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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박정희' 대신 '누르시'를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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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박정희' 대신 '누르시'를 선택하다

[유라시아 견문] 터키 행진곡 : 100년의 고투

오르한 파묵 : 동과 서

이스탄불에서는 베이오울루(Beyoğlu)에서 지냈다. 살았다고는 못하겠다. 겨우 두 달을 조금 넘겼다. 살려고 했었다. 살아보고 싶었다. 帝都(제도)였던 곳이다. 여러 제국의 수도였다. 이름도 여럿이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을 차례로 거쳤다. 겹겹의 문명이 켜켜이 쌓인 남다른 장소이다.

그 중에서도 베이오울루에 터를 잡은 것은 순전히 오르한 파묵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그의 작품에 흠뻑 빠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보다 <내 이름은 빨강>(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을 더 높이 쳤다. 부러 파묵이 사는 동네에 집을 구한 것이다. 그의 소설 제목을 따서 만든 '순수의 박물관(Masumiyet Müzesi)'까지 5분 남짓 거리였다. 파묵은 '이스탄불의 작가'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스탄불>이라는 회고집도 발간했을 뿐더러, 거개의 작품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토박이라고 여겼다.

아침마다 박물관이 내다보이는 맞은편 2층 카페에서 글을 썼다. 오가는 길에 박물관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지켜볼 수 있었다. 관람객의 7할이 유럽인이다. 2할은 아시아인이다. 터키인과 중동인은 뜨문뜨문하다. 터키에 문학 애호가가 드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아랍 문학과 페르시아 문학의 찬란한 전통이 이스탄불로 흘러들었다.

지금도 시인과 소설가의 낭독회가 열리는 북 카페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어쩐지 세계적인 작가임에도 '국민 작가'는 아닌 듯 했다. 민족 문학보다는 세계 문학 쪽이었다. 그래서 터키는 끝내 브뤼셀(EU)에 입성하지 못했지만, 파묵만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 문학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2006년이었다.

그 안과 밖의 온도차를 예민하게 의식하며, 파묵의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소싯적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기 시작한다. <내 이름은 빨강>부터 동과 서의 구도가 확연하다. 때는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특별 도서를 만들고자 한다. 그 작업을 위임받은 공방의 감독관은 베네치아의 원근법을 활용하여 세밀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서양의 기법을 도입하려는 예술가의 초상이다.

그와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 이슬람 설교사이다. 원근법의 모방을 반대하는 보수파로 묘사된다. 갈등 끝에 화가가 암살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슬람이 수구의 아성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와 비서구의 전근대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도식이 복제되고 있었다. 다만 그 진부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꼼꼼하고 세밀하게 공들인 추리 로맨스의 서사만큼은 가히 노벨상 작가에 값한다고 하겠다. 재독임에도 재미만큼은 대단했다.

원근법은 서구 근대의 산물이 아니다.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원근법이 존재했다. 그리스인부터 이미 원근법을 알았다. 다만 이데아를 궁리하는 플라톤은 사물의 정확한 크기를 오인시키는 원근법에 비판적이었다. 광학을 탐구한 이로는 유클리드도 있다. 같은 물체가 거리에 따라 다른 크기로 보이는 시각 현상을 연구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과학으로 그쳤을 뿐이다. 그 광학을 활용하여 화폭 위에 재현하지는 않았다. 그리스 예술의 본령은 회화가 아니라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 동아시아의 산수화는 어떠했나. 늘 거리감을 표현했다. 아니 당시 오스만 회화를 열람해보아도 원근감은 구현되고 있었다.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세이드 로쿠만이 있다. <톱카프 궁전도>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에서도 입체감을 구현한다. 혹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던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 오스만제국은 '지고의 국가'였다. 비잔틴 세계의 중심 콘스탄티노플과 이슬람 세계의 중심 메카를 모두 거느리며 삼대륙을 통합한 세계 문명의 정점이었다. 베네치아는 이스탄불에 견주면 어촌이고 깡촌이었다. 실제로 <톱카프 궁전도> 또한 르네상스기의 소실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소실점으로의 수렴 없이도 원근감을 표현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유클리드의 광학이야말로 이스탄불에서 베네치아로 흘러갔다. 유클리드를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 이븐 알 하삼이다. 과학과 예술을 망라한 '르네상스 지식인'이었다. 11세기의 인물이었으니 원조라고 하겠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12세기 르네상스"라는 말도 쓴다. 즉, 라틴어가 지배하는 가톨릭 세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던 그리스 고전들을 보존하고 아랍어로 번역하여 계승하던 이들이 무슬림이었다.

지식의 보고였던 바그다드와 카이로와 이스탄불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급의 인물이 수두룩했다. 즉 원근법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보했느냐, 정체했느냐는 더더욱 아니었다. 알아도 취하지 않았을 뿐이다. 원근법의 채용에서 해방감을 느낄 만큼 갑갑하고 답답한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세'라고 불리는 가톨릭 시대는 '신의 눈'이 독점하던 시기였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인간의 눈'을 구현할 수 없는 시대였다. 모든 피조물은 오로지 신의 관점으로 배열되는 것이 올바르다는 세계관이 지배했다. 그 기도하는 손을 자르고 그리스의 다원적 세계관을 복구했으니, '르네상스'라고 할만 했다.

다만 유럽의 이웃에 있던 오스만이 보기에는 전혀 특별난 일이 아니었다. '이슬람의 집'에서 그리스 고전을 널리 읽던 그들로서는 르네상스도 종교 개혁도 계몽주의도 죄다 '오스만화'라고 여겼을 뿐이다. 아랍에서 유럽으로 서천(西遷)한 것이다. 일리가 없지 않다.

▲ <톱카프 궁전도>. ⓒwikipedia.org

<하얀 성>(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이라는 작품도 문제적이다. 여기서는 오스만의 천문학자가 등장한다. 그가 조수로 부리고 있는 이가 이탈리아 학생이다.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다가 해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노예로 팔려온 것이다. 그런데도 다방면의 신지식을 가지고 있다. 오스만의 주인이 되레 유럽의 노예에게 매료된다.

거꾸로 신지식의 가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오스만 궁정의 지배자들에 좌절한다. 도대체 자신은 누구인가, 심각하게 고민한다. '나는 왜 나인가?',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예 학생은 오스만 선생의 고뇌를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여러 방식으로 응답해준다. 그가 건너온 유럽에서는 이미 '자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헛웃음이 났다. 기가 막혔다. 문학 작품에다 사실관계를 적시하며 훈장질하는 것만큼 따분한 짓은 없다. 꼰대 소리 듣기 딱 좋다. 그럼에도 좀체 수긍하기 힘든 서사이다. 작품의 배경은 17세기 중반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출간된 것이 1637년이다. 파묵이 17세기 중엽의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삼은 것 또한 <방법서설>을 의식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 한 권이 나왔다고 해서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뀌지 않는 법이다. 기존의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책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외면당하거나 탄압받기 일쑤이다.

게다가 '내면의 발견'이라는 것 자체도 지극히 서구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지역의 인간도 자기 자신을 사고한다. 다만 그 사고의 지평이 데카르트와는 다른 차원일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회의론이 파격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이 지배하는 가톨릭 세계에서 오래오래(1000년) 살았기 때문이다. 원근법(풍경의 발견)도 회의론(내면의 발견)도 어디까지나 유럽의 맥락에서나 의미를 가진다. 구약과 신약을 뛰어넘었다는 코란을 읽고, 모세와 예수의 모자란 점을 채웠다는 마호메트를 따르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애초 필요 자체가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파묵의 작품에서는 유럽은 종교의 억압에서 해방된 자유롭고 진보한 세계로 등장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이스탄불은 무지몽매하며 후진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철두철미 계몽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집필된 소설이다. 그러하기에 저항감 없이 구미 독자에게 술술 읽혔을 것이다.

전혀 불편하지 않은 작품이다.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 재차 그가 터키 출신임을 강조하자. 서구화에 매진하는 '모범적인 이슬람 국가'였다. 나는 몹시 못마땅했다. 대놓고 여쭙고 싶은 말이 산처럼 쌓여갔다. 인터뷰를 신청하기 위해서 그에 대한 연구서와 논문들을 차곡차곡 모아갔다. 그러나 한여름 돌연한 사태로 결국 성사될 수가 없었다.

케말 파샤 : 조국 근대화

▲ 터키의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1936년). ⓒwikipedia.org
파묵 앞에 파샤가 있었다. 터키공화국을 세운 국부이다. 케말 파샤 없이 터키를 말할 수가 없다. 헌데 그의 고향을 방문할 수가 없었다.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터키가 아니다. 그리스의 북부 지방이 되었다. 그가 태어났던 오스만 말기(1881년), 마케도니아는 오스만 내에서도 굴지의 코즈모폴리턴 도시였다.

고도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기에 인구 통계 또한 정확하게 남아있다. 5만 명의 유대교, 2만6000명의 이슬람교, 1만1000명의 그리스 정교가 함께 살아가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 유대인 또한 이베리아 반도부터 동유럽 출신까지 다양했을 것이다. 무슬림도 투르크, 아르메니아, 보스니아 등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그리스 정교도 불가리아, 알바니아, 세르비아를 망라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오스만제국은 사람을 민족으로 분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의 집'의 밖에서 온 '이교도'들도 7000명이나 있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등, 유럽의 문물 수용에도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전기, 수도, 가스 등 인프라 정비 또한 이스탄불에 못지않았다. 전형적인 '오스만적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파샤의 '정치적 인격'을 형성한 곳은 마을이 아니라 학교였다. 마드라사(이슬람 학교)가 아니다. 사관 학교였다. 군대에서 받은 장교 교육이 결정적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전국 시대였다. 유럽에서는 만국이 만국과 다투고, 유럽 밖에서는 만국이 만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있었다.

파샤는 시대의 본질을 꿰뚫었다. 근대 국가는 군사 국가였다. 전쟁을 군인만 해서도 안 된다고 여겼다. 만인이 군인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곧 '국민'이다. 오스만에서도 신민이 아니라 국민을 창출해야 했다. 국민을 만들고 지도하는 것이 군인의 책무였다. 더 이상 아랍어로 코란을 읽지 않기로 했다.

프랑스어를 익혀 그쪽에서 연구한 이슬람 문명을 학습했다. 마호메트가 히스테리 환자였을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연구에 밑줄을 그었다. 독일의 통속적 유물론에도 심취했다. 그가 청년시절 쓴 글들을 읽노라니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가 연상되었다. 민족의 노예 근성을 타파하는 터키판 '조국 근대화'를 열렬히 염원했다.

'전쟁의 집' 유럽에서 기어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이웃 오스만제국도 말려들었다. 칼리프는 지하드를 선언하며 참전했다. '이슬람의 집'으로 개조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때는 '1335년'이 아니라 '1914년'이었다. 유럽의 힘이 절정이었다. 민족주의가 대세였다. 칼리프의 선언에 아랍인부터 (영국의 지원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오스만의 반대편에 섬으로써 '민족 해방'의 기회를 엿본 것이다. 식민지 인도의 펀자브 무슬림도 영국군에 포함되어 오스만제국에 맞섰다. 무슬림과 무슬림이 대결하는 살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1918년 10월, 결국 오스만제국은 항복한다. 지하드가 실패했다. '이슬람의 집'이 '전쟁의 집'에 패배했다.

마침 미국과 소련에서는 윌슨과 레닌이 경쟁적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옹호했다. 동유라시아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고, 반식민지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분출했다. 신청년이 출현한 것이다. 보조를 맞추어 서유라시아에서도 '청년 투르크'가 기세를 올렸다. 그 기수가 바로 케말 파샤였다.

1920년 4월 앙카라에서 대국민회의를 소집하고 5월에 혁명 정부를 수립한다. 1917년 레닌이 러시아제국의 차르를 내몰고 소련을 출범시킨 것처럼, 파샤 또한 오스만제국을 뒤엎고 터키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스탄불의 칼리프를 향하여 '독립 전쟁'을 선포한다. 시세는 그의 편이었다.

제국에서 국가로, 문명주의에서 민족주의로, 그 유명한 '터키 행진곡'을 배경으로 삼아 1923년 터키공화국이 출범한다. 경쾌한 리듬의 터키 행진곡이 장엄하고 웅숭깊은 아잔을 누른 것이다. 이듬해(1924년) 오스만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무굴제국, 대청제국, 러시아제국에 이은 유라시아형 제국의 최후였다.

'조국 근대화'의 요체는 둘이었다. 세속주의와 민족주의다. 세속화는 이슬람을 겨냥했고, 민족주의는 오스만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슬람이 초래한 '원시적 사회'에서 탈피하여 선진적인 유럽 문명으로 이끌고자 했다. 이 역설적인 전도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가 다대했다. 이슬람에는 애초 교회라는 것이 없다. 교황도 없고, 교황청도 없다. 알라와 신도가 직접 만난다. 개신교의 성격을 일찍 이룬 것이다.

그래서 교권에 맞서 국권을 옹호하는 세속의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교황으로부터 군주의 독립이라는, 교회로부터 개인의 독립이라는 세속화가 애당초 생겨날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세속화=근대화를 흉내 내노라니 이슬람 자체가 표적이 되고 말았다. 남을 따라한답시고 제 발등을 찍은 꼴이다.

파샤는 마드라사부터 폐쇄시켰다. 이슬람법(샤리아)에 의해 사회를 유지하던 법정도 폐지시켰다. 민법은 스위스에서, 형법은 이탈리아에서 따왔다. 교육과 사법을 통하여 공적 역할을 수행하던 울라마의 사회 참여 기회를 박탈시킨 것이다. 무슬림이 영성을 갈고 닦았던 수행장도 폐쇄했다.

절을 해야 하는 모스크에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긴 의자를 배치한 곳까지 생겨났다. 남성들이 쓰던 터번과 여성들이 쓰던 히잡도 벗겼다. 아름다움을 가리지 말고 드러내는 것이 권장되었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미스 터키 선발 대회(1929년)이다. 여성 '해방'의 일환이었다. 음주 또한 합법화되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어디서나 '자유'롭게 술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었다.

1925년부터는 서력을 채용했고, 1928년부터는 아랍어 대신 알파벳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매일 다섯 차례 예배 시간을 알리는 아잔 또한 아랍어가 아니라 터키어로 바꾸었다. 금요 예배가 열리는 금요일이 아니라 기독교의 휴일인 일요일에 쉬기 시작한 것은 1935년이다. 공공 장소에서 '알라는 위대하다'고만 말해도 감옥에 잡혀가는 '압축 근대화'의 시절이었다.

이슬람을 지우면서 채워간 것이 투르크 민족주의였다. 오스만 시절 '투르크인'이라는 말은 촌놈이란 어감의 멸시어였다. 세련된 오스만 문화를 향유하지 못한 촌뜨기를 지칭했다. 그러나 1000년 전 투르크가 이슬람을 받아들여 이슬람이 세계 최고의 문명을 구가했던 것처럼, 이제는 유럽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서구 문명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투르크의 참여로 서구 문명은 기독교 세계의 협애한 틀을 넘어서 진정한 국제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투르크 민족주의의 고취에는 언어학, 역사학, 인류학, 정치학 등 각종 학문이 동원되었다. 1925년 <이슬람과 통치의 원리>가 출간되었다. 1000년 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져온 이슬람법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측면을 전면 부정한 책이다. 오로지 정신적 종교로서만 이슬람을 규정했다. 성과 속을 분리시킨, 혼백의 분단 체제를 입안한 첫 저서였다.

서구화와 투르크 민족주의를 '조화'시키자는 국책 담론도 입안되었다. 한쪽에서는 투르크족이 본디 백인종에 가깝다는 학설이 등장했고, 다른 쪽에서는 흉노부터 칭기즈칸까지 유라시아 유목 민족을 죄다 '투르크 사(史)'로 재해석하는 고대사 '빠'도 생겨났다. 반면 비투루크적 요소들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아나톨리아에서 수백 년을 살았던 그리스 정교도는 추방되었다. 터키어를 모어로 삼는 정교회 신자들이 자그마치 100만 명이나 그리스로 쫓겨났다.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 또한 '터키 공화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학살과 탄압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도 파샤는 의기양양했다. 1930년대 유럽의 정세 변화 또한 그의 편인 듯했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가,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등장했다. 파샤는 자신과 동급의 인물들이 유럽에서도 약진하고 있다고 여겼다. 1934년 터키 의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Atatürk)'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수여한다.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명실상부 國父(국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1938년이다. 그가 선망해마지 않았던 유럽이 재차 '전쟁의 집'으로 빠져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목도하지는 못했다. 마케도니아에도 묻힐 수가 없었다. 그곳은 더 이상 '순수한 터키의 땅'이 아니었다.

서방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아타튀르크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은 1950년대이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다. 터키는 신속하게 파병을 결정했다. 국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세계의 편에 섰다. 이로써 나토(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마침내 미국이 주도하고 유럽이 따르는 '歐美(구미)'의 일원이 것이다. 소련의 턱 밑에 자리하는 척후병이자 중동 개입의 대리인이 된 것이다. 터키 행진곡이 널리 울려 펴졌다.

사이드 누르시 : <빛의 책>

▲ 사이드 누르시(1877~1960년)의 초상화. ⓒwikipedia.org
아타튀르크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인물이 있었다. 사이드 누르시(Said Nursî)이다. 파샤보다 조금 일찍 태어나서(1877년) 훨씬 오래 살다 갔다(1960년). 파샤는 1924년 칼리프를 폐지시키고 종교국을 총리 산하의 부처로 만들었다. 수구파의 아성이자 반동파의 소굴이기 십상인 이슬람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자 한 것이다.

울라마를 공무원으로 편입시키는 '근대적인 정교일치' 체제였다. 이 자리의 수장을 맡아달라고 타진한 것이 누르시였다. 오스만 시절부터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이슬람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칼에 거절한다. 누르시는 칼리프 폐지에 결연하게 반대했다. 1400년 이슬람 문명의 기축이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대의를 표방하며 터키공화국에 저항한 것이다. 이에 파샤는 '쿠르드족의 반동'이라며 탄압했다. 누르시는 쿠르드 출신이었다. '이슬람의 집'이 사라지자마자 그의 출신 성분이 주홍글씨가 된 것이다. 쿠르드족에 대한 강력한 동화 정책과 이주 정책이 실시되었다. 누르시 또한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누르시가 태어난 곳은 아나톨리아의 동편이다. 역시나 인구 구성이 다채로운 지역이었다. 무슬림이 25만, 아르메니아교가 13만, 기독교가 1만, 동방 정교회가 1만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자랐다. 마드라사에 들어간 것은 9살 때였다. 원체 가학의 바탕이 탄탄했다. 아버지가 정통 이슬람학의 대가였다. 불과 5년 만에 마드라사의 전 과정을 이수해 버린다. 당시만 해도 마드라사 네트워크가 오스만의 민간 사회를 실핏줄처럼 연결하고 있었다.

누르시는 전국의 수행장을 주유하며 실력을 더 쌓아갔다. 신학 논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를 도처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기억력도 비상했다. 코란 암송은 물론이요, 이슬람 문명사를 수놓은 주요 학자들의 저작까지 술술 외웠다. 그의 출중함에 감탄한 한 울라마로부터 '시대의 경이'라는 호를 얻게 된 것이 15살 때이다. 특출한 인물이었다.

결국 동아나톨리아의 주지사가 그를 부른다. 발탁하여 등용하려 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울라마가 도통(道通)을 쥐는 학자-관료 체제였기 때문이다. 관저에서 살게 된 누르시는 오스만제국이 구축한 도서관의 혜택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표준어로서의 '오스만어'도 그곳에서 익혔다.

그 오스만어를 통하여 마드라사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유럽의 과학 지식들을 습득해간다. 그러고는 오스만제국이 채용해야 하는 독자적인 대학 교육 계획을 입안한다. 과학과 이슬람이 결합하는 대학 설립을 궁리한 것이다. 이름은 '광명(光明)학원(Medresetuz-zehra)'이라고 지었다. 궁정에 출입하는 울라마들에게 과학 교육을 접목하여 오스만 조정 자체를 대학처럼 만들고자 했다. 이스탄불에 입성하여 칼리프에게 직접 상소를 올린 것이 1907년, 30살 때이다. 오스만 말기를 대표하는 교육 개혁가였다.

당시 이스탄불에서는 '청년 투르크'가 활약하고 있었다. 누르시는 비판적이었다. 무슬림 통일위원회에서 발간하는 <화산>이라는 잡지에 정력적으로 투고하며 '동서 문화 논쟁'을 펼쳐간다. 일체의 근대화에 저항했던 것이 아니다. 입헌정 수립에는 십분 동의했다. 다만 '세속화'만큼은 결연히 반대했다.

물질 개벽은 백번 수긍하지만, 정신 개벽을 방기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했다. 유물론에 취하여 세속주의 일방으로 흐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기, 전쟁 포로가 되어 러시아에서 2년간 복역한 적이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현지에서 지켜보았다. 1918년 결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누르시는 무신론의 공산주의 국가를 끔찍하게 여겼다. 과학과 이성, 이념만으로 출현한 나라가 100년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스탄불로 돌아온 그는 울라마 개혁 위원회에 참여하여 필사적으로 오스만을 구하고자 했다. 레닌과 소련에서 영감을 얻은 파샤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도리어 이성의 단련과 과학의 발전이 유럽만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스만 600년, 이슬람 1000년을 통해 상시적으로 일어나던 일이다.

이스탄불이야말로 이성과 과학이 꽃피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즉, 그가 고안했던 '광명학원' 또한 평지돌출이 아니라고 했다. 오스만적 근대화의 응축이었다. 이슬람 세계의 정수인 오스만제국을 각성시킴으로써 이슬람 문명을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유럽의 법체계 도입에 반대하지 않되, 이슬람법의 폐지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 년간 수천 수만의 울라마들이 갈고 닦은 샤리아의 대해(大海)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국법이라면 한계가 분명하다는 입장이었다. 방점은 완미하고 완숙한 이슬람법의 확립에 찍혀 있었다.

그러나 1923년 터키공화국이 들어서고 '조국 근대화'가 펼쳐지면서 누르시의 '오스만몽'은 기각되고 만다. 도리어 반동파의 수괴가 될 수 있는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았다. 감옥에서 복역하는 시간이 많았고, 출소하더라도 유배와 연금 생활이 이어졌다. 일체의 공적 활동이 봉쇄된 것이다.

그에게 허용된 것은 오로지 펜과 종이 뿐이었다. 저술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이슬람을 근대적인 삶에 부합하도록 갱신함으로써 코란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고전임을 전 세계에 증명하겠노라 선언하며 집필에 전념한다. 그 필생의 집념으로 완성한 역작이 6000쪽의 대작 <빛의 책(Risale-i Nur)>이다.

허나 새 책이 아니다. 코란을 주석한 책이다. 고전을 새롭게 읽어낸 책이다. 온고지신, 법고창신을 실천한 책이다. 다만 저술의 방향이 달라졌다. 더 이상 세속주의 엘리트들을 향해 발언하지 않았다. 토착 민중들을 향해 발화했다. 기층에 뿌리내림으로써 사상적 만개를 이룬 것이다.

세속 국가가 이슬람을 탄압해준 덕분에, 이슬람은 더더욱 하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슬람의 민중화, 이슬람의 민주화, 이슬람의 근대화를 촉진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구적 세속주의도 아니요,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다. 개신(改新) 이슬람이자, 민중 신학이었다. 말씀을 통한 지하드를 실천하고, 선의와 선업을 베푸는 행동주의를 고취했다.

<빛의 책>은 알음알음 전파되었다.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아래 출판과 복사는 불가능했다. 검열을 피하는 길은 필사뿐이었다. 6000쪽의 책을 필사하고 또 필사함으로써 마을에서 마을로, 이웃에서 이웃으로 퍼져갔다. 그 책을 함께 읽는 강독회와 학습회도 만들어졌다. 세속주의를 가르치는 근대적 학교도 아니고, 이슬람을 고수하는 마드라스도 아닌 민간 교육 기관이 자발적으로 솟아난 것이다.

누르시가 꿈꾸었던 '광명학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이슬람과 과학의 조화와 통섭을 모색했다. 이성과 영성의 공진화를 도모했다. 물질 개벽과 정신 개벽을 동시에 이루고자 했다. 이슬람을 몸에 익힌 과학자와 기술자, 정치가와 사업가를 양성코자 했다. 근대적인 이슬람 사회를 만들어가는 훈련장이자 실험장이 된 것이다. '경건한 시민'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0년대 복수 정당을 허가하는 자유화 조치가 단행되자마자 '이슬람의 부활'이 일어났다. 이슬람 정당이 약진했다. 모스크 건설이 급증하고 이슬람 설교사를 양성하는 학교도 재차 문을 열었다. 아잔 역시도 아랍어로 되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슬람의 가치를 강조하는 지식인들도 공론장에서 발언 기회를 얻어갔다.

자유와 평등보다는 '공정'(公正)을 내세웠다. 공명정대야말로 이슬람의 핵심 가치라고 했다. 공정함을 무기로 삼아 일방적인 세속화, 기울어진 운동장을 교정하려 들었다.

▲ 사이드 누르시 전집 광고. ⓒwikipedia.org

군부는 긴장했다. '조국 근대화' 30년에도 기층 사회는 압도적으로 이슬람의 영향이 지대했다. 민주주의가 지속되어서는 아타튀르크의 이상이 실현될 수가 없었다. 세속주의 공화국의 근간을 사수하는 최후의 보루가 군부였다. 재차 '진보'를 위해서 정치에 개입한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 1960년이다.

공교롭게도 누르시가 숨을 거둔 해가 1960년이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인들은 누르시를 부관 참시했다. 그의 묘소를 파헤쳐 시신을 옮겨버렸다. 성소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세속화라는 금과옥조의 國是(국시)를 지켜내기 위하여 불경한 짓을 마다치 않은 것이다. 사법부와 합작하여 이슬람 정당을 해산시키고 주요 지도자들은 '공화국의 적'으로 숙청했다. 이에 대학과 언론에 근무하는 '자유주의' 도시인들은 환영했다. 반동파의 소굴인 모스크에서도 사회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라는 행정 명령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터키 현대사의 방향은 갈수록 누르시의 쪽으로 흘러갔다. 민주화가 되면 될수록 재이슬람화가 역력해져갔다. 아니 이슬람파야말로 군사 독재에 맞서는 민주 세력의 선봉대가 되었다. 기어이 새 천년에는 이슬람주의 정당이 정권 교체를 이루고 여당이 된다. 안정 과반석을 유지하며 15년째 집권하고 있다. <빛의 책>이 뒤늦게 광명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르시를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로 페툴라 굴렌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꼽을 수 있다. 굴렌은 민간 사회에서 이슬람 시민 운동을 만개시켰고, 에르도안은 '공정발전당'을 발족시켜 정치 권력을 움켜쥐었다. 새천년 터키에서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반전의 물결, 재이슬람화와 신오스만주의의 풍경은 다음 주에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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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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