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분단 국가는 남/북한도, 남/북베트남도, 동/서독도 아니다. 단연 인도/파키스탄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경험을 공유하는 형제국이자, 세 차례나 전쟁을 치른 적대국이기도 하다.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인도는 13억, 파키스탄은 2억이다. 두 나라 모두 대국인데다, 핵무장 국가이기도 하다. 富國(부국)은 아닐지언정, 强大國(강대국)에는 모자람이 없다. 여기에 파키스탄에서 떨어져 나온 방글라데시도 1억을 넘는다. 남아시아가 대분할되지 않았다면, 인도는 진작 중국보다 훨씬 큰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조각 쪼개졌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간 분단의 기원을 찾는 여러 연구가 있었다. 많은 역사가들이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1910년대와 1920년대에서 대분할 체제의 기원을 찾는 것은 지나친 독법이다. 더 이른 시기로 더 더욱 소급 적용해가는 것을 선호하는 역사학자들의 습속이 투영된 것이다. 허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만 해도 1947년의 대파국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느닷없고, 돌발적인 사태였다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하다. 역사는 인과 관계로 만사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때로는 필연보다 우연이 더욱 결정적이다.
두 차례의 선거가 기폭제였다. 일단 영국에서 정권이 바뀌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인 윈스턴 처칠의 시대가 황급하게 저물었다. 대영제국은 곧장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핵심은 인도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큰 식민지였고,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식민지가 되었다.
이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후폭풍이다.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 북아프리카의 사막부터 동남아시아의 정글까지 누볐던 인도군이 속속 인도로 복귀했다. 무려 250만이었다. 이들이 '최초의 국군', 인도국민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인들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인도 전역에서 반영(反英)주의와 군사주의가 고조되었다. 인도군이 인도국민군과 합세하여 인도 총독부를 겨냥하는 '제2의 세포이 항쟁', 혹은 '제2차 인도 독립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던 것이다.
공연한 상상이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인도차이나에서도 복귀하는 유럽 제국에 대한 본토인들의 저항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탈식민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 대세였다 영국의 과제 또한 언제, 어떻게 인도를 떠날 것인가가 되었다. 영국을 '승전국'으로만 간주하기가 힘든 까닭이다. 잃은 것으로 치자면 독일이나 일본보다 더 컸다.
네루를 포함한 국민회의 지도부가 석방된 것은 1945년 6월 14일이다. 유럽 전선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한 달여가 흐른 뒤이다. 수감되었던 3년 동안 그들은 신문과 방송 등 일체의 외부 소식과 단절되어 있었다. 세계사의 급변 상황을 숙지하지 못한 채 낯선 세계로 던져진 것이다.
그들이 부재했던 3년간, 인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당장 국민회의의 상징, 간디에 대한 신망부터 현저하게 떨어졌다. 인도 본토까지 전쟁의 참화가 미치게 되면서 비폭력주의의 무기력함을 확인한 것이다. 졸지에 구시대의 인물처럼 간주되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린 것은 간디가 아니라 보스였다. 보스가 국민회의를 접수하고 네루 대신에 초대 총리가 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보스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중요하게는 무슬림연맹이 대약진했다. 1909년 창립한 이 조직은 국민회의의 기세에 눌려 좀처럼 세를 키우지 못했다. 그러나 전시 기간 국민회의가 없는 틈을 활용하여 대안 세력으로 부상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200만 거대 조직이 되어 있었다. 다가오는 인도 총선 또한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무슬림연맹은 힌두교가 다수인 인도가 아니라 독자적인 이슬람 국가를 만들자고 했다. 전후 인도의 운명을 가늠할 총선의 균열선이 좌/우, 보수/진보로 그어진 것이 아니다. 이념이 아니라 종교가 남아시아를 분할해갔다. 과연 정치는 기층 사회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분열
선거의 주도권도 무슬림연맹이 쥐었다. 이슈를 선점하고 프레임을 장악했다. 선거의 화두는 단연 '파키스탄(Pak-istan)'이었다. 파키스탄은 우르두 어이다. 우르두 어는 힌두 어와 페르시아 어의 혼종이다. 무굴제국의 공식어였던 페르시아 어에 북인도의 일상어였던 힌두 어가 섞인 것이다.
우르두 어로 Pak은 순수함을 뜻한다. istan은 장소라는 뜻이다. 순수한 장소, 순결한 땅을 의미한다. 영국(기독교)과 힌두교가 없는 무슬림만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총선은 독립 인도를 준비하는 제헌의회 선거가 아니라, 파키스탄 찬반 지지를 묻는 국민 투표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무슬림연맹은 무굴제국의 영광을 상기시켰다. 이슬람제국이었다. 대영제국으로부터의 독립 또한 무굴제국의 복권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이 식민지 통치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주입한 민주주의가 복병이었다. 1인 1표, 다수결의 원리를 따른다. 당시 인도의 무슬림 인구는 1억에 육박했지만, 4억 힌두에 비하면 소수자였다. 영국인에 이어 이제는 힌두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며 자존심을 자극하고 공포심을 촉발했다.
영국 총독부에서 힌두 총독부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민회의의 출발부터 영국과의 합작 성격이 농후했다는 아픈 점을 마구 들쑤셨다. 국민회의를 대영제국의 아류이자 후계자에 비유하고, 간디와 네루를 처칠의 후예라고 폄하했다. 국민회의에 투표하는 것은 무슬림의 심장에 총을 쏘는 것이라는 과격한 수사도 등장했다. 최후의 날,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라는 종교적 선동도 가미되었다.
국민회의로서는 조국 인도의 분열을 용납할 수 없었다.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을 계승하는 '대 인도(Greater Mother India)' 건설을 포기할 수 없었다.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야말로 대영제국의 분할 공작이라고 비판했다. 수십 년 인도 독립 운동의 배반이라고도 했다. 세속주의를 견지함으로써 종교에 의한 분열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개의 민족'론을 설파하는 무슬림연맹을 나치즘과 파시즘에 빗대기도 했다. 정녕 파키스탄이 분리된다면 내전이 불가피하는 엄포도 보태었다. 무슬림연맹은 곧장 되받아쳤다. 내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했다. 이슬람제국의 회복이야말로 탈식민의 완성이며 새로운 세계 질서의 상징이라 했다.
결국 선거는 유사-전쟁에 방불했다. 인도는 영국과 규모가 다르다. 선거 또한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는다. 장장 석 달이 걸렸다. 1945년 12월에 시작되어, 1946년 3월에야 마쳤다. 유세단들은 코끼리와 낙타를 타고 남아시아 전역을 누볐다. 양대 정당은 유권자를 최대한 동원하기 위하여 종교를 거듭 소환했다.
무슬림연맹은 코란을 인용했고, 국민회의는 힌두교 사원을 동원했다. 양당의 유세 현장은 멀리서도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모자부터 의상까지 복장부터 판이했다. 투표소 앞에서도 한 손에는 코란을, 다른 손에는 힌두교 경전을 들고 유권자의 선택을 강요했다. 총선이 대통합보다는 대분열을 촉발하는 기제로 작동했던 것이다. 선거를 전후하여 인도는 힌두와 이슬람으로 확연하게 갈라졌다.
지역적으로는 북인도와 남인도가 분열되었다. 남인도에는 애당초 이슬람의 영향이 덜했다. 서북에서 진출한 이슬람은 대개 북인도에 집중되었다. 중국의 서쪽을 '이슬람적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인도에서는 북부가 '이슬람적 인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수도 델리 또한 북부에 치우쳐 있다. 서북 내륙에서 남하한 무슬림 유목민의 시각에서 델리는 유라시아와 인도 아대륙의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마치 몽골 유목민들의 관점에서 북경이 초원과 중원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북인도의 무슬림들은 점점 인도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이슬람 세계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재규정해갔다. 선거 결과로도 입증이 되었다. 서북과 동북 지역에서 무슬림연맹이 크게 승리한 것이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과에 힘입어 파키스탄 분리 독립 요구는 더욱 거세어졌다. 무슬림연맹의 지도자 지나(Mohammad Ali Jinnah)의 초상화가 상징적이다.
백마를 탄 지나의 거대한 초상화가 북인도 주요 도시에 전시되었다. 명백하게 칼리프와 술탄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해체(1916년)로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만 알았던 이슬람 천년의 정치 제도가 북인도에서 재차 부활하는가 싶었다.
다만 파키스탄의 실체는 모호한 것이었다. 여러 지도들이 북인도 일대에 퍼져갔다. 한쪽에는 히말라야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른 '파키스탄 제국' 지도가 떠돌았다. 다른 쪽에는 벵골, 펀자브, 라자흐스탄 등 남아시아 곳곳에 산재하는 '파키스탄 주'를 표시해둔 지도도 있었다.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다섯 지역으로 펀자브(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을 꼽아서 그 머리글자의 조합이 파키스탄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때로는 가상이 실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파키스탄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인도의 파열을 증폭시켰다. 콜카타에서부터 힌두와 무슬림 간 폭동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표 대결 이후의 사생결단 싸움이었다. 힌두 무장 단체 민족봉사단(RSS)이 활약하기 시작했고, 무슬림 무장 단체 또한 지하드로 맞불을 놓았다.
나와 남의 분별이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격변하고 있었다. 구호 단체마저 양쪽으로 갈라졌다. 무슬림은 무슬림만 구하고, 힌두는 힌두인만 보호했다. 사실상의 내전 상태로 진입한 것이다. 범이슬람주의와 범힌두주의가 사납게 충돌했다. 해방 공간, 아힘사는 재차 아수라에 무력했다.
분단
서서히 달구어지던 인도 아대륙의 불안한 정국에 결정적인 기름을 끼얹은 것은 영국이다. 1947년 6월 3일,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는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한다. 인도 총독부가 철수하는 시점도 8월 15일로 못을 박았다. 제국을 거두고 내정에 충실하라는 본국 유권자의 소망에 부응하는 결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식민지 인도에는 폭탄을 투하한 꼴이었다. 불과 70여 일 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분할시켜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촉박한 일정이었다. 국민회의도, 무슬림연맹도 태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애틀리 스스로 본인의 말을 뒤집은 것이기도 하다. 1948년 6월까지 총독부를 해산하겠다고 밝힌 것이 2월 20일이었다. 1년 이상 여유가 있던 분리 독립 준비 기간이 2달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은 서둘러 건국 작업에 돌입해야 했다. '시간과의 경쟁', 다급한 속도전이 분단의 파국을 한층 가중시켰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무슬림연맹은 무슬림이 다수인 모든 주를 파키스탄으로 삼는 '대(大)파키스탄'을 주장했다. 국민회의는 '소(小)파키스탄'으로 응수했다. 관건은 벵골과 펀자브였다.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 귀속권을 주장했다.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만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이 아니다. 벵골과 펀자브는 주 차원에서 동과 서로 분할되어 갔다. 펀자브는 무굴제국 시절 가장 번영했던 곳이다. 벵골은 대영제국 시기 가장 번성했던 장소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단되면서 두 곳은 가장 참혹한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당장 정부 기관부터 쪼개졌다. 공무원들도 갈라졌다. 특히 무슬림 출신 공무원들은 일생일대의 선택에 직면했다. 인도에 남을 것이냐, 파키스탄으로 갈 것이냐. 파키스탄에서 임시 수도로 지정된 곳은 카라치였다. 60만 항구 도시에 델리 출신의 이주자들이 속속 밀려들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건설 붐도 일었다. 흡사 행정 수도 이전에 방불했다. 파키스탄의 이념과 이슬람의 이상을 구현하는 신도시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생활인들에게 종교가 전부일 수는 없었다. 델리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있던 영국인들이 떠난다는 말은 승진 기회가 열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힌두 국가' 인도에 계속 남아도 되는 것일까? 본인은 그렇다 해도 가족과 자녀는? 부모가 자식 염려하는 마음은 국적과 종교를 초월한다. 자녀들의 장래에 어느 나라가 나을 것인가. 번민이 깊었을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은 가혹하리만치 촉박했다.
그들은 서류 더미도 분류해야 했다. 인도에 남을 자료와 파키스탄으로 옮길 자료가 나뉘어졌다. 구비품과 소모품도 나누어야 했다. 책상, 의자, 시계, 타자기, 금고까지 분할했다. 대개 인구 비율에 맞추어 8:2의 비율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것조차 쉽지는 않았다. 좋은 물건을 남기고 나쁜 물건을 보내려는 쪽과, 좋은 물건을 옮기려는 이들 간에 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향후 양국 정부 구성원들 사이에 팽배한 상호 불신과 적대의 이미지는 이 분할 과정에서부터 싹을 틔운 것이다. 각자의 기억이란 저마다 편의적으로 왜곡되기 마련이다.
주요 대학과 공공 도서관의 장서들도 분할되었다. 대개 언어별로 쪼개졌다.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자료들은 파키스탄으로 보내졌다. 델리에 남아있던 무굴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대거 유실된 것이다. 지금도 델리 대학교와 국가 도서관을 비롯하여 인도의 주요 기관에는 무굴제국 자료들이 매우 빈약하다.
레드포트와 후마윤 무덤, 타지마할 같은 위대한 이슬람 건축물들은 인도에 남고, 문헌 자료들은 카라치와 이슬라바마드에 소장되어 있는 것도 분단의 역설이라 하겠다. 그래서 각자가 무굴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인도나 파키스탄보다도 영국의 무굴제국 연구가 훨씬 빼어나다. 이란의 페르시아 문학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조우하여 빚어냈던 인류 문명사의 한 정점을 연구한 문헌들도 대개 영어이다.
영국의 연구자들은 두 나라를 모두 드나들 수 있는 반면에, 양국의 연구자들은 줄곧 상호 방문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분단이 양국의 지적, 학문적 식민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후기 식민 상태를 지속시켰다. 탈식민주의 이론이 괜히 인도에서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국가 분할의 핵심은 군대 분할이었다. 250만 대군을 무장 해제하고 인도국군으로 재편하는데 최소 5년, 최장 10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불과 70여 일 만에 군대도 반 토막으로 쪼개야 했다. 군대만큼은 서북 출신이 많았기에, 거의 양분되다시피 했다. 유라시아 전역에서 끈끈한 전우애를 쌓아왔던 군인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처사였다.
순식간에 무슬림과 힌두로 나뉘어져 파키스탄군과 인도군으로 서로를 겨누게 된 것이다. 총만 겨누는 것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세 차례의 전면전과 수차례의 국지전에서 이들은 적군이 되어 실제 전투를 수행했다. 그리고 군대의 분할은 장차 양 국가의 재통합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대분할 체제 속에서 비대하게 성장해간 양국의 군부는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화해와 화합에도 결사 반대하는 반동적 수구 집단으로 자라났다.
이처럼 분단 국가가 현실화되고 있는 와중에도 분단이 영구적일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인도 총독부에 근무하는 영국인들부터 독립으로 가는 이행기의 임시 방편으로 간주했다. 인도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국 음모론이 성했다. 인도와 아시아를 약화시키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신식민주의 계획이라고 성토했다. 인도를 내팽겨치는 것도 모자라, 도살장의 고기처럼 썰어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파키스탄과 인도는 재결합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조국 인도의 산과 강과 바다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히말라야에서 인도양까지, 아프가니스탄과 스리랑카 사이를 '통일 인도'로 표상했다. 불행히도 이들은 근대 국가의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국민 국가와 국가 간 체제는 제국처럼 느슨하고 유연한 정치체가 아니다. 영토와 국민을 꽁꽁 결박시키는 단단하고 딱딱한 체제로 재편되고 있었다.
임박한 파국을 앞서 예상한 이는 역시나 애틀리 총리 본인이었다. "피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남겼다. 실제로 분단을 전후하여 영국의 경찰과 군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상의 내전 상태를 냉담하게 방치했다. 영국인들의 안전에 위협이 생길 때에만 소극적으로 관여했을 뿐이다. 인도 문제는 더 이상 그들의 관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제국과 아직 들어서지 않는 두 근대 국가 사이에 권력의 공백이 생겨났다. 북인도 일대는 점차 무정부상태로 빠져들었다. 펀자브 전역이 불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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