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아메다바드(Ahmedabad)에 내렸다. 구자라트의 주도이다. 인도 같지가 않다. 깔끔하다, 깨끗하다고는 못하겠다. 덜 더럽다. 덜 지저분하다. 길바닥에 너부러져 자고 있는 개들이 보이지 않는다. 파리 떼도 덜한 편이다. 팔다리를 잡아끌며 구걸하는 이들도 드물다. 공기도 덜 탁하다.
델리는 매연이 무척 심하다. 베이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좀처럼 비도 내리지 않는다. 나뭇잎마다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다. 회색이 녹색을 덮는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머리칼이 빳빳해질 정도이다.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즐길 수가 없다. 취미 생활을 유보 당했다. 반면 아메다바드는 아라비아 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청량했다. 바지런히 쏘다녔다.
도시 풍경도 사뭇 다르다. 영국풍 식민지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대영제국 시기 정치 경제적 중심지가 아니었다. 무미건조한 잿빛 콘크리트, 네루 시대의 소비에트식 모더니즘이 기저를 이룬다. 그 사이로 투명한 유리창이 빛나는 포스트모던형 고층 건물이 솟아나고 있다. 하이테크 스마트 빌딩들이 경쟁적으로 마천루를 이룬다. 20세기 인도로부터 가장 먼저 벗어난 곳이 이곳 구자라트였다.
두바이와 싱가포르에 견주는 이도 있다. 적당한 비유가 아닌 것 같다. 규모가 다르다. 도시 국가가 아니다. 구자라트는 인도 인구의 4%를 차지한다. 5000만 명의 준(準)국가이다. 이 구자라트를 2002년부터 다스린 이가 나렌드라 모디 총리였다. '작은 정부, 많은 거버넌스(Less Government, More Governance)'를 내세웠다.
연평균 10.7%의 성장률을 자랑했다. 인도 평균 7%를 훌쩍 앞지른다. 같은 시기 인도에서 생겨난 일자리 가운데 절반이 구자라트에서 창출되었다고 한다. 절대 빈곤 감소도 으뜸이었다. 10년 만에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주가 되었다. 4위에서 1위로 껑충 뛰었다. '구자라트 모델'이 널리 칭송되었다.
순전히 모디 개인의 수완만은 아니다. 역사의 유산이고, 지리의 소산이다. 초기 근대(early modern)가 만개(full modern)했다. 지도를 보았으면 좋겠다. 구자라트는 인도양으로 툭 삐져나왔다. 긴 해안선을 보유한다. 아라비아 해 건너 오만이 남인도나 동인도보다 더 가깝다. 예로부터 인도양 경제권의 신경망이었다. 바닷길의 중간 역이었다.
자연스레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다. 유능한 항해사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이 아라비아 해와 벵골 만을 엮었다. 동서 인도양 무역의 가교였다. 레바논에서 온 배와 중국에서 내려온 정크선이 이곳에 함께 정박했다. 아라비아의 카펫이 동남아까지, 중국의 도자기가 아프리카까지 전해졌다.
구자라트 상인들은 이 중계 무역을 통하여 양쪽에서 수익을 창출했다. 모험과 도전의 기업가 정신으로 충만했다. 대영제국 시절에도 그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제국의 연결망을 타고 중동과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곳곳에 진출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변호사 경력을 처음 시작한 곳이 남아프리카였음도 구자라트 출신이라는 점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인도양을 하나의 생활세계로 여겼던 '토착적 세계인'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 '거대한 뿌리'는 1991년 경제 자유화 이후 꽃을 피운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동서부로도 진출했다. 실리콘밸리와 맨해튼에 사는 인도인의 40%가 구자라트 인이라는 통계도 있다. 다소 과장된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만큼 해외 진출이 많다고 하겠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 이어 아메리카까지, 인도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지구-지역망(glo-cal network)을 만들어 간다.
이 '글로벌 구자라트 인'들의 고향 투자에 힘입어 아베다바드는 금융 중심 첨단 도시로 변모 중이다. 면적은 런던의 금융가보다 두 배가 더 크다. 장차 유라시아에서 자웅을 겨룰만한 도시는 상하이가 유일하지 싶다. 인도형 지구화의 근거지이다.
다시 한 번 지도를 보자. 구자라트는 아라비아 해만 면한 것이 아니다. 유라시아 내륙과도 접한다. 이슬람 문명과의 경계지, 혹은 접촉면이다. 이슬람이 동진하면서 가장 먼저 이른 곳이 구자라트였다. 지금도 1억5000만 무슬림의 다수는 펀자브부터 서벵갈까지 북인도에 자리한다. 규모로 따지면 인도네시아(2억5000만), 파키스탄(2억)에 이어 세 번째이다. 중국과의 차이라고도 하겠다. 11억 힌두에 비하면 1할에 불과할지라도, 도무지 '소수 민족', '소수 종파'라고만 하기가 힘들다. 역시나 무슬림은 20세기에도 인도사의 주요 행위자였다. 정파(이념)가 아니라 종파(종교)로 갈라섰던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를 촉발시켰다.
구자라트는 인도에서 떨어져나간 바로 그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넘어온 이들이 적지 않다. 피난민들은 반파키스탄, 반이슬람 정서가 강하다. 1000년 전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진격해온 투르크-페르시안 무슬림의 구자라트 정복 이야기가 민간 설화로 전해진다.
무굴제국에 대한 기억도 왜곡되었다. 종교 다원주의의 전범을 과시하며 '유라시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제국의 관용성은 은근슬쩍 지운다. 무슬림의 힌두 지배라는 단순 구도로 이해한다. 9.11 이듬해, 구자라트에서도 '문명의 충돌'이 일어났다. 미국인들의 심층 심리에 9.11이 각인되어있듯, 인도인들에게는 '2002년'이 집합적 기억으로 남아있다.
Reaction
기차에서 말동무를 만났다.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이들이 많다. 서아시아인에 비해 동아시아인들이 많지 않아서일 것이다. 바다로 활짝 트인 서아시아와는 달리 동아시아는 히말라야를 건너야 한다. 한류 또한 '세계의 지붕'을 넘지는 못한 것 같다. "너 성룡 닮았다(You looks like Jackie Chan!)"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지하철에서도, 오토릭샤 기사도, 숙소 직원도 그렇게 말한다. 별로 닮지 않았다. 아마도 성룡이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동아시아인인가보다. 홍콩에서 만든 무협 영화나 액션 영화를 본 것도 아니다. 주로 할리우드에서 찍은 성룡 영화를 보았다. 구자라트로 가는 기차에서의 대화 또한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키 챈 닮았다며, 사진을 찍자고 한다. 지난 5개월, 인도의 페이스북에 내 얼굴이 여럿 실렸을 것이다. 'Jackie Chan'이라는 태그를 달고.
그는 구자라트 출신의 부동산 사업가였다. 1970년생, 40대 중반이었다. 루이비통 가방에 버버리 구두를 신었다. 손에는 갤럭시 S7을 쥐었다. 더 많은 명품을 걸치고 있었을 터인데,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배낭 여행 다니던 대학생 시절이 아니다. 도무지 일반 칸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큼한 땀 냄새에 짐짝처럼 실려 갈 자신이 없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침실 칸을 탔더니 평소에 만나기 힘든 부류를 만난 셈이다. 1991년 경제 자유화 이후 등장한 소위 '신중간층'이다. 국민회의 시절 중간층은 영어 교육을 받고 관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민간 부문이 활성화되었다. 부동산과 금융, IT, 문화 산업이 약진했다. 아비투스의 차이가 현저하다. 문화적 자긍심이 넘친다. '인도인'보다는 '힌두인'의 자부심을 표출한다. 라이프 스타일도 영미풍, 서구화 일변이 아니다. '브라만화' 하고 있다.
그래서 과시적 소비주의와 일상의 금욕주의가 묘하게 섞여 있다. 명품으로 치장한 외양과는 달리 그 또한 육식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구자라트 주는 금주가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자니교의 영향이 짙기 때문이다. 간디도 유학가기 전, 고기를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고서야 가족의 허락을 구할 수 있었다. 정갈하고 청결한 삶을 신중간층의 상징 자본으로 여긴다.
그 역시 모디'빠'였다. 국민회의에 대한 반감이 몹시 심했다. 정실 정치와 부정부패에 넌덜머리를 냈다. 국민회의 일당 우위 체제 시절을 '정실 사회주의(crony socialism)'로 접근해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간디의 고향인 구자라트도 국민회의의 오랜 아성이었다. 반세기를 집권했다. 처음으로 정권을 교체한 이가 모디였다.
한참을 우회하다 뜸들이던 질문을 던졌다. 가장 궁금한 주제였던 "2002년"에 관한 것이었다. 델리로 이주한 지 10년째라니, 2002년에는 그도 구자라트에 살았을 것이다. 아차, 싶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화색이 사라졌다. 나보다 더 오래 뜸을 들이더니 "Reaction"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고드라에서 기차가 불타지 않았다면, 폭동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뚝 끊어졌다. 어색해진 공기를 2시간이나 더 견뎌야 했다. 인도의 인프라는 여전히 열악하다. 잦은 정전만큼 열차 또한 느릿하다. 창밖의 풍경 또한 천천히 변한다. 15년 전 기억도 생생하다. 살인의 추억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였다.
사건은 방화에서 시작되었다. 58명의 힌두교도들이 타고 있던 기차에 불이 났다. 아요디야(Ayodhya)에 있는 힌두교 사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사연 많은 사원이다. 16세기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본래는 힌두교 사원이었다. 이슬람이 진출하고 무굴제국이 세워지면서 힌두교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지은 것이다.
힌두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이슬람 사원을 재차 허물고 힌두사원으로 복구시켰다. 망치와 해머로 모스크를 부시는 모습이 인도 전역에 중계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이후 힌두의 성지가 되었다. 라마 탄신을 기념하는 사원이라 했다. 무슬림들은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힌두교도들의 기차에 불을 지른 것이다.
마침 모디가 구라자트 주지사에 취임한 무렵이었다. 즉각 애도를 표시했다. 장례식도 열었다. 불에 탄 시신이 공개되었다. 그의 표현대로 'reaction'이 일어났다. 아메다바드를 비롯한 구자라트의 여러 도시에서 학살과 강간이 발생했다. 격분한 힌두들이 무슬림에 보복을 가했다. 2000여 명이 살해되었고, 400여 명이 강간당했다.
가옥 파괴로 약 20만 명은 난민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폭도들이 선거인 명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인도의 선거인 명부에는 종교와 카스트가 기재되어 있다. 취지는 나쁘지 않다. 소수 종파와 하층 카스트를 배려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명단을 활용하여 무슬림 가정을 표적으로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치밀한, 그래서 효율적인 작전이었다. 무슬림이 소유한 상가들까지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주정부의 암묵적 승인 아래, 혹은 막후 지원으로 일어난 것 아니냐는 의혹이 가시지 않는 까닭이다.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이들이 황색 스카프에 카키색 바지를 입었다고도 한다. 민족봉사단(RSS)의 유니폼과 일치한다. 막 주지사가 된 모디는 RSS의 골수 단원 출신이었다.
모디는 그 사건에 대해 오랜 침묵을 고수했다. 2013년 관련이 없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서야 유감을 표시했다. 그 사이 그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오래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간디-네루 왕조에서 힌두교가 역차별을 받는다고 여겼다. 국민회의 시절 두 명의 대통령이 무슬림이었다. 인구 대비 무슬림의 의석수도 많은 편이었다. 세속주의라는 이름으로 힌두가 절대 다수인 국가에서 무슬림이 특혜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모디는 무슬림을 우대하거나 편애하지 않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공정하고 공평했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 구자라트에서 종파 간 분쟁이나 폭력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빼어난 행정 능력을 입증했다. 철저한 금욕주의에 부패와는 일절 거리가 멀었다. 구자라트의 놀라운 경제 성장이 힌두교의 내적인 가치와 결부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20세기 국민회의식 '인도 민족주의'에 대한 21세기 '힌두 민족주의'의 리액션이었다.
민족봉사단(RSS)
RSS(Rashtriya Swayamsevak Sangh)는 1925년 결성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였다.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인도인 용병의 역할이 혁혁했다. 그런데 다수가 무슬림이었다. 영국의 분리 통치였다. 소수파인 무슬림과 시크교들을 경찰과 군대에 등용하여 다수파인 힌두를 다스렸다. 힌두교도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힌두의 땅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판을 친다며, 역차별과 불공정에 분통을 터뜨렸다. 영국과 국민회의, 그리고 이슬람에 맞서 힌두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RSS가 등장했다.
정치 단체는 아니었다. 정당도 아니었다. 사회봉사와 헌신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자원봉사 단체에 가까웠다. 다만 철저하게 힌두교에 바탕을 두었다. 정신의 수양과 육신의 수련을 강조했다. 힌두의식을 양성하고 고무시켰다. 빛을 발한 것은 격동기였다. 영국이 떠나자 아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쪼개졌다.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인도로 이주했고, 그만큼의 이슬람교도가 파키스탄으로 피난 갔다. 한반도의 남북 간 인구 이동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북인도 일대는 거대한 아수라장이었다.
이때 피난을 돕고 난민촌에서 봉사 활동을 했던 이들이 RSS 단원이었다. 세 차례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도 RSS는 후방에서 맹활약했다. 중국과의 국경 전쟁을 치를 때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군인은 멀리 있지만, RSS 단원들은 곁에 있었다. 다친 곳을 치료해주고, 일용할 양식을 주었으며, 잠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민심을 샀다.
조직원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말단 세포들이 마을마다 퍼져갔다. 불가촉천민 차별을 해결하고, 힌두교를 더욱 평등한 종교로 개혁하는데도 앞장섰다. 그 중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조직에 헌신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도승처럼 엄격한 규율과 훈육 속에서 생활했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RSS의 탄생과 성장을 20세기 조국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현상으로 꼽고 있다. 허장성세만은 아닌 것 같다. 500만을 돌파하여 600만을 향해간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 조직이다. 경쟁자라면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활동으로 성장했던 무슬림 형제단이 있을 것이다.
RSS와 파시즘을 결부시키는 독법이 없지 않다. 전혀 허황한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1940년대, 파시즘에 기운 적이 있다. 영국을 격파하는 독일을 주시했다. 독일로 말미암아 대영제국도 무너질 수 있다는 기대가 피어올랐다. 나치스의 인종적 순혈주의에도 솔깃했다. 인도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아니라 힌두의 땅이라는 그들의 소망과 통한다고 여겼다.
영미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를 넘어서자는 히틀러의 선동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에 반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을 지원함으로써 독립을 구걸하는 국민회의 노선은 굴욕적으로 보였다. 힌두사원에서 코란을 인용하며 무슬림과 힌두의 공존을 호소하는 간디 또한 불경하다고 여겼다. 힌두 문명의 마지막 보루, 최후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과격파였던 고드세의 총구가 끝내 간디를 겨냥했던 까닭이다.
초대 수상 네루는 건국 초기 3년간 RSS를 비합법 단체로 만들었다. 1970년대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역시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RSS 활동을 금지시켰다. 당시 수배령을 피해 지하로 잠수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모디였다. RSS는 하방하지 않을 수 없다. 더더욱 기층으로 파고들었다. 국민회의와의 불화 또한 중단된 것이 아니었다. 내연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국민회의 시절은 대영제국의 연장선, 그 후신에 불과했다. 절치부심, 와신상담을 도모했다.
인도인민당(BJP)
모디를 대처에 빗대는 이들이 있다. 혹은 푸틴에 견준다. 비유도 꼭 서방 사람들만 댄다. 내가 보기엔 1979년의 두 거인을 합한 것 같다. 동아시아의 덩샤오핑과 서아시아의 호메이니이다. 중국의 개혁 개방과 이란의 종교 혁명을 결합시킨 것 같다. CEO형 리더이자 토착적 민족주의자이다. 차가운 경제적 합리성과 뜨거운 종교적 열정을 한 몸에 체현하고 있다. 덩샤오핑에게 1989년의 천안문 사태가 있다면, 모디에게는 2002년 아오디야 사태가 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인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reaction'을 촉발했다. 이란은 페르시아제국의 후예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위상이 상당하다. 종교 혁명의 파고가 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분할 체제 하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인도로서도 무심할 수가 없었다.
창당 당시에는 상층 카스트가 주류였다. 브라만과 크샤트리아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체 인구의 15%에 그친다. 다수결로 작동하는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약세일 수밖에 없다. 의회 정치에 적응해야 했다.지지 기반을 확대했다. 주력 대상이 바로 '신중간층'이었다. 전통적 상층 카스트와 현대적 신중간층이 BJP의 중추를 이루었다.
이들이 견인하는 '힌두 민족주의'에 대중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힌두' 안에 계층과 계급, 젠더를 녹여냈다. 힌두로 대동단결하는 전략으로 영국산 국민회의와 소련풍 공산당은 물론이요 무슬림, 여성, 하층 카스트 등 '소수자 정치'를 추구해왔던 자유주의 좌파 정당들을 역전시켜갔다.
무엇보다 1991년 경제 자유화 이후 태어난 청년들이 크게 호응했다. 2030 세대들이 유권자의 4할을 점할 만큼 현재의 인도는 젊은 국가이다. 이들이 "인도를 정복하라, 좋을 날이 올 것이다(Conquest of India. Good days are ahead)"라는 모디의 트윗에 격하게 반응했다. 리트윗에 리트윗을 반복하며 그들 자신과 인도의 카르마를 바꾸기를 열렬히 염원했다. 따라서 2014년 총선은 좌파에서 우파로, 진보에서 보수로의 일반적인 권력 교체가 아니었다. 시대교체, '다른 백년'의 출발이었다.
힌두 민족주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대세이다. 메카 트렌드이다. 국민회의마저 대대적인 혁신 작업에 들어갔다. 더 이상 정교 분리만을 일방으로 고수할 수 없게 되었다. 유엔 연설에서 힌두 고전을 인용하고 기후 변화의 대안으로 요가적 삶을 선전하며, '국제 요가의 날'까지 이끌어낸 모디에 영향을 받고 있다.
장차 국민회의의 '탈영국화'와 '재인도화'가 예상되는 지점이다. 그들에게도 유력한 자산이자 상징이 있다. 간디이다. 그간에는 그의 이름만 팔았지, 그의 사상을 따르지는 않았다. 1948년 간디 암살은 국민회의의 역사에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간디는 국민회의와 민간 사회의 결합을 위해 분투했던 인물이다. 정치와 종교의 공진화, 성과 속의 습합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명저 <힌두 스와라지>는 인도의 전통 원리에 바탕을 둔 마을 만들기가 그의 건국 이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네루식 사회주의 세속 국가는 간디의 신념과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국민회의 또한 탈세속화에 합류할 것 같다.
여야를 막론하고 재영성화의 물결이 역력하다. 근대 정치의 이념형으로부터 갈수록 벗어나고 있다. 인도식 정치, 힌두적 정치가 기지개를 켠다. 문명론이 국가론을 대체한다. 혹은 문명론과 국가론이 결합하여 근대적 정치이론을 갱신하고 있다. '다른 정치'이고 '새 정치'이다.
이제 <힌두뜨와(Hindutva)>를 살필 때가 되었다. 1923년에 출간된 책이다. 20세기의 전투적 힌두교 사상가 비니야크 다모다르 사바르카르의 작품이다. 얕지만 깊은 책이었다. 뜨거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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