 수상쩍은 모습을 보였다고 진술했다. 1962년 11월에는 "함경도 놈들을 쳐부숴야겠다"며 '알래스카 토벌'을 얘기하던 이규광이 얼마 후부터는 그와 반대로 거사를 하자며 알래스카 쪽을 접촉해 자신이 이상하게 여겼다는 얘기였다. 정진은 그 속셈을 알아보기 위해 이규광을 몇 차례 만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편집자')

이규광은 유신 말기에 또 주목을 받았다. 사설 정보대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많은 중요 정보를 박정희, 차지철 쪽한테 줘서 김재규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고 기자들이 쓴 글에 나온다. 그런 이규광이었기 때문에도 이철희·장영자 사건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 계기로 '투 허' 잘리고 더 전두환 위주로 재편된 신군부 권력

ⓒ오월의봄
프레시안 :
이규광 구속을 즈음해 권력 집단 내부 기류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82년 5월 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가 전두환 임석 아래 열리고 18일 이규광 구속 뉴스가 나왔는데, 5월 22일에는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 극비 모임이 열렸다. 참석자는 유학성 안기부장, 노태우 내무부 장관, 황영시 육군 참모총장, 차규헌 2군 사령관, 정호용 3군 사령관, 백운택 군단장, 박준병 보안사령관, 안무혁 국세청장, 정도영 보안사 참모장, 그리고 호스트였던 허화평 청와대 정무1수석, 허삼수 사정수석이었다. 그야말로 이너 서클이 모인 것이다. 이 모임을 기획한 건 허화평, 연락을 취한 건 허삼수였다. 이 자리에 한 명이 안 왔다. 장세동 청와대 경호실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갈 것인지를 장세동은 알았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공 권력의 실세 또는 전두환·신군부 이너 서클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사람들은 '친인척 문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통령 친인척은 누구도 공사(公私)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사회봉사의 뜻은 존중할 만하나 친인척이 사기꾼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 장영자 사건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박보균 책에 나온다. 이 자리에서 집약된 의견은 대통령 친인척은 공사 활동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결론은 전두환이 오랜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에 장인 이규동(이규광의 형), 처삼촌 이규광에게 얼마나 약한지를, 그리고 두 이 씨가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박보균 책에 쓰여 있다.

노태우 회고록을 읽어보면 허문도까지 포함한 '쓰리 허', 그리고 군부, 이건 조금 전에 말한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가리킬 텐데, 여기서는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을 맡았던 이규광 등 이 사건과 관련 있는 친인척을 예외 없이 엄벌에 처하고 차제에 모든 친인척을 공직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시기에 이규동은 대한노인회장, 전두환의 동서인 김상구는 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차장, 동생 전경환은 새마을운동본부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허화평이 아주 강력하게 이른바 개혁 정신을 내세우면서 이런 분위기로 몰고 가는 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두환은 허화평에 대해 마음이 아주 안 좋은 상태였다.

프레시안 : 이너 서클 구성원 중에서 허화평·허삼수는 1979년 12·12쿠데타 당시 계급도 그리 높지 않고 육사 기수로도 후배 그룹에 속했지만 그 후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하지 않았나. 그 위세가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허화평은 전두환·신군부 권력의 연출자, 자신은 키 플레이어라고 얘기했다고 하는데, 설계사라고도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12·12쿠데타 이전부터 이때까지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태우 회고록에도 장관들이 전두환 대통령한테 보고하고 나서 '투 허'를 찾아갔다고 돼 있다. 안 찾아가면 뭔가 찜찜해서, 가서 또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할 만큼 '투 허'는 실세였다.

그런데 전두환은 1982년 5월 20일 민정당 사무총장을 권정달에서 권익현으로 바꾸고, 바로 이어서 6월 2일에는 안기부장을 유학성에서 노신영으로 바꿨다. (유학성은 "영부인(이순자)도 자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물러났다고 한다. '편집자') 내각도 대폭 개편했다. 유학성 안기부장 경질은 '투 허' 수석을 자르기 위한 예비 조치였다고 보고 있다. '투 허'가 대단하긴 했던가 보다. 안기부장이 참 센 자리인데 그보다 더 센 사람으로 얘기될 정도였으니까. 그러면서 12월에 가서 '투 허'를 자르게 된다.

'투 허'가 잘려 나간 것은 권력 내부에 큰 영향을 줬다. 전두환 밑에서 정권의 실세로 알려져 있던 '투 허'가 잘렸다는 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노신영 외무부 장관이 안기부장으로 기용됐다는 것도 관심을 끌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래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이 중앙정보부장 또는 안기부장에 임명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 전두환을 철저히 추종하는 장세동 경호실장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은 전두환 권력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전에도 전두환이 중심이긴 했지만, 이제는 더욱더 전두환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됐다는 말이다. 5공 창업 주주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겠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박보균 기자는 썼다. 5공 창업 주주라는 건 내가 얘기한 이너 서클을 가리킨다.

금융 실명제 무산 후 이번에는 전두환 장인 거론된 명성 사건 발생

프레시안 : 이철희·장영자 사건 이후에도 금융 관련 문제가 계속 터지지 않았나.

서중석 : 장영자 사건으로 떠들썩할 무렵인 1982년 7월 3일 금융 실명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틀 후 전두환은 금융 실명제를 성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새로 민정당 사무총장이 된 권익현이 7월 15일 정부의 실명제 방안은 충분한 검토와 보완이 필요하다며 제동을 걸었다. 줄다리기를 거쳐 결국 10월 29일 정부와 민정당 간의 당정 협의회에서 금융 실명제를 유보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권익현 등이 반대한 이유는 '그렇게 되면 정치 자금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고 얘기한다.

(금융 실명제를 추진한 쪽은 청와대 경제수석 김재익과 재무부 장관 강경식이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은 금융 실명제 추진에 힘을 실어줬다. 이에 대해 권익현뿐만 아니라 노태우도, '투 허'도 반대했다. '투 허' 등이 친인척 문제를 매개로 전두환을 압박한 것이, 12·12쿠데타 후 이들의 행태 전반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제대로 된 개혁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덧붙이면, 강경식은 1997년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 직전까지 경제 부총리를 맡은 바로 그 사람이다. '편집자')

1982년이 장영자 사건으로 떠들썩한 해였다면 1983년에는 김철호 사건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1983년 8월 1일 여러 신문에 명성콘도를 대상으로 한 세무 조사를 비난하는 광고를 김철호 명성 그룹 회장이 크게 냈다. 그러자 안무혁 국세청장이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티끌 하나 남김없이 밝히겠다"고 대응했다. 박보균 기자 책에 의하면 그날 전두환이 직접,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 "국세청장이 왜 함부로 나서느냐"고 질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김철호 명성콘도 사건에 크게 관심을 가진 건 어떻게 국세청에 도전하는 광고, 세무 조사에 분명히 강하게 항의하는 문안의 광고를 낼 수 있느냐, 그건 뭔가 또 배후에 있기 때문 아니냐, 이것 때문이었다. 그건 어떻게 명성콘도가 불과 3~4년 만에 레저 산업의 재벌로 커졌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어디서 돈을 댔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인가, 굉장한 배후가 있는 것 아니냐, 이런 것이었는데 그 배후 중 하나로 전두환 장인 이규동이 거론됐다.

이규동이 김철호 회장을 밀어준다는 소문이 퍼진 계기는 1981년 12월 대한노인회 주최 서예전에 김철호가 자기 작품을 전시하고 부인과 함께 참석한 것이었다. 이때 대한노인회 회장이 이규동이었는데, 서예전이 끝난 후 김철호가 1억 원을 선뜻 '대한노인회 기금으로 써라', 이렇게 내놓은 것이다.

1983년 8월 6일 국세청 정예 요원들이 동숭동의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 김동겸 대리 집을 급습해 비밀 장부를 찾아내면서 명성콘도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김철호와 김동겸 대리가 짜고 1000여 명의 전주들을 상대로 은행 이자보다 더 주고 수기 통장을 발행해주는 식으로 사채 자금을 은행 예금 형식으로 조달했다는 것이다. 장영자가 어음 사기를 한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처리를 한 것이다.

8월 17일 국세청은 명성 그룹이 112억 원의 세금을 포탈한 것을 적발했다며 김철호 부부를 특정 경제 가중 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넘겼다. 정부는 김철호가 1979년 4월부터 김동겸을 통해 은행 예금을 부정하게 빼내어 기업 확장에 사용해 21개의 기업을 거느린 명성 그룹 회장이 됐으며, 김철호는 원리금도 상환하지 않은 채 1066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횡령했고 46억 원이나 탈세했다고 발표했다.

1984년 8월 14일 대법원에서 김철호는 징역 15년에 벌금 79억 3000만 원, 김동겸은 징역 12년에 추징금 100만 원이 확정됐다. 공군 참모총장 출신인 윤자중 전 교통부 장관도 골프장 허가와 관련해 거액을 받은 게 드러나서 구속됐는데, 대법원에서 징역 5년에 추징금 8100여만 원이 확정됐다.

명성 사건 직후인 1983년 10월에는 영동개발진흥 사건이라는 것도 터졌다. 영동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이건 뭐냐 하면 조흥은행 중앙 지점 직원들과 영동개발진흥이 짜고 어음 부정 보증을 하는 수법으로 1019억 원을 빼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영동개발진흥 회장 이복례 모자와 조흥은행장 이헌승 등 29명이 구속됐다.


▲ 총칼로 권력을 훔치고 천문학적인 검은돈 문제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가 함께 법정에 선 모습을 담은 경향신문 1996년 3월 12일 자 1면. ⓒ경향신문


군부 독재가 그래도 덜 썩었다? 천문학적 검은돈으로 얼룩진 군부 독재와 그 후예

프레시안 :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한 푼 두 푼 모아온 대다수 국민들은 이철희·장영자 사건 등을 접하며 극심한 분노와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서중석 : 1982년, 1983년에 일어난 이러한 사건들은 전두환 정권이 표방한 구호, 그리고 민주정의당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사람들한테 받아들여졌다. 그것과 관련해 더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군부 독재 정권이 민간 정부보다 부정부패는 좀 적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엄청난 비자금 문제가 박정희 유신 정권 때부터 있었다. 물론 유신 쿠데타 이전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지만, 유신 체제에서 그런 문제가 훨씬 심했다. 또 전두환, 노태우가 대통령일 때 거둬들였다가 나중에 드러나게 되는 비자금 문제도 있지 않았나.

그러한 어마어마한 비자금 문제는 군부 독재 시절에 생겼다. 이승만 정권 때에도 그런 건 없었다. 김영삼 정권 때부터도 마찬가지다. 정치 자금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물론 아니지만, 그런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자금 문제는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느냐. 민간 정부는 투명성을 갖출 것을 요구받을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 투명성을 갖출 수밖에 없는 정부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가 어렵게 돼 있다, 이 말이다. 그와 달리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강권 정권, 군부 독재 정권은 재벌들한테 손을 내밀고 갹출하기가 훨씬 쉬웠다.

그래서 전두환만 하더라도 직접 받은 정치 자금, 비자금에다가 새마을 성금, 일해재단 기금, 새세대심장재단 기금 등의 명목으로 받아낸 걸 합치면 최소 1조 원은 되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비리가 심해도 너무 심했기 때문에 전두환 퇴임 후 형제, 자식, 처남 등이 줄줄이 구속되지 않았나. 그리고 전두환 자신은 백담사로 가야 했다. 전두환과 가까운 노태우가 집권했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았나. 그러한 것들도 전두환 일가가 얼마나 부패했느냐 하는 걸 분명하게 얘기해주고 있다.

노태우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금융 실명제 얘기를 했는데, 바로 그 실명제 때문에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1995년 노태우가 구속되지 않았나. 그러면서 12·12쿠데타, 5·17쿠데타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게 된다. 1997년 대법원에서 전두환은 무기 징역에 2205억 원 추징금을 받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받는데, 노태우가 받은 추징금 2628억 원도 너무나 적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1960년대, 1970년대에 부정부패 얘기가 그렇게 많이 거론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군사 정권은 투명하지 않은 정권이었다. 검은돈, 부정한 정치 자금으로 자신들의 군부 독재를 보위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인터뷰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터졌다. 그간 뼛속까지 유신 독재에 대한 향수로 물든 듯한 모습을 계속 보인 박근혜 정권은 이 게이트를 통해 추악한 본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국민을 경악케 한 추악함이 끝 간 데 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분명한 것 중 하나는 검은돈을 긁어모은 수법이 군부 독재자들의 그것을 똑 닮았다는 것이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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