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15년) 가을 부산 영화제에 다녀왔다. 2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였다. 나는 인도 영화를 몰아서 보았다. 개막작부터 <주바안>이었다. <카슈미르의 소녀>도 챙겨보았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지,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꼭 방문할 곳으로 꼽아두고 있었다. 영화제는 10월이었고, 인도행은 11월이었다. 시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 후 매주 한 편씩 인도 영화를 챙겨 보았다. 콜카타와 첸나이, 뭄바이와 델리 등 여러 곳에서 보았다. 장소만큼이나 언어도 다양하다. 힌디어 외에도 벵골어, 구자라티어, 타밀어 등 16개 언어로 제작된다. 비단 인도서만도 아니다. 인도의 안과 밖을 오가는 하늘길에서도 인도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양곤에서 콜카타로 가는 에어아시아도, 델리에서 콜롬보로 가는 스리랑카항공도, 카트만두에서 테헤란으로 이동하는 에미레이트항공도 기내 영화의 절반이 인도 영화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부터 인도네시아까지, 인도양과 남유라시아는 단연 발리우드의 영향권이다.
실로 인도는 영화 강국이다. 1년에 1000편 넘게 생산한다. 날마다 2, 3편씩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매일같이 새 영화가 쏟아진다. 미국이나 중국보다도 앞선다. 세계 최대의 영화 생산국이다. 인구만큼이나 관객 숫자도 굉장하다. 극장을 찾는 사람이 일일 평균 1500만 명이다. 1년이면 자그만 치 40억 명이다. 흥행 성적도 상당하다. <타이타닉>도 <아바타>도 인도에서는 흥행 수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자국 영화가 할리우드보다 경쟁력이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인도 영화의 관객 비중이 근 90%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런 인도의 영화 산업을 가리켜 '발리우드(Bollywood)'라고 통칭한다.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이다. 본래는 1970~80년대 해외로 이주한 인도인, 즉 인교(印僑)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정작 봄베이의 영화인들은 내켜하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아류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살라 영화'라고 했다. 마살라는 양념이라는 뜻의 힌디어이다. 온갖 양념을 버무려 먹는 인도 음식처럼 다양한 장르를 혼합시킨 인도 영화에 안성맞춤 표현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로맨스와 액션, 코미디를 모두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해외 언론과 구미학계에서 발리우드가 정착어로 굳어갔다. 1991년 경제 자유화 조치로 인도와 세계가 전면적으로 (재)접촉하면서 인도에서도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발리우드 투어'가 뭄바이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이 되었다. 아랍인과 아시아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봄베이가 뭄바이로 개명한 것이 1995년이다. 부산 영화제가 출범했던 바로 그해이다. 1991년 인도판 '개혁 개방'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봄베이는 전형적인 식민 도시였다. 런던(유럽)과 두바이(아랍)와 싱가포르(동남아)와 홍콩(동북아)을 잇는 대영제국의 중간 기착지였다. 무역과 상업이 발달한 개항장 도시로 급성장했다.
콜카타가 학문의 중심, 델리가 정치의 중심이었다면, 봄베이는 단연 경제의 중심이었다. 돈이 흐르면 문화도 꽃피기 마련이다. 상업 자본과 문화 자본이 결합하고 결탁했다. 봄베이로 파운드가 몰려들면서 영화 산업도 커져갔다. 그러나 독보적인 지위는 아니었다고 한다. 주요 도시들에서 저마다의 영화를 만들었다.
1947년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성립이 영화판에도 영향을 미쳤다. 콜카타와 라호르(현재는 파키스탄) 등 북인도에 거점을 두고 있던 영화인들이 대거 봄베이로 이주한 것이다. 독립 이후 힌디어가 제1언어가 된 것도 봄베이에 유리했다. 지방어를 쓰는 첸나이와 하이데라바드(Hyderabad) 등에 비해 경쟁력이 생긴 것이다.
콜카타의 영화는 문학적이고 예술적이었다. 첸나이는 남인도 특유의 신화적 성격이 강했다. 구자라트 영화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이었다. 반면 봄베이의 영화는 '민족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지방색을 지워냄으로써 독립 이후 인도 영화 산업의 중추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1947년 독립 이후에도 도시의 이름을 바꾸지는 않았다. 반세기가 더 지나서야 뭄바이라는 원래 이름을 회복한 것이다. 역시나 1990년대 이후 인도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세계화와 힌두화'의 공진화의 산물이다. 느지막한 탈영국화였다. 공교롭게도 1995년은 한국에서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된 해이기도 하다. 탈냉전이 곳곳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촉발했던 것이다. 고쳐 말하면 냉전기는 식민기의 후반전, 후기 식민(post-colonial)이었다는 뜻도 된다.
1990년대 이래 등장한 신중간층의 문화적 취향도 확연하게 달라졌다. 더 이상 영국적인 것을 편애하지 않는다. 인도적인 것을 즐긴다. 더 정확하게는 힌두적이다. 이들이 힌두 영화를 적극 소비함으로써 발리우드가 융성하는 기초를 다졌다. 신보수주의, 혹은 신전통주의라고 할 수 있는 문화적 동향과 맞물려 식민 도시 봄베이가 글로벌 도시 뭄바이로 거듭난 것이다. 21세기 뭄바이는 복고와 첨단이 오묘하게 어우러지는 인도 최대의 도시이다.
국민 국가의 영토성에 충실했던 국민회의와 달리 힌두뜨와를 강조하는 인도인민당은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퍼져있는 2500만 인교들을 중시했다. '비거주 인도인'이라는 별개의 범주를 만들어 이들의 투자를 적극 독려했다. 이중 국적을 부여하고 '해외 인도인의 날'도 제정하여 크게 기념한다.
인도와 인교의 재결합을 상징하는 영화 장르도 있다. 소위 '인교 로맨스'이다. 1990년대 후반 재영 동포, 혹은 재미 동포의 인도 귀환과 본토 여성과의 로맨스가 크게 유행했다. 대표적인 스타가 샤룩칸(Shah Rukh Khan)이다. 1998년 공전의 흥행을 기록한 [Bapa Kuti]의 주인공이었다. 나사(NASA)에서 근무하는 뛰어난 과학자였던 그가 인도에 돌아와 가족과 마을의 일원이 되어가는 귀환의 서사를 선보인다. 응당 본토 아가씨를 만나 낭만적인 사랑에도 빠진다. 흡사 1994년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사랑은 그대 품안에>의 차인표를 연상시킨다.
지금은 온라인에서 공짜로 볼 수 있다. 근 20년 전 작품을 복기하노라니 극중 이름이 더 흥미롭다. 남자 주인공은 모한(Mohan)이고, 여자 주인공은 기타(Gita)이다. 곧장 '모한다스' 간디와 <바가바드 기타>를 연상시킨다. 간디 또한 영국에서 유학하고 남아공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인도로 돌아온 인물이다.
귀국 이후에는 힌두교와 자니교를 비롯한 인도의 전통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갔다. 20세기와는 또 다른 21세기형 귀환 서사라고 하겠다. 인도와 세계의 재결합, 지구화와 힌두화의 공진화를 매개하는 인물로 샤룩칸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이다. 일약 발리우드를 상징하는 슈퍼스타로 등극하여 오늘까지 변함없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인류(印流) : 멀티미디어+멀티내셔널
인도에서 1991년 이후 태어난 신세대만 3억5000만 명에 이른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전혀 딴 판이다. 부모들이 자랄 때는 국영 방송국만 달랑 둘이었다. BBC와 MTV, Star TV 등 위성방송이 진출한 것이 1991년이다.
곧이어 인도의 독자적인 대중문화 채널 ZEE도 등장했다. 인도판 MTV라고 할 수 있다. 영향력이 상당하다. 특히 영화 음악에 주력한다. 음악 채널과 영화 채널이 결합되었다. 빌보드처럼 매주 순위도 발표한다. 나아가 발리우드 전체를 대상으로 독자적인 영화제도 주최한다. 개최 장소도 뭄바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두바이, 도하,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자카르타 등을 순회한다. 인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영화제이다.
스포츠 채널도 각광이다. 영국에 EPL(English Premier League)이 있다면, 인도에는 IPL(Indian Premier League)이 있다. 크리켓 리그이다. 유럽의 축구, 미국의 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파키스탄과 인도 간 숙명의 라이벌전은 '엘 클라시코'에 빗대기도 한다. CF 모델의 상당수도 크리켓 스타들이 채우고 있다.
미디어 산업의 약진은 인도가 자랑해마지않는 정보기술(IT) 산업과도 결합되었다. 젊은이의 상당수가 인터넷과 모바일로 영화와 방송을 소비한다. Saavn.com은 발리우드 영화와 음악이 소비되는 전 지구적인 메카이다. Indiafm.com은 발리우드 전용 포털 사이트이다. 영화 생산부터 마케팅은 물론 비평까지 모든 영역을 망라한다.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 소셜 미디어까지 융합된 멀티미디어 환경은 발리우드의 영토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처음에는 대영제국의 연결망을 따라 인도양에 산재했던 인교들에 호구되었고, 점차 지리적 범위를 넓혀 태평양을 건너 로스앤젤레스(LA)와 뉴욕까지 접속되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피지, 나이지리아, 두바이에서 영국과 미국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문화 산업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제는 기획과 제작, 유통 전 영역에서 인도와 인도양, 전 세계를 아우르는 연결망이 항상적이다. 발리우드 문화 상품이 전 지구적으로 환류하면서 영토에 구애받지 않는 공동체, '발리우드 공화국'을 만들어간다. 한류 못지않은 인류(India Wave)이다.
멀티미디어와 멀티내셔널의 혼합은 영화 자체의 텍스트와 내러티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매체 환경이 상시화 되면서 상영관에서의 흥행뿐만이 아니라 개봉 이후의 지속적인 소비를 겨냥하게 되었다. 특히 발리우드 영화는 춤과 노래가 백미이다. 영화 가운데 일부를 고스란히 떼어내어 뮤직 비디오로 향유한다. 영화의 맥락 밖에서, 온라인에서도 소비를 극대화시키는 전략이다. 내러티브에 종속되지 않고 별개의 독자성과 생명력을 누리는 춤-노래 시퀀스가 3~4분 단위로 편성되는 까닭이다. 영화 이후의 음악과 뮤직 비디오는 발리우드의 이동적이고 유동적 소비에 더더욱 박차를 가한다.
애초 발리우드 영화에 춤과 노래가 두드러졌던 것은 지극히 인도적인 맥락의 산물이었다. 원체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다. 그렇다고 중화제국 같은 통일적인 권력 아래 있지도 않았다. 동일한 문자를 다르게 발음하는 한자 같은 표의 문자도 없다. 20개의 공식어와 그보다 훨씬 많은 방언이 하나의 국가 아래 자리한다. 게다가 저마다 상이한 표음 문자를 쓴다. 일상적인 다언어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자막을 통해서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역마다 번번이 다른 자막을 깔아야 한다. 응당 대화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비언어적 의사소통, 춤과 노래가 발달해간 것이다.
콜카타와 뭄바이, 델리 같은 대도시에서 인도인들의 첫 대면 풍경이 몹시 흥미롭다. 처음에는 영어로 통성명을 한다. 그리고 각자의 출신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언어가 달라진다. 국내와 국외의 가름이 모호한 것이다. 응당 '민족 문학'이라는 것도 성립하기가 힘들다. 민족 문학이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영화가 수행한다. 언어의 장벽을 음악과 몸짓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춤과 노래가 또 하나의 언어로써 모국어의 역할을 대리 수행한다.
힌디어 영화는 아무래도 북인도 중심이다. 그러나 춤과 노래를 통하여 다민족, 다지역의 전통을 덧붙인다. 펀자브의 민속 음악을 따오고, 타밀의 전통춤을 빌려와서 콜라주하는 식이다. 즉 발리우드의 영화 생산 자체가 다민족적이고 초민족적이다. 협동과 협주에 익숙하다. 이러한 인도 내부의 경험이 수십 년간 누적되면서 글로벌 발리우드의 기초를 다진 것이다. 힌디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도양의 아프로-아랍(Afro-Arab) 관객들도 발리우드 노래만은 흥얼거릴 수 있는 까닭이다. 하긴 인도는 이미 아프로-아랍 세계를 내부에 품고 있다. 유라시아와 인도양이 만나는 곳에 인도 아대륙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발리우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1998년은 <타이타닉>의 해이기도 했다. 정권 교체와 더불어 새내기가 되었던 나는 1995년 창간한 <키노>와 <씨네21>을 읽으며 교양을 쌓아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할리우드의 영향권 아래 있는 태평양 국가의 현상이었다. 군사 독재자 수하르토가 실각하고 정권 교체를 달성한 1998년의 인도네시아에서는 [Kuch Kuch Hota Hai]가 더 큰 인기를 모았다. 발리우드 작품이었다. 특히 인도네시아 최대 섬인 자바인들이 열광했다고 한다. 자바인들은 벵골만을 사이에 두고 남인도와 혈연과 지연으로 긴밀하다.
비단 인도네시아만이 아니었다. 아라비아 해를 건너 남아프리카 더반에서도 [Kuch Kuch Hota Hai]는 8개월이나 장기 상영되었다. 1998년이면 만델라가 임기를 마친 해이다. 만델라의 정당이 바로 '국민회의'였다. 남아공의 국민회의와 인도의 국민회의는 간디로 이어진다. 만델라를 이어 남아공 국민회의의 당수를 맡은 이가 간디의 증손주였던 엘라 간디(Ela Gandhi)였다. 그녀는 [Kuch Kuch Hota Hai]의 주제가를 총선 캠페인 음악으로 활용했다.
이처럼 탈냉전과 더불어 봇물이 터진 발리우드의 대약진은 느닷없는 현상이 아니었다. 냉전기에 뿌렸던 씨앗들을 하나둘 거두어가는 수확이었다. 비동맹 외교를 통하여 선업을 짓고 공을 쌓았던 것이다. 1957년작 [Mother India]는 사회주의 진영과 비동맹 국가들에서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할리우드의 '문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국가들과 아시아-아프리카 권역에서 널리 환대받았다.
1965년 반둥 회의 10주년 기념차 자카르타를 방문했던 김일성도 수카르노의 추천으로 이 작품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평양에서도 상영되었는지는 확인이 힘들다. 여하튼 비동맹 외교의 30년 역사가 있었기에, 1990년대 이래 발리우드 영화들이 서아시아로, 북아프리카로, 중앙아시아로,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구미적 근대에서 지구적 근대로 이행하는 길목에 발리우드가 자리한다고 하겠다. '인도형 지구화'의 진원지이다.
고로 발리우드는 할리우드의 아류에 그치지 않는다. 또 68 혁명 이래 서구에서 유행했던 '제3세계 영화'나 '월드 뮤직' 붐과도 다르다. 비서구가 원천을 제공하고 서구의 거대자본이 제작하는 신식민주의적 생산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다. 전통악기와 토착어로 노래하며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을 위무했던 뉴에이지풍 네오-오리엔탈리즘을 변주하지도 않는다. 대안적 근대화, 대안적 지구화라며 아카데미 특유의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다. 그간의 세계화를 보충하는 보완재라고 하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구미의 일방적인 문화 패권이 저물고 지구적 문화를 향유하는 '민주화'와 '정상화'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탈근대가 아니라 꽉 찬 근대(Full Modern)로 들어서고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한 세계로 변해간다.
인도에 머문 6개월, 내가 보았던 30여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008년 개봉한 <악바르>였다. 악바르 대제는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 가운데 한 명이다. 특히 힌두 공주와 결혼한 술탄으로 유명하다. 무굴제국이 달성한 페르시아-힌두 문명의 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악바르를 페르시아어를 말하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외래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위대한 인도인'으로 접수한다. 나아가 대영제국 이전부터 이미 구현되었던 '세속주의'도 환기시킨다. 인도는 영국이 도래하기 전부터 종교로 배타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유럽식 정교 일치가 부재했기에, 세속화=근대화의 공식도 통용될 수 없었다. 도리어 일찍이 종교적 관용과 아량으로 넉넉했던 무굴제국의 위엄을 과시한다. 힌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공생했던 역사적 전범을 화려한 영상미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스크린 밖 '힌두 민족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진취적이고 세련되었다. 글로벌 발리우드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영화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발리우드의 장래에 성원을 보낸다. 어느새 나도 '발리우드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다.
발리우드 못지않게 인기를 끄는 또 하나의 인도 문화가 있다. 요가이다. 이미 세계인이 즐기는 운동이자 수련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인도의 세계화에 앞서 요가부터 세계화되었다. 인도를 견문하면서 요가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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