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섬 한 구석, 이라클리온의 성벽 안쪽에 나무 십자가 하나가 서 있다. 비석엔 화려한 수식어 하나 없이 딱 세 줄.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무덤의 주인이 바로 그리스가 낳은 괴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다. 그런데 이 사람, 죽어서도 교회 묘지에 못 들어갔다. 그리스 정교회가 끝까지 그를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치하 크레타에서 태어난 반항아
카잔차키스는 1883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크레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반란과 학살을 목격하며 자란 그는 아테네에서 법학을,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파리에서 그를 사로잡은 스승은 생의 약동을 설파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었고, 그의 정신을 뒤흔든 건 "신은 죽었다"고 외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였다. 이 조합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인지 감이 온다. 신도 믿고 싶은데 믿지는 못하고, 믿음을 버리고는 싶은데 완전히는 못 버리는, 평생을 그 줄다리기로 살았다.
조르바, 춤으로 신을 조롱하다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는 책도 이론도 다 걷어차 버리고 몸으로, 춤으로 세상을 껴안는 인물이다. 지식인 화자가 머리로 인생을 재는 동안 조르바는 발로 뛰고 손으로 부순다. 카잔차키스 자신이 평생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거였다. 머리로만 굴리는 관념의 감옥을 부수고 몸으로 사는 것. 훗날 이 소설은 영화감독 마이클 카코야니스(Michael Cacoyannis, 1922~2011)의 손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지며 카잔차키스를 세계적인 이름으로 만들었다.
예수를 인간으로 그렸다는 죄
문제는 1955년에 나온 『최후의 유혹』이었다. 예수를 흔들리고 의심하고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바티칸은 금서 처분을 내렸고, 그리스 정교회는 파문절차까지 밟았다. 정작 파문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가 죽었을 때 교회는 정식 장례를 거부했다. 결국 시신은 성벽 안쪽 땅에 묻혔다. 재밌는 건 정작 카잔차키스 본인은 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신을 너무 절박하게 찾다가 미운털이 박혔다는 점이다. 무신론자로 몰렸지만 사실은 평생 신과 씨름한 구도자였다. 1988년, 그가 죽고도 한참 뒤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1942~ )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자 극장에 방화가 일어나고 시위대가 버스를 몰고 돌진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죽은 사람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온 서방세계가 들썩인 셈이다.
좌파 정치인, 그리고 놓친 노벨상
카잔차키스는 서재에만 틀어박힌 샌님이 아니었다. 소련을 여러 차례 오가며 사회주의 실험을 관찰했고, 1945년에는 그리스정부에서 짧게 장관직을 맡기도 했다. 평생 좌파적 이상과 개인의 자유를 동시에 붙들고 씨름한 인물이라, 어느 진영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올랐지만 끝내 받지 못했고, 1957년에는 단 한 표 차이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에게 밀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은 못 받았어도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 같다. 애초에 남이 매기는 등수 같은 데 연연할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한국에 던지는 질문
카잔차키스의 삶을 들여다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권력이, 그게 교회든 국가든, 한 인간의 상상력과 표현을 얼마나 가둘 수 있는가.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령이라는 이름으로 이 나라의 인권과 언론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하룻밤 사이에 짓밟으려 했던 윤석열의 시도를 우리는 목격했다. 그보다 앞서도 이명박근혜 정권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특정 작가와 예술가를 명단에 올려 지원을 끊고 낙인찍은 전력이 있다. 카잔차키스를 파문하려던 그리스 정교회와, 마음에 안 드는 작가 이름을 종이에 적어 내리던 그 시절 청와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상상력이 불편하다고 목록을 만들고 싶어 하는 권력의 습성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결국 역사는 카잔차키스의 손을 들어줬다. 그를 파문하려던 사람들 이름은 각주로도 잘 안 남았지만,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는 지금도 인류의 마음을 울리고, 그의 무덤 앞에는 지금도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표현을 가두려는 시도는 언젠가 우스갯거리로 남고, 자유를 향해 발버둥친 흔적만 오래 남는다는 사실. 이건 크레타에서도, 지금 이 땅에서도 똑같이 통하는 이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