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모디, 21세기 간디 혹은 인도의 히틀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모디, 21세기 간디 혹은 인도의 히틀러?

[유라시아 견문] 모디 : 인도의 재발견

모디 : 인도의 재발견

2014년 체제

획기적인 선거였다. 정초(定礎) 선거였다. 인도 현대사는 2014년 5월 16일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21세기의 인도가 발진했다. 그 주인공이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이다.

인도의 총선거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긴 선거이다. 유권자만 8억 명이다. 실제 투표한 사람은 5억5000만 명이었다. 유럽 총 인구가 5억 명이다. 남북아메리카를 합해야 6억5000만 명이다. 유럽보다 더 많고 아메리카 대륙에 조금 못 미치는 유권자가 인도 총선에 참여한 것이다. 전 세계 민주주의 아래 살아가는 사람의 절반이 인도에 산다. 그 인도인들이 모디를 선택했다.

3억 명 가까이가 인도인민당(BJP)을 지지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은 중국공산당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정당은 인도인민당이다.

모디는 총선을 대통령 선거처럼 이끌었다. 모디냐, 아니냐를 묻는 구도로 몰고 갔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압승을 이끌었다. 하원(Lok Sabha) 543석 가운데 282석을 휩쓸었다. 한 정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한 것은 1984년 이래 처음이었다.

1984년보다는 1952년, 제1대 총선에 빗댈 만하다. 네루가 이끄는 국민회의가 압승했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국민회의의 적수가 없었다. 그 후 일당 우위 체제가 오래 지속되었다. 간디와 네루의 이름값으로 지속되는 유사 왕조가 인도의 20세기를 지배한 것이다. 네루의 딸로 총리가 된 인디라 간디는 "짐이 곧 국가(Indira is India)"라고 말한 적도 있다.

2014년 모디의 맞은편에 섰던 이도 라훌 간디였다. 네루의 증손자가 국민회의의 수장이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자 가장 오래 집권했던 국민회의는 추락했다. 추락보다 몰락이 더 어울린다. 44석을 얻는데 그쳤다. 사상 최악의 결과였다. 지방 정당의 수준으로 전락했다. 남인도 타밀 나두 주를 대표하는 정당이 37석이었다. 한 석도 얻지 못한 주가 태반이다. 수도 델리에서도 전패했다. 당의 존립 여부가 의문시되는 지경이다. 20세기가 극적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1952년 체제'를 마감하고, '2014년 체제'가 출범했다.

이 선거 혁명을 주도한 이가 21세기의 신청년들이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나 처음으로 투표한 유권자들이 1억 명에 육박했다. 건국 70여 년, 인도는 '젊은 국가'이다. 청년층의 비율이 매우 높다. 이들이 대거 모디를 선택했다. 국민회의와 더불어 좌파 정당도 몰락했다. 서벵갈 주과 케랄라 주에서 장기 집권했던 인도공산당도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새 유권자들은 20세기형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국민회의의 자충수도 없지 않았다. 모디의 비천한 출신을 공격했다. 기차에서 짜이나 팔던 소년 시절을 부각시켰다. 모디는 정면으로 되받아쳤다. "국민회의 없는 인도를 만들자!"고 선동했다. 청년들이 표로 심판했다.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를, 내부자가 아니라 아웃사이더를 선택했다. 간디와 네루의 명문가 자제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개인을 선택했다. 모디 물결(Modi Wave)이 인도를 휩쓸었다. 신/구간의 대반전이었다.

모디는 기인이다. 완전한 채식주의자이다. 달걀도 먹지 않는다. 금욕주의자이기도 하다. 독신을 고수한다. 유흥과 잡기를 즐기지도 않는다. 잠은 하루에 4시간만 잔다. 휴일도 휴가도 없다. 자투리 시간에는 요가와 명상을 한다. 일하는 시간을 더 생산적이고 효과적으로 보내기 위해서란다. 요기이고 구루이다. '신자유주의적 성자'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연출한다.

소셜 미디어도 능숙하게 활용한다. 파워 트위터리안이다. IT(정보 기술)에 힌두 문명을 결합시켰다. 흡사 '디지털 구루'처럼 보인다. 대중 연설 또한 탁월하다. 여느 정치가와는 다르다. 종교 행사 같다. 수많은 현자와 성자를 인용한다. <베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같은 고전부터 20세기의 스와미 비베카난다(1863~1902년)와 마하트마 간디(1869~1944년)까지 종횡무진 한다.

그래서 열광을 자아내기보다는 경외를 일으킨다. 그의 연설장에는 산문적 열정이 분출하다가도 시적인 고요가 흐른다. 세속적 정치인에 영적인 지도자를 겸비한 것 같다. 역시나 실제로 그런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지지자들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여야의 교체가 아니라 사상의 교체, 정권 교체보다는 시대 교체로 읽히는 까닭이다.

당선 이후 첫 번째 독립기념일 행사가 상징적이다. 무굴 제국의 황궁, 레드 포트 앞에 섰다. 머리에는 주황색과 녹색이 섞인 터번을 둘렀다. 몸에는 하얀색 장의(長衣)를 걸쳤다. 영어는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오로지 힌디어로만 한 시간이 넘는 연설을 대본 없이 소화했다. 그의 연설을 듣고자 델리의 교통지옥을 뚫고 새벽부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그 현장을 TV와 인터넷으로 지켜본 사람들은 새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모디는 단독으로 네루-간디 왕조를 종식시킨 첫 번째 지도자이다. 가난한 하층 카스트 출신으로 국가수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다. 1950년생, 인도가 독립한 이후 태어난 첫 세대 지도자이다. 인도의 정체성이 완연하게 달라지고 있다. '다른 백 년'의 초입에 들어섰다.

▲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 ⓒpublicbroadcasting.net

인도의 발견

국민회의는 대영제국의 산물이다. 1885년에 결성되었다. 초장부터 영국풍이 여실했다. 영국 유학 출신 법률가, 언론인, 관료들이 중심이었다. 초대 의장 앨런 흄(A. O. Hume)은 인도에 사는 영국인이었다. 영어 교육을 받은 엘리트 브라만과 자유주의적 영국 지식인들이 조직한 합작 기구였다. 총독부와도 막역했다.

1910년대 국민회의의 정치화를 촉발시킨 이가 애니 베샌트(Annie Besant) 여사이다. 아일랜드 인이었다. 1917년 콜카타 대회에서 국민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인도를 아일랜드처럼 여겼다. 인도의 정치적 발전도 사회적 진보도 대영제국 아래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녀가 출범시킨 전인도 자치 요구 연맹(All-India Home Rule League)도 아일랜드의 자치 운동을 인도에 이식한 것이었다.

즉, 국민회의(Congress Party)의 목표는 말 그대로 의회(Congress)를 통한 자치였다. 영국식 교양을 몸에 익힌 인도 엘리트들의 정치 참여를 요청한 것이지, 대영제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Independence)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파가 아니라 개량파였다. 중국의 국민당(Nationalist Party)과는 성격을 전혀 달리했다.

변화의 계기는 간디의 귀국이었다. 간디도 1888년, 19살 나이에 고향 구자라트를 떠나 영국에서 유학했다. 1915년에 귀국했으니 근 30년을 해외에서 생활한 셈이다. 특히 남아프리카 체험이 중요했다. 그곳에서 대영제국의 자유주의에 내재한 인종주의를 사무치게 경험한다. '영국 신사'를 흉내 내던 신청년이 '마하트마 간디'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귀국할 무렵에는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사리 차림이었다. 변호사가 아니라 성자를 연출했다. 자치운동 또한 'Home Rule'에서 스와라지(Swaraj)로 전환시켰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풍 사회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간디는 국민회의와 대중운동도 결합시키려 했다. 국민회의의 거점은 콜카타(캘커타), 뭄바이(봄베이), 첸나이(마드라스)등 연안의 식민 도시였다. 이곳에서 국민회의의 주축을 이루는 근대적 지식인들이 배양되었다.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부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까지, 영국의 정통 사상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식민 통치를 대리 수행하는 고급 엘리트, '갈색 영국인'이었다. 이들은 인도의 일반 대중들은 알아먹기 힘든 말을 썼다. 갈수록 기층과 유리되어 갔다.

이 연안 도시들의 외부, 인도의 아대륙으로는 광활한 토착 세계, 민중 세계가 펼쳐졌다. 힌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여전했다. 간디는 이 신/구 사이의 분단 체제를 메우고자 했다. 근대적인 법률 용어나 정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스와라지와 아힘사(비폭력) 등 종교적이고 토착적인 고유어로 소통했다. 소금 행진 등 민중과 더불어 불복종 직접 행동을 펼치기도 했다. 국민회의식 의회 투쟁은 일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8년 간디가 암살됨으로써 고금합작 노선은 단절되고 말았다.

독립 인도의 주역은 단연 네루였다. 카슈미르 주 브라만 출신인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포함해 영국에서만 8년을 공부했다. 네루의 사회주의 또한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계승한 것이었다. 네루 본인도 말년에 스스로를 "인도를 다스린 마지막 영국인"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국민회의에 도전했던 인도공산당 또한 영국 유학파들이 다수였다. 토착파 마오쩌둥이 장악한 중국공산당과는 판이했다. 소련과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을 한 마오와는 달리 인도공산당은 고분했다. 모스크바와 런던의 자장 아래 있는 이중적 종속성을 연출했다. 인도국민회의는 영국 같은 나라를, 인도공산당은 소련 같은 나라를 염원했다.

네루는 종종 간디를 "중세 가톨릭 신자" 같다며 불평했다. 힌두교 마을을 만들자며 물레를 굴리는 간디에 눈살을 찌푸렸다. 네루는 중공업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세속주의를 헌법으로 못 박기도 했다. 그가 집필한 대저 <인도의 발견>을 읽노라면 힌두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쇠퇴를 자명한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종교의 종언과 과학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성이 영성을 대신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소련처럼 종교를 탄압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자연스레 소멸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베다로 돌아가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 신정을 주장하는 무슬림을 애석하게 여겼다. 과거로의 회귀는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시간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네루는 역사의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는 근대의 신도이고 사도였다.

외부에서는 인도를 조금 다르게 보았다. 구좌파들은 네루식 사회주의와 비동맹 외교에 호감을 품었다. 네루가 '발견'했다는 부락 마을과 대가족 중심의 공동체 사회가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일부는 케랄라와 서벵갈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산당 지방 정권에 희망을 투사하기도 했다.

반면 신좌파들은 서구의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오리엔트의 정신주의의 메카로서 인도를 주목했다. 히피들의 유토피아로 인도가 호명되었다. 비틀즈부터 스티브 잡스까지, 영성에 목마른 이들이 인도를 찾았다. 그들이 '발견'한 인도는 역설적으로 진보가 말소된 무역사적, 초역사적 공간이었다. 영국 총독부가 구축한 '고대 인도'의 신성한 이미지가 68 혁명의 전위(counter-culture)와 디지털 문명의 첨단(cyber-culture)에서 고스란히 복제되었다.

▲ 인도 공화국의 날(뭄바이). ⓒ이병한

친밀한 적

인도의 주요 제도들은 1947년 독립하면서 돌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서서히 발전해 온 것이다. 분기점은 직접 통치가 시작되는 1858년이다. 1857년 세포이 대항쟁(혹은 제1차 인도 독립 전쟁)을 계기로 동인도회사에서 영국으로 통치권이 옮아갔다. 1858년 인도 통치법이 처음 제정되었다.

인도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중앙 집권적 지배 아래 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영제국의 전신 무굴 제국은 '소왕국 연합체'에 가까웠다. 중화 제국처럼 말단까지 단일 언어(한문), 단일 사상(유학)으로 통치하는 중앙 집권 체제가 아니었다. 주마다, 마을마다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델리에는 술탄이 자리했지만, 소왕국들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힌두 왕이었다. 대영제국이 구축한 철도와 우편, 전화와 신문 연결망을 통하여 인도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인도인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적었다. 변화의 기폭제는 전쟁이었다.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인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라시아는 공진화했다. 영국 본토에서 노동자, 여성으로 참정권이 확대되어가듯 식민지 인도에서도 정치 참여의 기회가 열려갔다. 본국에서도, 식민지에서도 총력전에 동원하기 위해 최대 다수의 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민의 국민화'가 제국과 식민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델리의 중심가에는 인디아 게이트가 우뚝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인도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희생의 소산이 1919년에 제출된 두 번째 인도 통치법이다. 행정을 중앙과 주로 분리했다. 주에서는 제한 선거를 도입했다. 인도인 엘리트들에게 지방 행정을 맡기기 시작했다. 중앙과 지방의 양두(dyarchy) 정치가 도입됨으로써 인도인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문호가 열린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야인 1935년, 다시 한 번 인도 통치법이 개정된다. 이번에는 중앙에서도 제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영국식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인도에 이양되었다.

독립 이후 건국 헌법은 1950년 1월에 발포되었다. 인도는 이날을 '공화국의 날'로 성대하게 기념한다. 올해 행사는 뭄바이에서 직접 지켜보았다. 공휴일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든 제헌절과는 꽤나 다른 풍경이었다. 헌데 그 헌법의 8할이 1935년 인도 통치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경로 의존성, '식민지 근대성'의 산물이다. 그 후 몇 차례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기본 골자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인도에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즉 '탈식민'보다는 '후기 식민'이론이 등장한 배경이라고 하겠다. 이 역설적 상황을 "친밀한 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독립 이후 인도에서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실시할 수 있었던 것도 식민지 제도를 크게 변경치 않고 계승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는 급진적 개혁 또한 실행하지 않았다. 국민회의의 주요 구성원들이 식민지 시대부터 대두한 중앙의 중간층 및 지방의 농촌 지주 및 부농층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에는 의회제 민주주의가 안성맞춤이었다. 의회 정치야말로 제3세계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던 급진적 혁명을 저지하는 최선의 방편이었다. 친영파 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도는 전후 신생 국가의 핵심 과제였던 토지 개혁에 실패했다. 토지 개혁이 단행되지 못함으로써 기층 사회에서 카스트 제도도 지속되었다. 즉, 신분제에서 민주제로 이행한 것이 아니다. 상층부의 민주제와 하층부의 신분제가 공존하는 형태로 귀착되었다. 그 이중적 사회 구조 아래서 도시에서는 정부 주도의 중공업화 정책인 '사회주의'가 관철되었고, 농촌에서는 '봉건주의'가 역할을 분담했다.

▲ 인디아 게이트(델리). ⓒ이병한

인도의 재발견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1989년), 인도에서는 국민회의가 처음으로 다수당의 지위를 잃었다. '전후 체제의 탈각'이 본격화되었다.

국민회의 지도부들은 어린 시절부터 영어 교육을 받고 영미에서 유학을 한 특권층이었다. 토착파의 근거지는 힌두 사원이었다. 정교 분리를 주장하며 근대화라는 거대 서사를 추진해갔던 국민회의와 달리 가정과 마을, 일상은 여전히 종교적 리듬으로 영위되고 있었다. 탈냉전에 진입하자 政派(정파)보다는 宗派(종파)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소련이 해체되던 해(1991년), 인도는 경제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에 나갈 수 있는 이들이 많아졌다. 흥미로운 역설과 조우한다. 힌두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印橋(인교)들과 접한 것이다. 정작 해외의 인도인들은 종교를 통해서 그들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IT 혁명의 근거지 실리콘밸리에도 힌두 사원이 여럿이었다. 히피와 힌디가 어울렸다. 마치 중국이 사회주의 실험을 하고 있을 때 화교들이 중화 문명을 고수했던 풍경과 유사했다. '문화중국'을 가장 먼저 주창한 이도 '보스턴의 유림' 뚜웨이밍이었다. 인도 또한 재발견(rediscovery)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힌두 문명이 복권(recovery)되기 시작했다. 흡사 20세기의 보수주의가 21세기의 급진주의로 반전하는 모양새였다. 본토에서도 '힌두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인도인민당(BJP)이 약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2014년 총선에서 모디와 BJP에 투표한 인도인들이 모두 힌두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국민회의를 심판하고자 했다. 더 많은 경제 성장과 더 나은 정부를 원했다. 모디가 주지사를 역임했던 구자라트 주는 '인도의 광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두 자리 수 성장을 지속하며 경제적으로 가장 활력 있는 주가 되었다. 모디 개인에 대한 팬덤도 무시할 수 없다. 힌두뜨와(Hindutva)라는 말을 비틀어 모디뜨와(Moditva)라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그럼에도 힌두 민족주의는 단연 화제의 중심이다. 모디 자신부터 세속주의(secularism)를 '수입된 개념'이라고 말한다. 聖(성)과 俗(속),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보편적인 근대화인가 회의를 표하고 있다. 유럽의 세속화를 인도에서도 관철해야하는가 질문하고 있다. 개인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과 인도가 힌두 국가라는 것이 상치되는 원리인가 물음을 던지고 있다.

청년들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secular를 'sickular'로, 'democracy'를 'demoncracy'로 비꼰다. '근대 인도'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의식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독립 이래 인도에서 지금처럼 정체성 논쟁이 치열한 적이 없었다. 흡사 100년 전 중화민국에서 전개되었던 '동서 문화 논전'을 연상시킨다.

인도인민당(BJP)은 민족봉사단(RSS)의 하위 단체이다. RSS가 창립된 것은 1925년이고, BJP가 창당한 것은 1951년이다. 500만 명의 조직원을 자랑하는 RSS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단체이다.

모디의 권력 기반이기도 하다. 아니 모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모디가 RSS의 마을 모임에 처음 나간 것이 8살 때라고 한다. 소년 단원이었다. 그 후 RSS는 그의 삶의 지표이자 나침반이 되었다. 간곡히 결혼을 권하는 부모의 뜻을 어기고 17살에 집을 떠났다. 히말라야부터 인도양까지 아대륙을 방랑했다. 해가 뜨는 벵골 만부터 해가 지는 아라비아 해까지 주유했다.

35년 후 구자라트 주지사가 되면서 얻은 사옥이 그가 평생 가진 첫 번째 집이었다. 그 만큼이나 RSS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 또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파시스트 조직이라며 쏘아보는 눈길이 적지 않다. 사연이 깊고 복잡하다. 간디를 암살했던 힌두교도 나투람 고드세가 바로 RSS 소속이었다.

인도는 대국이다. 13억, 세계 2위의 인구이다. 경제 성장이 가장 빠른 국가이다. 중국을 앞질렀다. GDP로는 세계 7위, 실질 구매력으로는 G2 미국과 중국을 이어 세계 3위이다. 독립 100주년이 되는 2047년이면 인구는 첫째, 경제는 둘째가 될 전망이다. 더 이상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풍요라는 상투적 이미지가 통용되지 않는다.

인도 체류 5개월, "Make in India", "Digital India", "Startup India", "Standup India", "Clean India" 등 각종 구호가 요란하다. 세계사의 주역이라는 자의식도 뚜렷해지고 있다. 규모에 걸 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소명도 강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힌두교 국가라는 정체성도 강화되고 있다. 세계화와 힌두화가 공존한다.

중국만큼이나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킬 것임에 틀림없다. 그 중심에 BJP와 RSS가 자리한다.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