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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수난' 끝에 '제2의 두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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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수난' 끝에 '제2의 두바이'?

[유라시아 견문] 쿠르디스탄 : 천 개의 고원

100년의 주박

'아랍의 봄'은 이미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독재에서 민주로, 라는 얕은 이론이 통용되지 않는다. 기성의 인공 국가 자체가 녹아내리고 있다. 중앙 권력이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지난 100년 아랍에 이식되었던 유럽의 국가 간 체제, 더 정확하게 말해 '독재 국가 간 체제'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경선을 돌파하여 '시라크'를 창출한 IS가 대표적이다. '이슬람국가'라는 국명이 상징하듯 '이슬람의 집'의 복원을 표방한다. 20세기의 신부족주의(민족주의) 시대를 거두고 탈민족주의, 신 칼리프 시대를 개창하자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독재 국가 간 체제'를 뒤흔드는 힘도 있다. 암중모색하던 쿠르드의 약진이다. 흔히 국가를 가지지 못한 세계 최대의 민족으로 일컬어진다. 터키에 2000만, 이란에 1500만, 이라크에 850만, 시리아에 280만이 '소수 민족'으로 살아간다. 유럽으로 이주한 난민도 많다. 얼추 5000만에 이르는 이들이 제 나라를 갖지 못한 채 분단되고 분할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00년 만에 찾아온 아랍 세계의 질서재편을 호기로 삼고 있다. 국민 국가 건설이라는 못다 이룬 숙원을 이참에 쟁취하고자 한다.

기폭제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침공에 쿠르드는 내부에서 호응했다. 내외 합작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것이다. 독재 정권 타도의 공로를 인정받아 '민주주의' 신체제 수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연방제를 관철시킴으로써 너덜너덜해진 중앙 권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라크 북부에 쿠르드 자치 정부가 출범한 것이 2006년이다. 내치는 물론, 군사와 외교까지 고도의 자율성을 확보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2016년에는 이웃한 시리아 북부에서도 쿠르드 자치 정부가 선포된다. 그쪽에서도 시리아 내전을 발판 삼아 쿠르드 분리 독립의 기운을 지핀 것이다. 양쪽이 연합하여 IS와는 또 다른 '시라크', 쿠르디스탄을 창출할지도 모르겠다.

쿠르디스탄의 꿈이 좌초된 사정은 100년 전으로 거스른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코스-피코 협정을 밀약한다. 포스트-오스만의 공간을 양국이 쪼개어 갖는 중동 분할책이었다. 동아시아에 미일 간 가쓰라-태프트 조약이 있었다면, 서아시아에는 영불 간 사이코스-피코 협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금세 탄로가 나고 만다. 오스만의 분할 지배에 수긍했던 러시아에서 이듬해(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 정부가 구체제, 즉 러시아 제국이 영국과 프랑스와 담합했던 비밀 문건을 폭로해버렸다. 일종의 '위키리크스' 역할을 한 것이다.

밀약 당시만 해도 쿠르드도 민족 국가로 분리 독립시킨다는 구상이었다. 오스만의 영토를 현재의 중동보다도 더 잘게 나누려고 했다. 이를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던 인물이 바로 케말 파샤이다. 국토 회복을 표방한 독립 전쟁을 선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아나톨리아의 거개를 터키공화국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 수복되지 못한 곳이 현재의 시리아 북부이다. 쿠르디스탄으로 예정되었던 아나톨리아 남부가 터키공화국과 프랑스령 시리아, 영국령 이라크로 삼분되었던 것이다. 2016년 현재 '쿠르드의 시라크'가 창출된 바로 그곳이다. 포스트-오스만, 백년의 주박이 풀려나고 있다.

쿠르디스탄 : '천개의 고원'

1919년 파리 강화 회담이 열린 베르사유 궁전에 쿠르드인 대표도 참석했다. 베트남의 호치민처럼 생전 처음 양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제출한 지도 한 장이다. 쿠르디스탄의 영토를 제시한 國圖(국도)였다. 범위가 제법 넓다. 이란의 서남부 고원부터 페르시아 만까지 이른다.

북쪽으로는 현재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을 포함하고, 서쪽으로는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에 자리한 연안 도시 알렉산드레타까지 미친다. 내륙에 갇히지 않고 지중해와 페르시아 만을 연결하는 국경 설정을 원했던 것이다. 최대 광역대의 '대(大)쿠르디스탄' 구상을 제출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국도의 기원이 간단치 않다. '이슬람의 집'을 구현했던 오스만제국에서 쿠르디스탄이라는 영토 국가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아테네보다도 이스탄불에 사는 그리스인이 더 많았던 시절이다. 예레반에도 아르메니아인보다 쿠르드인이 더 많이 살았던 세월이다. 쿠르디스탄 국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역시나 19세기 말이다.

작성자 또한 대영제국의 장교였다. 오스만제국을 분할하기 위한 기획 중의 하나로 입안되었던 것이다. 그리스 민족주의, 터키 민족주의, 아르메니안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 등 민족주의의 연쇄 파장 속에서 후발주자로 등장한 쿠르드 민족주의자가 제출한 국도 역시 그 영국인 장교가 그렸던 쿠르디스탄 판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3년 로잔(Lausanne) 조약으로 쿠르디스탄의 수립은 불발된다. 이제 쿠르드 지식인들은 '정신의 국가'를 세워야했다. 정신의 국도, 國史(국사)를 집필한다. 나와 남을 가르고,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를 서술했다.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제국에서의 억압과 탄압을 전면적으로 적나라하게 기술했다. 민족 국가로의 분리 독립이라는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목적론적 역사 서사였다.

그러나 실상은 딱히 그러하지 않았다. 오스만의 최후까지도 제국에 가장 충성했던 이들이 쿠르드인이었다. 그만큼 민족 의식이 희박하고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오스만인'으로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오스만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에도 적극 호응했다. 오스만어를 가장 열심히 익힌 이들도 쿠르드였다. 이슬람의 근대화에 열성으로 정성으로 임했던 것이다. 서구화로 치닫는 터키공화국 아래서 이슬람의 중흥을 도모하며 <빛의 책>을 저술한 사이드 누르시가 바로 쿠르드인이었다.

부작용도 있었다. 러시아의 막후 지원으로 분리 독립을 꾀하는 아르메니아인의 대학살에 가담한 이들도 쿠르드였다. 오스만제국의 하수인으로 손에 피를 묻힌 것이다. '이슬람의 집'에 충성하는 쿠르드의 입장에서 아나톨리아의 일부를 떼어내어 아르메니아인만 살아가는 국가를 만든다며 벽을 치고 담을 쌓는 것이 가당치 않았던 것이다. 그곳은 대대손손 쿠르드인과 그리스인, 투르크인, 아랍인, 유대인들이 함께 살아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일부의 영토를 떼어내어 쿠르드만의 국가로 삼는 것 또한 차마 추구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국민 국가란 이슬람적 공정(公)에 위배되는 사사로운 집단(私)이었다. '이슬람의 집'의 원리에 가장 충실했기에, '전쟁의 집'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후발 국가로 진력했지만, 끝내 무산되었다. 쿠르드는 결국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으로 사분오열된다. 1000년의 세계 시민이 소수 민족과 난민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쿠르드는 천성으로 산악 지대의 유목민이다. 자그로스 산이 쿠르디스탄의 척추이다. 주변으로 이란에는 3600미터의 알반드 산, 이라크에는 3700미터의 할구르드 산, 시리아에는 3800미터의 문주르 산, 터키에는 5200미터의 아라랏 산이 솟아있다. 원체 높은 지대라 비는 드물고 눈이 잦다.

그 눈물이 녹아내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된다. 강물은 페르시아 만까지 흘러 바닷물이 되었다. 산과 산 사이 골짜기에 고인 눈물은 고산 호수도 이루었다. 이라크의 두칸 호수, 이란의 우르미아 호수, 터키의 반 호수는 그 절경으로 유명하다. 이 아름다운 고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향유하던 이들이 쿠르드이다.

응당 자연 지리가 인문 지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의 경계가 이 산악 지대이다. '제국 간 체제'를 매개하는 완충지였다. 쿠르드의 민족주의적 '국사'에서는 이 시기를 이중 속국 상태였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내가 보건데 어느 한쪽에도 일방으로 복속되지 않고 독자성과 자율성을 구가했던 시대라고 기술하는 편이 더 합당하지 싶다. 제국과 국가를 가로지르며 '천 개의 고원'을 넘나드는 '탈영토화'의 유목주의를 실천했던 것이다.

문헌 자료로도 입증이 된다. 오스만제국기는 여행 문학의 전성기였다.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를 통합한 제국이었기에 종으로 횡으로 삼대륙 간 여행이 인기였다.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그리스어와 투르크어 등으로 기록된 여행기가 넘쳐난다. 자연스레 쿠르드인이 살아가는 도시와 마을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비틀리스가 유명하다. 17세기 오스만과 페르시아를 중계하며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자치 도시이다. 문화적으로도 융성했다. 도시 한 복판에 자리한 도서관에는 수만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아랍어로는 법학과 신학 경전이, 페르시아어로는 문학과 예술 도서가, 프랑스어로는 지리학과 물리학, 천문학과 의학 서적이 구비되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 만개하는 아랍판 르네상스 도시였던 것이다. 하여 후발 국가로서 쿠르드가 경험했던 지난 100년의 수난사를 1000년으로까지 소급 적용하는 것은 지나치다. 심정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100년의 수난

두 개의 제국 사이를 영유하다 너댓 개의 국가로 쪼개지면서 비로소 100년의 수난이 시작된 것이다. 아타튀르크의 터키공화국부터 脫亞入歐(탈아입구)로 질주했다. '五族共和(오족공화)'를 방기하고, 투르크 민족주의로 내달렸다. 터키에 쿠르드인은 없다고도 했다. '산악의 터키인'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새나라, 새마을 만들기에 저항하는 쿠르드인은 봉건적이며 수구적이고 종교적인 반동 분자로 처단되었다. '공화국의 적'으로 내몰린 쿠르드계 울라마들은 차라리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시리아로 망명하기를 선택했다. 터키는 더 이상 울라마의 법치가 통하지 않는 이교도의 개발 독재 국가였기 때문이다.

1925년 팔라비조가 성립된 이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7년부터 서구화=근대화가 본격 추진된다. 탈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하는 군사 독재 정권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과 협력한다. 탓에 1941년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분할 점령했다.

소련은 쿠르드를 지원하여 위성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아제르바이잔과 흡사한 형태의 쿠르드인민공화국을 이란의 서북부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괴뢰 정권적 속성이 강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초대 쿠르드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11개월 천하를 누렸던 쿠르드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에 남은 쿠르드인들은 잠재적인 위험 분자로 탄압을 면치 못했다.

바닥을 친 것은 1980년대이다. 터키에서는 쿠르드노동자당 당원들이 4만 명 이상 숙청되었다.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화학 무기로 18만 이상의 쿠르드인을 제거했다. 아사드의 시리아에서도 인종 청소가 단행되었다. 이슬람 세계가 집합적으로 '탈아입구'한 지난 100년, 쿠르드에게는 처절하고 잔혹한 수난의 세월이 이어졌다.

뉴로즈 : 쿠르드의 봄?

뉴로즈, 라는 명절이 있다. 쿠르드의 최대 축제날이다. 쿠르드어로 '새 날'을 뜻한다. 일종의 춘절이다. 산간 지역의 추운 겨울을 지나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계절의 첫날을 기리는 것이다. 굽이굽이 산 정상마다 횃불을 밝힌다. 이슬람으로의 개종 이전, 불을 섬겼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다.

20세기에는 정치적인 의미도 담았다. 횃불은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외세 세력의 침략과 내부자들의 폭정을 극복하고 끝내 이기리라를 다짐하는 날이 되었다. 매년 3월, 사분오열되었던 쿠르드인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엇비슷한 모습의 축제를 즐긴 것이다. 천 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초국가적 페스티벌이다.

21세기, 다른 100년의 봄날이 도래한 것도 같다. 이라크 전쟁 이래 이라크는 사실상 삼분되었다. 바그다드의 중앙 정부는 명목일 뿐 실상은 수니파 자치구에 그친다. 시아파 자치구는 이란의 입김이 드세다. 쿠르드자치구는 이미 준국가이다. 치안이 불안한 바그다드에서 대사관과 영사관을 쿠르드 자치구로 옮긴 나라도 적지 않다.

이라크의 재건에 실패한 미국은 아예 쿠르디스탄을 건설하는 플랜 B를 세웠다. '이슬람주의적 시라크'를 창출한 IS에 맞서 '민주주의적 시라크'로서 쿠르디스탄 독립 국가 카드도 만지작거린다. 이슬람국가(IS)의 확산을 저지할 수도 있고, 이슬람공화국(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프로젝트이다. 사담 후세인 정권에 이어 IS를 섬멸하는 작전에도 쿠르드 부대가 최전선에 동원되고 있는 까닭이다. 20세기 이슬람판 탈아입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들이, 21세기 탈아입미(入美)의 선봉이 되었다.

뜻밖의 혜택을 입기도 했다. 현재 테헤란이나 앙카라에서는 바그다드로 입국할 수 없다. 이라크는 여행 금지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란의 서북부 쿠르드 도시 사난다즈와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 정부 사이에는 비행기가 왕래하고 있었다. 출입국 관리도 별도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웬 횡재인가, 아르빌로 이륙할 수 있었다. 비행 시간은 불과 1시간 30분, 이란의 쿠르드와 이라크의 쿠르드를 잇는 것이니 '국제선(International Flight)'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동쿠르디스탄에서 남쿠르디스탄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아르빌은 쿠르드 자치정부의 수도이다. 거대한 국회의사당이 버젓하게 자리한다. 불과 100킬로미터 떨어진 모술은 화염이 그치지 않는 전쟁터가 되었건만, 이곳만은 전혀 딴판이었다. 건설 붐이 한창이다. 터키계와 아랍에미리트(UAE)계의 고급 호텔이 들어섰고, 슈퍼마켓과 백화점, 대형 쇼핑몰도 여럿이다.

투명한 유리창이 빛나는 초고층 빌딩들도 우후죽순 솟아나고 있다. 거리에는 유럽산과 일본산 자동차가 빼곡하다. 오일 머니의 파워 덕분이다.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중앙 정부가 붕괴하면서, 이 지대에 매장된 풍부한 석유의 관리권을 (미국의 지원 아래) 지방 정부가 획득한 것이다. 쿠르드로서는 미군이야말로 '해방군'이었다. 친서방적이고, 친미적이며, 친민주주의적이다.

하지만 '제2의 두바이'가 되는 것이 목표라는 말에는 끝내 뜨악하고 말았다. 지난 여정 가운데 가장 따분한 장소가 두바이였다. 역사 없는 인공 도시였다. 사람이 아니라 석유가 만든 테마파크였다. 그 매끈한 인공미에 첫날밤은 감탄했으나, 이튿날부터 한없이 지루했다.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100년의 수난을 겪은 쿠르드가 마침내 획득한 수도라는 곳이 겨우 두바이와 같은 인공 도시란 말인가? 쿠르드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사담 후세인의 기획이 성공한 듯하여 모골이 송연했다. '역사적 민중(people)'들은 사라지고, '탈역사적 시민(citizen)'들만 남은 포스트모던 도시였다.

술라이마니야 : 기억의 역전

내가 이 풋내 나는 신도시를 보기 위하여 입국 거부의 위험마저 불사한 채 비행기 삯을 지불 했던가 자괴감이 들던 차, 또 한 번 뜻하지 않은 인연이 닿았다. 인샬라. 일본 분이세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어온다. 얼떨결에 일본어로 아니라고 했다. 완연하게 실망한 기색으로 탁자 위의 책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난개발의 공사판을 돌아다닐 맛이 안 나서 사흘째부터는 카페에 죽치고 앉아 책을 읽었던 것이다. 마침 일본에서 나온 쿠르드 역사서였다. 그녀는 일본 영사관의 직원이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파견된 영사와는 달리 본인은 혼자란다. 벌써 부임 2년차, 우연히 일본인을 만난 듯하여 그리도 반갑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나도 3일을 삭힌 불만을 털어놓았다. 도무지 정이 안가는 도시라고 했다. 그러자, 술라이마니야로 가보세요, 라고 제안한다. 2012년 '문화 수도'로 지정된 곳이란다. 생뚱맞은 신도시가 아니라고 했다. 18세기의 혁신 도시였다. 인샬라.

때는 1784년이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쿠르드 왕이 신도시 건설에 나선다. 청년기를 바그다드, 이스탄불, 카이로에서 보냈다. 서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동쪽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여행했다. 동시대 서유라시아에서 가장 번영했던 세계 도시를 경험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스만제국의 일등 도시에 버금가는 쿠르드의 미래 도시 건설에 나선 것이다.

술라이마니야는 그의 아버지 슐레이만의 이름을 딴 것이다. 거대한 도서관을 갖춘 대모스크를 건설한다. 지식의 중심이자 도시의 중심인 모스크-도서관을 꼭짓점으로 주택, 시장, 학교가 배치되는 원형 도시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민족 도시'는 아니었다. 전형적인 오스만적 환경을 구현했다. '이슬람의 집'을 압축시킨 혁신 도시의 탄생에 서페르시아부터 남아나톨리아까지 쿠르드인 철학자와 시인들, 작가들이 몰려들었다. 새로운 시장 창출의 기회를 엿보는 상인들과 사업가들도 결집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개혁 개방을 선도하는 경제 특구였다.

술라이마니야의 번창에는 19세기의 변화도 일조한다. 서구 열강의 압력에 맞서서 오스만제국도, 페르시아제국도 '중앙 집권화'를 강화한 것이다. '터키화'와 '이란화'가 심화되었다. 남오스만과 서페르시아의 난민들이 술라이마니야로 몰려온 것이다. 마스투라 아르달란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페르시아제국의 걸출한 여성 시인이자 역사가였다.

그녀가 '이란화'가 심해지는 페르시아를 떠나 생을 마감한 곳이 술라이마니야였다. 그녀를 따라온 장인들과 석공들도 적지 않았으니,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건축술과 예술 기법도 전파되었다. 오스만과 페르시아의 정수를 융합시키는 복합 도시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 혁신(Renovation)과 중흥(Restoration)이 공진화했다. 그 바탕이 있었기에 1920~30년대 쿠르드어 신문과 잡지 발행의 거점이 되었다.

술라이마니야의 한복판에 자리했다는 그 도서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21년 영국이 '이라크'를 점령하면서 대모스크에 부속된 도서관을 불태워버렸다. 오스만의 일부를 '이라크'로 떼어내어 영국이 위임 통치하는데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도시가 술라이마니야였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집'을 고수했던 최후의 도시였던 것이다.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이 서술한 '국사'를 해체시키고 왜곡된 기억을 역전시킬 수 있는 전복성을 내장한다.

과연 쿠르디스탄의 분리 독립이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가? 나는 몹시 회의적이다. 자칫 '쿠르드판 이스라엘'이 되기 십상이다. 서아시아의 대분열 체제에 화약고를 하나 더 보태는 '전쟁의 집'을 짓는 셈이다. 유럽식 소가족, 핵가족보다는 이슬람식 대가족, 대일통의 기억을 환기하는 편이 훨씬 이롭다고 여긴다. 칼리프의 복원을 선언한 IS나 신오스만주의를 표방하는 터키가 당장은 위태위태할망정 차라리 '다른 백 년'의 물꼬를 틔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기억의 역전' 차원에서 회감해볼 만한 또 하나의 역사 조류로 '아랍 민족주의'라는 것도 있다. 20세기 중반 20여 개 국가로 쪼개져버린 아랍 세계의 대일통을 도모했던 운동이다. 그 선봉에 섰던 인물이 이집트의 나세르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알렉산드리아가 나세르의 고향이다. '20세기의 알렉산더'를 꿈꾸었던 나세르의 일생을 복기해본다. 카이로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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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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