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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나세르, 100년 간의 '아랍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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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나세르, 100년 간의 '아랍夢'

[유라시아 견문] 아라비아의 나세르

1. <나세르 56>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첫인상을 좌우한다. 상징적인 이름을 딴 곳이 많다. 인도에 입성했던 콜카타는 찬드라 보스 공항이었다. 이란의 테헤란에는 이맘 호메이니 공항이 있다. 터키의 이스탄불 공항에도 아타튀르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집트의 카이로 공항에는 별다른 명칭이 없었다. 의아한 마음이 일었다. 20세기 세계에 명성을 떨친 아랍인으로는 나세르가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비단 공항만이 아니었다. 카이로 시내를 걸어도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나 대로를 찾기 힘들었다. 베트남의 호치민 영묘, 파키스탄의 부토 영묘와 같은 기념비적 장소도 없었다. 지하철 역 가운데 '나세르 역'이 있기는 했지만, 카이로의 중심지인 타흐리르 광장의 역 이름은 그의 후임자였던 '사다트 역'이었다. 1970년 서거 이래 그를 기리기보다는 지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30년 독재자 무바라크에 도전하는 청년들이 나세르의 사진을 들고 나왔다. 10대 청소년기에 영화 <나세르 56>을 보고 자랐던 이들이다. 1996년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 40주년을 기념해 특별 제작된 영화였다. 그 시대를 통과해온 노년층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고, 그 시대를 모르는 어린 친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 작품이다. 오스만제국에서 아랍세계를 분리시켰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아니라, 아랍세계의 대일통을 추구했던 '아라비아의 나세르'가 환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랍의 봄' 이후 혼란을 수습한다며 2013년에 일어난 쿠데타 세력 또한 자신들의 행동을 1952년 나세르의 군사혁명에 빗대었다. 현직 대통령 시시는 거듭 자신을 나세르와 포갠다. 지지자들은 시시가 나세르와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며, 비판자들은 감히 나세르를 운운하냐며 성토하고 있다. 어느새 나세르가 공론장의 중심으로 부활한 것이다. 나세르 박물관이 들어선 것도 2015년이다. 올해는 20세기 중반 세계를 뒤흔들었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 60주년이기도 하다. 나세르의 삶을 복기해보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 시시와 나세르(카이로)ⓒ이병한
▲나세르 박물관(카이로)ⓒ이병한

2. 신세대

1919년 동유라시아의 조선에서는 3.1운동이,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난다. 서유라시아의 이집트에서도 3월을 기점으로 '1919년 혁명'이 일어났다. 거국적인 반영(反英)운동이었다. 영국이 이집트를 군사 점령한 것은 1882년이다. 수에즈운하를 보유한 이집트는 최대 식민지 인도와 연결되는 대영제국의 핵심적인 연결고리였다. 양질의 면화 생산도 활발하여 식민지 중에서도 위상이 높았다. '1919년 혁명'을 받아 안아 1922년 '독립국가'가 선포된다. 그런데 이집트가 아니라 영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영국 군대 역시 그대로 주둔했다. 재차 '독립국가'라는 말이 고약하다. 실상은 오스만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집트를 '이슬람의 집'에서 '독립'시켜줌으로써 대영제국의 보호국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스탄불을 대신하여 카이로의 국왕을 술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를 재등극시켰던 괴뢰국가 만주국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다만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전환되었다.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운동도 본격화되었다. 이집트 현대사에서는 '1919년 혁명' 전후로 태어난 이들을 '신세대'로 명명한다. 이집트판 신청년쯤 되겠다. 나세르가 그 대표주자이다. 1918년 1월, 이집트의 제2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리아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1798)이래 유럽과 긴밀했다. 남지중해의 개항장이었다. 영국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유대인들도 다수 거주하는 국제상업무역도시였다. 유럽과 아랍을 잇는 연결망의 허브였던 것이다. 그만큼 유럽-아랍의 제국주의적 모순을 응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세르는 조숙했다. 반영시위에 처음 참가한 것이 12살 때란다. 왕성한 독서가이기도 했다. 사색하는 행동가, 혁명가로 성장한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1930년대 이집트의 사상 사조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으뜸은 改新(개신) 이슬람이었다. 1928년 설립된 무슬림 동포단이 가장 큰 지지를 받았다. 민중/기층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었기에 조직력과 영향력에서 발군이었다. 다만 근대적인 정치조직, 정당은 아니었다. 서구의 침투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이슬람 사회의 갱신과 회복을 도모하는 NGO였다. 다음으로는 '청년 이집트'가 있다. 세속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다. 세력으로서는 미미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소수 인텔리겐차의 써클에 가까웠다. 그들이 대변하겠다는 노동자/농민의 다수는 무슬림 동포단을 지지했다.


나세르는 3대 사상만으로는 이집트의 완전 독립이 불가하다고 여겼다. 무력이 필수였다. 무장투쟁이 필요했다. 1937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약육강식의 전국시대, 이집트 혁명의 첩경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비단 나세르만이 아니었다. 영국 제국주의와 그에 기생하는 친영파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군사혁명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청년장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훗날 '자유 장교단'으로 집결한 것이다.


기폭제는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이다. 유럽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인 유대인 차별과 박해를 아랍으로 배출하고 이식해버렸다. 1948년 5월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탄생한다. 팔레스타인인이 살고 있던 땅을 분할하고 강탈한 것이다. 이에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주변 아랍 국가들이 연합군을 파병한다. 결과는 이스라엘군의 승리였다. 일국이 7개국 연합군을 이겼다. UN의 분할안보다 더 넓은 영토를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된다.


나세르는 바로 그 팔레스타인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다. 이집트 군부의 부패를 현장에서 실감했다. 불량무기를 구입해서 사복을 취하는 지배층들의 실태를 목도했다. 이집트의 국군이라기보다는, 영국의 주구였던 것이다. 외부세력의 축출만큼이나 내부자들의 척결이 절실했다. 극비리에 자유 장교단을 결성한 것이 전쟁 패배 이듬해인 1949년이었던 까닭이다. 3년의 준비 끝에 쿠데타를 감행한 것은 1952년이다. 1953년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한다. 추방된 국왕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1954년에는 영국군도 철수시킨다. 내부자들(왕당파)과 외부세력(영국 제국주의)의 적폐를 일소한 것이다. 영국군의 완전 철수를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열린 것도 알렉산드리아의 만쉐아 광장이었다.


▲ 만쉐아 광장(알렉산드리아)ⓒ이병한

나세르가 연설자로 등장하는 순간, 8발의 총성이 울렸다. 극도의 긴장과 적막이 흘렀다. 단 하나의 총탄도 그의 몸을 관통하지는 못했다. 그는 피신하지 않기로 했다. 혼비백산은커녕, 군복을 추스르고 즉석연설을 시작한다.

"만약 내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이 또 다른 나세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집트의 영광을 수호하고, 존엄을 수호해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피는 여러분의 것이며, 나의 혼 또한 여러분의 것입니다."

향후 15년간 이집트를 넘어 아랍세계를 진두지휘하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카이로로 돌아가는 기차역마다 나세르를 연호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용감무쌍한 신세대 지도자의 등장은 아랍어 공론장을 통하여 인도양 너머 인도네시아까지 전파된다. 1955년 반둥회의에 참석한 아시아-아프리카 지도자 가운데 가장 어렸던 나세르는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제3세계의 슈퍼 아이돌이었다.


▲ 나세르-체게바라(1959)ⓒwikipedia

3. 아랍의 소리 : 홍해부터 인도양까지

독립 이후에는 자력갱생해야 했다. 숙원사업이었던 아스완 댐 건설을 추진한다. 산업화를 위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1956년 미국과 영국, 세계은행이 융자를 철회한다. 이집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융자를 지속받기 위해서는 공산진영으로부터 원조를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나세르는 격분했다. 중립외교를 허용하지 않는 내정 간섭이었다. 타협은커녕 강공책을 선택한다.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함으로써 부족한 자금을 충당키로 한 것이다. 제국주의의 종언을, 이집트의 주권 회복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운하의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도 프랑스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합작하여 운하의 무력 탈환에 나선다. 나세르를 제거하는 '체제 전환'마저 노렸다.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를 넘어 이집트로 진격했다. 영국의 식민지 키프로스와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양국의 전투기가 출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이탈리아-일본에 맞서 싸워 자유와 민주를 수호했다는 연합군의 민낯이 까발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야말로 골수 제국주의의 원조였다. <가디언>에서도, <르몽드>에서도 나세르를 히틀러에 빗대는 '교조적 민주주의' 프로파간다가 울려 퍼졌다. 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야욕에 차마 미국마저 옹호할 수가 없었다. 자칫 아랍세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급히 제동을 건다. 마셜플랜으로 유럽의 돈줄을 쥐고 있던 미국의 압력에 영국도, 프랑스도, 이스라엘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총리는 사임해야 했고, 베트남에서 굴욕적인 패배(1954)를 당했던 프랑스는 또 한 번의 치욕을 맛보았다. 바야흐로 탈식민주의가 대세였다.


나세르는 단박에 세계적인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일천년 전, 십자군을 물리쳤던 살라딘에 견주는 아랍인들까지 생겨났다. 이집트 또한 아랍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했다. 지리적으로도 한 복판에 자리한다.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를 잇는 중간지대이다. 인구 역시 가장 많았다. 1956년 통계로 아랍인의 35%를 차지했다. 군사력에서도 선두였다. 이집트 일국의 군사비가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을 합한 것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프란츠 파농이 맹활약했던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와 맞서 싸울 때, 유일하게 군사적으로 지원했던 나라 역시 이집트였다.

하드파워에서만 돋보였던 것이 아니다. 소프트파워는 더욱 독보적이었다. 유럽 문명의 수용이 일렀기 때문이다. 1956년 당시 카이로에는 19개의 일간지와 26개의 주간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아랍어를 공유하기에 카이로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들은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 모로코부터, 아라비아반도의 동쪽 끝 오만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다. 영화 산업의 중심지 또한 카이로였다. 1950~60년대 아랍세계의 극장에서 이집트 영화는 할리우드와 경쟁했다. 뮤지컬과 오페라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이었다. 이집트의 성악가들이 아라비아의 슈퍼스타로 군림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하여 바그다도로, 다마스쿠스로, 카사블랑카로, 암만으로 널리 울려 퍼졌다. 카이로는 도시문화와 현대예술의 메카, 아랍세계의 뉴욕이었다.


나세르는 그 라디오라는 뉴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1953년 7월 '아랍의 소리'(صوت العرب‎‎, 사와트 알 아랍)를 출범시킨다. 유럽의 소리, 미국의 소리, 소련의 소리가 아니라, 아랍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발신했다. 1953년 30분 시험방송으로 출발한 '아랍의 소리'는 1960년부터 24시간 방송으로 성장한다. 1960년대 이집트는 미국, 소련, 중국, 서독, 영국으로 다음 가는 세계 6대 방송대국이었다. 이 라디오 방송을 십분 활용하여 서방의 제국주의와 그에 기생하는 아랍의 주구들에 맞서 선전선동을 펼쳐 나간 것이다. 음악과 드라마 방송 사이에 나세르가 등장해서 펼치는 연설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단어는 '존엄'이었다. 아랍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환기시키며 아랍인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홍해와 지중해, 아라비아해를 하나의 공론장으로 삼는 '아랍의 소리'의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남태평양의 수백 개 섬들을 인도네시아라는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로 묶어낼 수 있었던 것도 미디어의 힘이라고 했다. 카이로발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매일 같이 나세르의 목소리를 듣는 아랍세계에서도 '상상의 공동체'가 만들어져갔다. 나세르는 즐겨 "알 움마 알 아라비야 민 알 무히트 알 아틀라시 일라 알 클리즈 알 아라비"라고 외쳤다. "대서양부터 아라비아해까지 아랍민족은 하나다"라는 뜻이다. 이 상상의 공동체가 끝내 현실태로 등장한 것이 1958년이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한 아랍연합공화국이 출범한다. 나세르는 더 이상 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아랍세계의 천자로 등극하는 듯 보였다.

4. 아랍연합공화국 : 대서양부터 아라비아해까지

1958년 2월 1일, 아랍연합공화국이 등장한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유럽의 제국주의로 토막토막 났던 아랍 국가들의 大一統(대일통)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아랍어 언론들은 십자군 전쟁(=유럽의 아랍 침략)의 승리 이래 아랍의 천 년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집트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이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서도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흥겨운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프랑스와 싸우고 있었던 알제리에도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분기탱천한 파농은 시대의 물결을 직시하라며, 프랑스의 회심과 회개를 요청하는 글을 <르몽드>에 투고한다. 이에 화답한 지식인이 사르트르였다. 제3세계의 투쟁을 옹호했다. 아랍연합공화국의 탄생에 아랍과 유럽의 공론장이 공진화한 것이다. 이에 동방 고전만큼이나 <르몽드>를 챙겨 읽었던 북베트남의 호치민까지도 고무되었다. 남북베트남 통일도 머지않은 듯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 역시 아랍연합공화국의 출범에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표했다. 이집트는 99.8%, 시리아에서는 99.2%가 가결했다. 고무된 나세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마스쿠스를 방문한다. 나세르를 난생 처음 보는 시리아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이라크의 변호사도, 요르단의 학생도, 바레인의 시인도, 시리아의 의사도, 모로코의 사업가도, 이집트의 농부도 아랍연합공화국의 탄생에 기뻐해마지 않았다.

▲ 다마스쿠스에서의 나세르ⓒwikipedia

본디 시리아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가 작당해서 주조해낸 인공국가였다. 애당초 이름이 없던 바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 시리아'는 작금의 국경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졌다.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아울러 '대(大)시리아'라고도 할 수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었던 곳이다. 그 작위적인 국경 설정만큼이나 내부 구성원 또한 다양했다. 원체 복합적인 오스만적 환경을 수백 년간 향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리아를 '국민'으로 결집시킬 구심력은 처음부터 턱없이 미약했다. '이슬람의 집'이라는 커다란 지붕을 허물고 국민국가라는 작은 집으로 우겨 넣었기에 안정적인 국가 운영이 힘들었던 것이다. 더 넉넉한 집을 구하던가(아랍세계의 대통합) 작은 집을 윽박다짐으로 유지하는 수(군사독재) 밖에 없었다.


아랍연합공화국의 파장은 곧바로 이웃한 이라크까지 미쳤다. 이라크 역시도 시리아만큼이나 작위적인 인공국가였다. 그 작위성을 외부세력(영국과 미국)에 기생하며 간신히 지탱했던 바, 아랍민족주의에 공감하는 청년장교들이 1952년의 나세르 혁명을 모방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라크 역시도 왕정을 전복시키고 혁명정권을 출범시킨 것이 1958년이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신군부는 곧장 나세르를 만나러 다마스쿠스로 향한다. 이라크의 혁명가들이 시리아에 왔다는 소식에 다마스쿠스는 다시 한 번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라크도 아랍연합공화국에 편입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랍세계 전체가 또 한 번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는 하나였다. '오스만투르크'(오스만제국을 투르크만의 제국으로 폄하하는 20세기의 용법)와 서구 제국주의 5백년의 역사를 청산하고 아랍의 귀환을 완성하는 날이 목전에 도래한 듯했다. 이집트-시리아-이라크는 '아랍세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속 아랍세계'라고도 한다. 파문은 곧 '겉 아랍세계'까지 미쳤다. 알제리가 끝내 프랑스를 물리치고 혁명정권을 수립한 것이 1962년이다. 레바논, 요르단, 예멘 등 소국들에서도 나세르주의자가 대약진했다. 나세르주의자와 왕정파들 간 내전이 잇따랐다.


그러나 복병은 다시금 이스라엘이었다. 나세르를 천자로 삼는 아랍세계의 대통합에 가장 큰 위협을 느끼는 국가가 이스라엘이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한다. 흔히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불과 6일 만에 이스라엘군이 아랍군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이집트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병력의 80%를 잃었다.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는 물론이요, 성지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서안지구까지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망연자실한 국민 앞에서 나세르는 사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이 재신임을 표명하여 사임은 철회되었으나, 아랍세계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로서의 위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세계는 여전히 아랍민족주의의 이상보다는 군사력이 압도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후반전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가공할 무력 앞에서 아랍몽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6일 전쟁의 충격으로 나세르는 건강마저 악화되었다. 심장발작으로 급사한 것이 1970년이다. 52세의 젊은 나이였다. 카이로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백만의 아랍인들이 참배했다. 미증유의 열광을 자아냈던 20세기의 최고 지도자에게 이른 안녕을 고한 것이다. 그의 사후 아랍 민족주의 열기 또한 시나브로 잠잠해졌다. 당장 후계자 사다트부터가 노선을 전면 수정한다. 미국과 타협하고, 이스라엘과 단독으로 평화협상을 한다. 역설적으로 아랍세계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인정한 나라가 이집트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충격과 배신감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한때나마 이집트의 아랍연맹 자격마저 박탈되었다. 그 시절을 이끌었던 독재자가 바로 무바라크였다. 그렇다면 2011년 이래 '아랍의 봄' 또한 독재에서 민주로-라는 흔해빠진 일국적 서사가 아니라, '아랍의 귀환'이라는 지역적이고 문명사적인 층위에서 접근하는 편이 한층 온당할 것이다.

5. 아랍의 냉전

유라시아 전도를 펼쳐놓고 1950~60년대 이집트와 아랍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의 동편에서 중화민국을 상실하고(China Lost)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한 것은 미국의 세계정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중국혁명에 힘입어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프랑스에 맞서 봉기했고, 북조선의 김일성은 38선 이남으로 진격했다. 한국전쟁을 겨우 수습한 1953년, 미국은 유라시아의 서편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랍세계를 주시하기(Pivot to Arab) 시작한다. 동아시아에서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곤란했다. 첫 손으로 꼽은 나라가 바로 이집트였다. 아랍세계에서 가장 큰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댈러스가 카이로를 방문한 것이 그 해 5월이다. 소련을 봉쇄하는 군사동맹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지중해 건너 NATO와, 아라비아해 너머 SEATO와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나세르는 수긍하지 않았다. 소련은 50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나라라며 전혀 위협이 아니라고 했다. 도리어 훈수를 두었다. 소국이 대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면, 소국은 대국의 명령을 수행하는 속국에 그친다고 했다. 아랍의 안보는 아랍 자체에 맡기라고 훈계했다. 댈러스는 결국 빈손으로 카이로를 떠난다.


그러나 아랍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를 대신하여 이라크를 선택했다. 그래서 체결된 것이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이다. 이라크와 터키, 파키스탄, 이란을 결합시켜서 미국이 지휘하고 영국이 지원하는 군사안보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1958년 이라크에서 혁명정부가 수립되면서 바그다드 조약에서 이탈한다. 결국 터키, 이란, 파키스탄만 묶어내서 출범한 것이 CENTO였다. 아랍세계에서는 단 한 나라도 참가하지 않는 비아랍 조직이었다. 그만큼 아랍에서는 아랍민족주의가 드세었던 것이다.


하더라도 도저히 아랍세계를 방기할 수는 없었다. 석유라는 핵심 자원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집단안보기구 대신에 개별 격파에 나선다. 이때 간택된 나라가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아랍세계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왕정국가를 나세르가 주도하는 아랍민족주의의 대타항으로 마주세운 것이다. 사우디의 국왕이 워싱턴을 방문한 것이 1957년이다. 미국의 중동 개입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아이젠하워 독트린이 발표된 것도 바로 그 해이다. '아랍의 냉전'이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반(反)나세르 왕정국가들을 규합하는 '재균형' 정책이었다.

따라서 '아랍의 냉전' 또한 미국과 소련의 동서이념대결을 복제한 것이 아니었다. 왕정 대 공화정, 보수파 대 진보파의 길항으로 이해하는 것도 일면적이다. 심층적이고 장기적인 갈등의 축은 아랍세계의 재통합을 꾀하는 세력과 아랍세계의 분열/분할을 지속하려는 세력 간의 길항이었다. 재아랍화와 탈아랍화의 경합이야말로 서아시아 대분열체제의 핵심 모순이었다.


이 재아랍화와 탈아랍화의 길항이 압축되었던 장소가 바로 예멘이다.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뒷마당, 아라비아 반도의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한다. 여기서마저 아랍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혁명파들이 왕정을 전복시킨 것이다. 공화정 수립 직후 이들 역시 나세르에게 타전을 보낸다. 아랍 민족주의에 헌신하겠다는 전갈이었다. 사우디(와 미국)는 좌시하지 않았다. 왕정 세력의 복귀를 위하여 총력으로 지원한다. 결국 예멘 또한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내전이면서도 이집트와 사우디의 대리전이었고, 아랍세계의 국제전이기도 했다. 1961년 100명의 이집트 군을 파병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수렁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5년에는 무려 7만 명으로 늘어난다. 이집트의 재정을 갉아먹고 국력을 소진시키는 늪이 되었다. 1967년 이스라엘에 6일 만에 무참하게 패한 것 또한 예멘 파병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예멘은 '이집트의 베트남'이 되었던 것이다.

나세르의 운명과 함께 흥망성쇠 했던 아랍 민족주의는 비단 20세기의 유산으로 그치지 않는다. 목하 IS가 표방하고 있는 것 역시도 아랍의 (재)통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백년 유럽식/외래산 민족주의(알 와타니야)를 거두고, 아랍 민족주의(القومية 알 카미야‎)를 복원하자고 선동한다. 아랍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여태 '대장정'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나세르 개인을 넘어서 사상사적 지평에서 아랍 민족주의를 복기해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다음 주에 이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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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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