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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에도 '분단 국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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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에도 '분단 국가'가 있다

[유라시아 견문] 키프로스 : 지중해의 분단 국가

지중해와 해중지

유라시아 견문 2년차, 처음으로 배를 탔다. 바다를 건넜다. 地中海(지중해)였다.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이다. 아랍과 유럽이 마주본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가 연결된다. 海中地(해중지), 물 사이에 뭍도 있다. 섬이 점처럼 흩어졌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로 큰 섬이 키프로스이다. 지중해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터키 남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70킬로미터 거리이다. 동쪽으로 100킬로미터를 더 가면 시리아와 레바논이다. 남쪽으로 390킬로미터를 가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서쪽으로 530킬로미터를 가면 그리스의 아테네에 닿는다. 이 해중지에 80만 인구가 살아간다.

아름다운 섬이다. 인기 있는 휴양지이다. 영국에서, 독일에서, 러시아에서, 스칸디나비아에서 매년 수백만의 관광객이 키프로스를 찾는다. 푸른 하늘과 파란 해변, 신선한 해산물과 낭만적인 밤 문화까지 다채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은퇴 이민의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다. 먹고 마시는 재미로만 그치지도 않는다. 인문 역사의 흔적 또한 각별하다. 내륙의 바람이 섬까지 미쳤다. 여러 제국들의 입김이 닿았다.

그리스에 속한 적도 있고, 페니키아가 지배하던 적도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일부였던 적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도 키프로스를 정복했다. 이집트 다음으로는 로마제국이 흥했다. 비잔틴제국에도 속해 있었다. 지중해의 동서남북, 헬레니즘 세계의 연결망과 친근했다.

반면 아랍과는 뜸했다. 이슬람이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후에도 아랍의 바람은 크게 불지 않았다. 키프로스에 이슬람을 전파한 이들은 아랍인이 아니라 투르크족이었다. 오스만제국으로 편입된 것이 1571년이다. 유라시아 초원의 떠돌이가 지중해 섬마을의 아가씨와 눈이 맞아 토박이가 되었다. 300년 오스만의 지붕 아래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슬람의 집' 아래 동방정교회 신자들도 생활 세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해방'의 측면마저 없지 않았다. 사사건건 통제하려던 바티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이스탄불의 칼리프는 현지의 자율성을 허락했다. 세금을 내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주민들의 종교 생활에 개입하지 않았다. 禮(예)를 갖추는 한 德(덕)을 베풀었던 것이다. 모름지기 신앙은 개인의 자유였다. 교황이 교회를, 교회가 개인을 간섭하지 않았다.

나아가 정교회 종사자들이 제국의 운영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술탄과 정교회 주민 간 매개 역할을 맡은 것이다. 즉, 키프로스 교회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정교회 주민의 대표가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 말랑말랑한 시스템 속에서 무슬림과 정교회 또한 별 일 없이, 별 탈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300년을 더불어 살았다. 은은한 교회의 종소리와 잔잔한 모스크의 아잔 소리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러나 2016년 현재, 키프로스는 분단된 섬이다. 남부의 3분의 2는 키프로스공화국이며, 북부의 3분의 1은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이다. 1974년 남북으로 갈라졌다. 40년이 넘도록 분단 체제가 작동한다. 누가 북조선과 남한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고 했던가. 이 조그마한 섬에도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 섬의 한복판에 자리한 수도 니코시아(터키어로는 레프코샤) 또한 한때의 베를린처럼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섬의 중간에 그어진 그린 라인은 양국의 국경선 역할을 한다. 도시와 섬을 가르는 분단선에는 유엔(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다.

키프로스 남북 분단의 기원을 1974년에서 구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한반도의 분단이 1948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님과 매한가지다. 20세기 초 중화 세계의 해체와 식민지 전락과 불가분이다. 키프로스 역시 '이슬람의 집'이 붕괴되어 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600년 오스만제국이 30여 개 인공 국가로 쪼개어져갔던 지난 100년을 통으로 살펴야 한다. 서아시아 대분열 체제의 모순이 키프로스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1878년이 병통이다. 영국이 접근했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이 지중해를 삼켰다.

▲ 북키프로스의 휴양지. ⓒ이병한

악순환 :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오스만제국 최초의 독립국이 그리스이다. 1832년에 떨어져 나간다. '이슬람의 집'이라는 커다란 지붕을 부수고 국민 국가라는 작은 집을 구했다. 새 집의 범위가 애매했다. 에게 해와 지중해의 무수한 섬들의 귀속이 결정되지 않았다.

크레타 섬이 그리스 령이 된 것도 1913년에 이르러서이다. 지중해를 영해(領海)로 쪼개어 가는데, 근 100년이 걸린 것이다. 크레타가 그리스로 낙착되면서 불똥이 튄 것은 무슬림 주민이다. 크레타에서 대대손손 살았던 이슬람교도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섬 인구의 절반이나 되었다. 실향민이 되어 생면부지의 땅, 아나톨리아로 강제 이주했다.

그리스를 본받은 것은 발칸 반도이다. 여기서도 민족주의가 유행했다. 오스만제국에서 벗어나 각자의 국가를 만들기를 염원했다. 분리 독립의 기운이 지펴지자 호기로 삼은 것은 러시아제국이다. 발칸의 정교회와 슬라브인을 음양으로 지원하며 흑해와 지중해로 남하했다.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제국이 서유라시아의 쟁패를 두고 19세기 내내 충돌한 것이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한 나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등이 있다. 이들 동유럽과 남유럽 국가들을 사회주의라는 단일 이념 아래 통합하여 새로운 '지고의 국가'로 등장한 것이 20세기의 소련이었다. 모스크바는 20세기의 이스탄불이었다. 유라시아의 帝都(제도)였다.

다급해진 것은 대영제국이다. 그리스의 분리 독립을 기폭제로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 오스만의 영토를 앗아가려던 기획에 차질을 빚었다. 애초에 그리스가 독립할 수 있었던 것도 영국의 지원 탓이었다. 마치 일본이 조선을 대청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켜준 것과 흡사했다.

러시아의 남하에 돌연 전략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다. 더 이상 오스만제국이 약화되는 것은 곤란했다. 오스만이 러시아를 저지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오스만의 '중앙 집권화' 정책을 독려하고 훈수했다. 병을 주고, 약도 준 것이다.

그 전략의 연장선에서 키프로스를 점령한 것이 1878년이다. 아나톨리아와 아라비아로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유효한 장소였다. 최대 식민지 인도와 연결되는 수에즈 운하의 안전을 확보하기에도 요긴한 위치였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점령이라 했다.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면 오스만에 되돌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가짐이 다른 법이다. 100년이나 눌러앉았다.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확실해지면서 키프로스 주민들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수였던 정교회 신자들은 그리스와의 통일을 원했다. 이른바 에노시스(Enosis) 운동이 일어난다. 에노시스 운동은 키프로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에 널리 퍼져 있던 정교회 신자들 모두가 '故土(고토)'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그리스인들의 '해방'과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마케도니아부터 흑해까지 에노시스의 물결이 일었다. 일부는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로 되돌리자는 야심(Megali Idea)까지 품었다. 여기에 맞서 아나톨리아를 수호해낸 인물이 터키공화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이다. 그는 그리스 민족주의에 잠식당하고 있는 오스만제국을 보다 못해 터키공화국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오스만에서 분기해 나온 그리스와 터키는 철전지 원수, 적성국이 되었다.

키프로스 주민들이 에노시스 운동에 열성이었던 것은 그리스와의 통일이라면 영국이 지원해주리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말기 탄압이 극심했다. 그리스의 분리 독립 이래 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그리스 반란자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이스탄불의 총주교와 통역관 등을 처형했다. 키프로스의 대주교와 지도자들도 숙청을 면치 못했다.

그리스가 촉발한 민족주의의 물결에 맞서 오스만제국도 '제국주의화'된 것이다. 말캉말캉한 제국이기를 그치고, 딱딱하고 단단한 근대 국가가 되어갔다. 하지만 대영제국 또한 본색을 드러냈다. 에노시스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배신감에 분노한 키프로스 주민들은 식민 정부 청사에 불을 질렀다. 영국 또한 강경 대응했다. 그리스 국기 게양을 금지시켰다. 일체의 정당 활동도 못하게 했다. 언론 검열도 대폭 강화했다. 주민들은 '영국군'으로 징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탈식민주의가 대세가 되었음에도 영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개한 주민들은 독자적인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다. 정교회 신자의 96%가 그리스와의 통일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수긍하지 않았다. 마치 남중국해의 홍콩을 식민지로 유지했던 것처럼, 동지중해의 교두보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연방, 유라시아의 적색화를 저지하는 냉전의 보루로 홍콩과 키프로스를 고수했던 것이다. 정교회 신자들 가운데 급진파를 중심으로 '민족해방전쟁'이 닻을 올렸다.

복병은 에노시스 운동에 위협을 느낀 주민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무슬림이다. 이들로서는 그리스와의 통일이야말로 위협적이었다. 딱딱한 근대 국가 속에서 소수자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분할되거나, 터키와의 통일이 나은 방안이었다. 에노시스와는 반대 방향으로 탁심(Taksim) 운동을 펼쳤다. 정교회 신도와 이슬람교도 간 분열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 또한 영국의 흑심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식민지 편입 이래 특유의 분할 통치를 가동시켰다. 키프로스 전체를 아우르는 교육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학교를 갈랐다. 정교도들에게는 그리스에서 공수 받은 교과서로 가르쳤다. 본토의 표준어 교육이 도입되고 그리스의 역사를 공부했다.

무슬림들은 터키의 교과서로 국어와 국사를 익혔다. 보편 종교에 기반을 둔 전통적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그리스인'과 '터키인'이라는 근대인으로 개조시킨 것이다. 그리스 민족주의와 터키 민족주의를 별도로 주입함으로써 영국의 제국주의가 작동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이 키프로스에 머물렀던 100여 년, 양 집단의 분화는 심화되었다. 더 이상 안부를 주고받지 않았다. 1960년 유니온 잭이 내려가자,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1947년의 남아시아, 영국이 떠난 자리 인도와 파키스탄도 분단되었다.

▲ 남키프로스 수도 니코시아. ⓒ이병한

해방, 내전, 분단

1960년 8월 16일, 키프로스공화국 깃발이 올라갔다. 그리스와의 통일을 꿈꾸었던 44만의 그리스계 주민에게는 못마땅한 국기였다. 10만의 터키계 주민들에게도 미심쩍은 깃발이었다.

인공 국가의 등장에 권력 배분도 인위적이었다. 대통령은 그리스계, 부통령은 터키계가 맡았다. 장관직 열자리도 7:3으로 나누었다. 요직인 국방, 외교, 재무 가운데 한 자리는 터키계에 할당키로 했다. 국회의원 비율도 7:3으로 뽑기로 했다. 군대만은 6:4로 낙착되었다. 정부 청사의 풍경은 기묘했다. 一國三旗(일국삼기), 키프로스공화국의 깃발 좌우로 그리스 국기와 터키 국기가 나란히 휘날렸다. 터키와 그리스의 공휴일은 키프로스의 휴일이기도 했다.

이슬람 명절마다 쉬어야 하는 그리스계 주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스와의 통일도 불발되었을 뿐더러, 7:3의 권력 배분도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인구 비율을 따르자면 8:2가 합당했다. 씁쓸한 좌절감을 맛본 것이다. 터키계 주민들의 불만은 그나마 덜했다. 그리스로의 흡수 합병은 피했으니 차선책은 되었다. 하더라도 불안감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키프로스공화국에 대한 애착심이 크지 않았다. 양쪽 모두에게서 충성심을 확보하지 못한 신생 국가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는 애초 어려웠다. 위태로운 출발이었다.

작위적인 권력 배분이 생활 세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무슬림과 정교회가 혼거하던 마을까지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국회의원 선거야말로 복병이었다. 잠복하던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기제였다. 기어이 1963년 사달이 난다. 주민 간 다툼이 내전으로 치달았다. 해를 넘겨서까지 상호 폭력이 지속되었다. 유엔군까지 파견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터키계 관료들은 일괄 사퇴했다. 헌정 체제가 사실상 붕괴한 것이다. 남과 북으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시작되었다. 터키계는 월북했고, 그리스계는 월남했다. 공간적 동질화가 심화됨으로써, 양 집단 간 격리는 더욱 심화되었다. 한 지붕, 딴 가족이었다. 1967년, 1969년, 선거철만 되면 대규모 충돌이 이어졌다.

지중해의 섬, 중차대한 변화가 내륙에서 일어났다. 1974년 7월 15일, 그리스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 68 혁명 이래 좌경화가 심해지는 내정을 수습한답시고 극우파 군부가 준동한 것이다. 이들은 열렬한 그리스 민족주의자, 즉 에노시스 운동파이기도 했다. 내부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서라도 키프로스 병합이라는 대외적 메시지를 크게 떠들었다.

키프로스의 통일론자들 또한 신속하게 합세했다. 양 세력이 단합하여 키프로스의 대통령궁을 공격한 것이다. 초대 대통령이자 정교회 주교였던 마카리오스는 비동맹노선을 고수하는 중도 좌파적 인물이었다. 키프로스가 그리스와 통일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편입되면 냉전의 최전선이 될 것이라며, 독립국가 유지를 위해 혼신을 다했던 사람이다. NATO 가입에 끝끝내 반대했기에, 서방에서는 '지중해의 카스트로'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스 신군부의 파상공세 끝에 그는 결국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키프로스의 실권자는 그리스의 꼭두각시가 맡게 되었다. 통일은 시간문제인 듯 했다.

이에 터키 군이 전격적으로 전면적으로 개입한다. 한국 전쟁 이래 터키 군대의 두 번째 해외 파병 장소가 키프로스였다. 7월 20일 오전 6시, 터키 전투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낙하산 부대와 특공대도 투입되었다. 투르크/돌궐의 후예인 터키군은 NATO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강군이다. 지금도 세계 10대 군사 강국을 자랑한다.

작전 수행 이틀 만에 북부를 장악한다. 내륙의 터키 국민들은 열광했다. 키프로스의 전황 변화는 곧바로 그리스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군부 정권이 조기에 붕괴한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달았던 아테네와 앙카라 간의 전면 대결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스-터키 전쟁은 무마된 대신에, 키프로스는 남북 분단이 고착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NATO 동맹국인 터키-그리스 간 전쟁이 발발한다면, 소련의 위세가 더욱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4년 7월에 대한 역사 해석은 극명하게 갈린다. 남부의 키프로스공화국은 터키의 침공으로 간주한다. 외세의 내정 간섭이라 한다. 반면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은 그리스의 강제 합병을 좌초시키고 터키계 주민들을 보호한 평화 작전이라고 부른다. 확실한 것은 터키군의 출격으로 남북 간 세력 균형이 재정초되었다는 점이다.

영토의 36%를 북부가 차지하게 되었다. 상업과 산업, 교통의 요충지까지 점령했다. 터키는 아나톨리아 주민들을 북키프로스로 이주시키는 이식 사업도 펼쳤다. 독립 당시 18%에 그쳤던 터키계 주민들의 비율을 35%까지 불린 것이다. 이에 힘입어 북키프로스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 1983년 11월 15일이다. 1832년 그리스 독립, 1923년 터키 독립, 1960년 키프로스 독립에 이은 4번째 독립 국가의 출현이었다. 포스트-오스만, 동지중해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 키프로스 섬 지도. ⓒgoogle.com

복합 국가?

키프로스공화국의 똑똑한 친구들은 아테네로 유학 간다. 월드컵 경기가 열리면 그리스를 응원한다. TV도 그리스 방송을 즐겨 시청한다. 언어, 문화, 종교 등 그리스와 여전히 긴밀하다. 그런데도 에노시스 운동은 부쩍 잦아들었다. 1974년의 경험 탓이다. 통일보다는 강제 병합에 가까웠다. 지금은 '키프로스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다. 더 이상 크레타처럼 그리스의 일개 섬으로 강등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와의 통일을 마다한 탓에 북부와의 분단 체제를 돌파하는 여지도 생겼다. 2003년 4월 23일, 역사적인 이벤트가 열린다. 분단 이래 최초로 상호 방문을 허가한 것이다. 첫날에만 5000명이 북부를 여행했다. 4월 28일 부활절에는 1만5000명이 북부를 방문했다. 북부의 정교회 유적지를 순례하고, 고향을 방문해 친지와 옛 이웃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불과 2주 사이에 20만 명이 남북의 분단선을 월경했다. 자그마치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숫자이다.

2015년 또 한 번의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재)통일을 정책으로 삼는 후보가 북키프로스의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세계에서 오로지 터키만이 인정하는 분단 국가 상태를 중지하자고 했다. 분단으로 말미암아 터키에의 종속이 심해진 것이다. 남북 회담이 곧장 재개되었다. 통일 방안도 분출하고 있다.

북부는 기존의 분단 국가를 완전히 청산하는 연방제 국가 수립을 주장한다. 남부의 키프로스공화국에 흡수되는 것이 아닌 별도의 새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남부는 보류 중이다. 연방제 국가는 재차 분리 독립의 여지를 남긴다고 여긴다. 연방제는 임시응변이고, 궁극적으로는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처럼 분리 독립을 노린다는 의구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거주 이전의 자유에 대해서도 이견이다. 남부는 전면 허용을 주장한다. 북부는 일정한 제한을 요구한다. 여전히 그리스계 인구가 더 많다. 이들이 옛 고향으로 월북하면 북부의 속성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다. 터키계 주민 공동체의 흡수, 소멸을 염려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남북이 합의할 수 있는 차선책으로 연방 국가(Federation)보다는 국가 연합(Confederation)이 유력해 보인다. 외교와 국방 등 중앙 정부의 기능을 최소화하고, 남북 정부가 고도의 자율성을 갖는 일국양제 복합 국가의 실험이다. 재통합은 넉넉하고 너그러운 대통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재통일의 궤도에 들어설수록 1878년 이전에 대한 역사 또한 환기될 것이다. 그리스계와 터키계로 나뉘어 아웅다웅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무슬림과 정교도가 이웃사촌으로 지냈던 세월이다. 유럽형 국민 국가의 속지주의가 아니라 '이슬람의 집'의 속인주의가 작동했다. 영토보다는 사람을 중시했다. 땅을 중시하기보다는 사람을 모시고 섬겼다. 그래서 이질적인 종교 간 민족 간 공존의 양식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기층 마을조차도 모자이크형 제국의 구조를 복제했던 것이다. 이스탄불도, 아테네도, 니코시아도, 잡거가 일반적인 정주 형태였다. 땅따먹기 제국주의 시대에 땅 지키기로 응수했고, 땅을 가르니 사람들마저도 갈라졌던 것이다.

마침 지중해의 풍향도 달라지고 있다. 서풍이 잦아들고 동풍이 일어난다. 유럽연합(EU)이 내분으로 갈팡질팡하는 사이, 러시아는 남하하고 터키는 기력을 회복했다. '그렉시트(Grexit)'가 불발되었을망정 그리스는 부쩍 러시아와 돈독하다. 동방정교회의 일원으로 문명적 연대감을 회복해가고 있다.

신오스만주의를 표방하는 터키 역시 키프로스의 재통일에 우호적이다. 러시아와 터키의 합작으로 발칸반도와 동지중해(나아가 아라비아 반도)의 풍경을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다. 키프로스는 재차 지중해의 축도이자 척도이다. 21세기의 바람이 어디로 불지 가늠해보는 시금석이자 풍향계가 될 것이다.

2016년 6월 방문 이래 키프로스의 통일 담론을 주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청량한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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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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